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매월 넷째 주 더뮤지컬 웹사이트를 통해 연재됩니다.
Be yourself. 이를 주제로 한 작품은 차고 넘친다. 문장은 간단해 보여도 실천이 상당히 힘들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나답게 살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는 어떤 것에 움직이는가. 수많은 철학적 질문 끝에 일련의 답이 도출된 후에는 ‘행동’이라는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내 안의 두려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허들이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개인의 의지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이유로 부정당하지 않으려면, 타인과 사회의 태도가 중요하다. 뮤지컬 <킹키부츠>가 ‘Be yourself’만큼 ‘Just be’를 강조하는 이유다.
<킹키부츠>는 영국의 지방 도시 노샘프턴의 신발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price&son’이라는 이름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로 이어져 온 곳이다. 부동산 업자가 건물 외벽을 살린 리노베이션을 제안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그러나 ‘오래됐다’라는 형용사는 대체로 ‘보수적’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프라이스 앤 선은 ‘좋은 신발’을 목표로 운영됐지만, 이들의 신발에서는 계절을 반영하는 것 이상의 변화를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공장 직원들도 노샘프턴에서 나고 자라 여기서 일을 구하고 가정을 꾸린다. 변화보다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니 공장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찰리가 데려온 드랙퀸 롤라와의 만남은 아마도 이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평생 클래식한 남성화만 만들어온 이들에게 드랙퀸을 위한 80cm 부츠 제작이라니.
화려하게 치장한 롤라의 등장에 모두가 얼어붙어 있을 때, 유일하게 그를 반기는 인물이 로렌이다. 그는 어떤 감정이든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로렌의 성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The History of Wrong Guys’다. 짝사랑부터 유부남, 알코올중독자, 집착남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연애를 벌써 10번을 했다. 실패로 인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에 집중하는 찰리에게 또다시 반한다. 솔직한 로렌에게는 주로 ‘단순하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연애는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 로렌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그 힘은 타인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실패와 좌절에도 금세 다시 자신을 찾아간다. 로렌의 연애는 ‘흑역사’로 점철되었지만, 자신과 타인 모두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로렌이 공장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 역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배제된 곳에는 기업의 낡은 가치관과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나태함, 틈새시장이 보인다. 그는 찰리의 관점을 바꾸는 아이디어와 함께 징징대지 말라는 지적도 따끔하게 한다. 찰리와 밀라노 슈즈 패션쇼를 준비하던 중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로렌은 자신의 실수를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편.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고 동료들과도 두루 잘 지내는 로렌은 ‘있는 그대로’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킹키부츠>는 공장이라는 작은 세계를 통해 사회가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한다. 솔직한 마음을 가감 없이 털어놓고 그 감정이 왜곡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서로의 영역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소통하는 일, 공동의 목표 아래 빈틈을 함께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누군가를 외면하거나 과하게 연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저 로렌처럼 자신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면 모두를 그대로 수용하고,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의 손을 내밀어 함께 걸으면 된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곧 타인을 향한 시선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나로서 온전히 서지 못한 채로 타인을 판단한다. 이 판단은 옳은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로렌은 <킹키부츠>의 주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롤라의 말에 "그게 다야?"라고 반문하는 돈처럼, 로렌처럼 혹은 롤라처럼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존재를 무대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생각보다 더 큰 응원이 된다. 요즘 나는 로렌 덕분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