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실 시를 꾸준히 써왔거든요. 필명도 지었어요.“ 인터뷰가 마무리 될 즈음, 이주순이 수줍음과 설렘이 동시에 어린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시를 좋아하는 <드라이 플라워> 속 정민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훨씬 전부터 꾸준하게 시를 써왔고, 자신이 써둔 시만 벌써 열 편이 넘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지어준 필명은 ’이 여름‘. 봄에 태어난 그는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하는데, 풋풋한 봄을 지나 모든 것이 무르익는 녹음의 계절을 새로운 이름에 붙여주고 싶었단다. 언젠가 자신이 쓴 시를 세상에 공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주순이 <드라이 플라워>의 정민을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테다.
뮤지컬 <드라이 플라워>는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통해 성장하는 다섯 청춘의 이야기다. 이주순은 호기심이 많고 시 읽는 것을 좋아하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년 임정민 역을 맡아 무대에 서고 있다.
2022년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빌리 로러 역을 맡았을 때 더뮤지컬과 인터뷰로 만났는데, 그 후로 벌써 2년이 흘렀어요. 지난 2년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도전의 시간이었어요.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새로움’이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다가온 2년이었죠. 2023년에 출연한 연극 <나쁜자석>의 프레이저는 그동안 연기해 보지 못한 성격의 인물이어서 새로웠고, 뮤지컬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이하 <쿠로이>)는 제 마음을 열어준 작품이라서 새로웠어요. 사실 저는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회식이나 사적인 모임에 나가는 걸 즐기지 않았거든요. 원래 술을 마시지 않기도 하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런데 <쿠로이>는 작품은 물론 해웅이라는 캐릭터가 주는 긍정적인 힘이 컸고 동료 배우들에게서도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스스로를 가뒀던 울타리가 저절로 열리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회식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고, 동료들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죠. 배우로서의 삶의 태도에 전환점이 되어준 작품이에요.
<쿠로이> 이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 출연했고, 공연을 마친 후에는 6개월 넘게 휴식기를 가졌어요.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나요?
<몬테크리스토>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바라보는 시야를 조금 더 넓혀준 작품이에요. <브로드웨이 42번가>와는 또 다른, 크고 색다른 경험이었죠. 그렇게 도전과 새로움, 변화라는 키워드가 마음속에 새겨지고 난 뒤에 저만의 방식으로 휴식기를 가지고, 다시 무대에 서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하게 돼서 좋더라고요.
휴식기에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어요. 먼저,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쳤어요. 그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하면서 저도 다시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보냈어요. 또, 글과 시를 썼어요. 원래도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끄적여 둔 것들이 있었는데, 휴식기 동안 그 글들을 조금씩 채워 나갔어요. 그래서 정민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 더더욱 기뻤어요. 제 안에 쌓인 시간과 기억을 바로 캐릭터에 녹여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 거니까요.
그 외에는 자연을 만끽하는 데에 시간을 쏟았던 것 같아요.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나보고, 천변을 걸으면서 오리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이외에 또 다른 도전을 한 게 있다면, 술을 마셔봤다는 거?(웃음) 당연히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술을 종류별로 접해 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그 경험 자체가 되게 좋았어요.
<드라이 플라워> 역시 ‘새로운 도전’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에요. <드라이 플라워>와는 어떻게 만났나요?
지난 여름에 오디션을 하나 봤어요.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연기를 준비해 오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연기를 보여드려야 할 지 한참 고민하다가, 문득 제가 쓴 글을 낭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생각이 담긴 글이야 말로 저 자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그래서 오디션장에서 이런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글을 낭독했죠. 그 자리에 이현정 안무 감독님이 계셨어요. 그 작품과는 연이 닿지 않았지만, 얼마 후에 <드라이 플라워>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현정 감독님이 그 오디션 날의 제 모습을 떠올리고 정민 역에 추천을 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감사했어요. 그러고 바로 공연 영상을 찾아봤는데, ‘빗속에서’ 넘버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마음을 빼앗겼어요. 저는 <드라이 플라워>가 가지고 있는 청춘의 낭만이 너무 좋아요. 그 낭만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선택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주순 씨가 맡은 정민이라는 인물에게는 ‘잦은 전학으로 친구 하나 없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밝게 살아간다’는 설명이 붙어요. 이 설명을 보고 정민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하더라고요. 정민을 잘 표현하기 위해 가장 많이 고민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연출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희의 공통적인 생각은 표현의 정도가 중요하다는 거였어요. 정민이가 과거에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왜 전학을 많이 다녔는지, 그리고 유석이는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등 두 사람의 전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성이 흐려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집중한 건 정민과 유석의 첫 만남부터 그들이 멀어지던 순간까지, 모든 장면을 최선을 다해 섬세하게 연결하는 거였어요. ’빗속에서‘ 장면은 정민이와 유석이가 가장 행복해 하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다음 장면인 ’갈라진 길‘에서는 두 사람이 멀어지죠.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서 가장 괴로운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흐름을 섬세하게 그려내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가 두 사람에게 너무 잔인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정민이가 유석이를 처음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서로 동질감을 느끼면서 가까워지고, 축제에 함께 나가기로 결정하고, 어떤 이유로 마음이 엇갈리게 되는, 두 사람의 모든 순간을 최대한 꼼꼼하게 채워서, 온 마음을 다해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주순 씨가 연기하는 정민에게 유석은 어떤 존재라고 느껴졌나요?
드라이 플라워. 정민이가 유석이와 함께 창고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드라이 플라워를 발견하고 그 꽃을 유석이에게 가져다주는데, 그때 드라이 플라워와 유석이가 겹쳐 보이더라고요.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고, 잘못 다루면 금세 바스러져 버리지만 드라이 플라워만이 가진 아름다움이 있죠. 그런 면이 유석이랑 비슷해 보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극 중에서는 그려지지 않은 정민과 유석의 미래에 대한 해석이 관객마다 다르더라고요. 주순 씨의 생각은 어때요?
관객분들이 보고 느끼시는 게 언제나 정답이지만,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덧붙여 보자면… 저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민이는 유석이와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해서 기억을 잘라내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품고 추억으로 간직했을 아이예요. 에필로그 넘버인 ’바다와 소년‘에서 정민이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건 유석이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신에게 힘이 되어줬던 정민의 모습, 즉 유석이가 무대에 선 그 순간 떠올린 정민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고요.
정민의 또 하나의 과제는 공연 중 하모니카를 직접 불어야 한다는 점이죠. 연습할 때 어려움은 없었어요?
물론 어려웠지만, 다른 분들보다 습득이 빠르긴 했던 것 같아요. (웃음)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하모니카를 자주 불어주셨거든요. 저도 옆에서 가끔씩 그걸 불면서 놀아서 그런지 하모니카가 마냥 낯설지는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곡을 연주한다는 건 정말 차원이 다르게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제작사에서 하모니카를 하나씩 장만해 주신 덕분에 레슨도 자주 받고, 혼자 연습도 계속하면서 몸에 익혔지만 공연 중에 연주를 하는 건 아직도 어려워요.
공연 중에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첫 번째 목표라면, 제 두 번째 목표는 저의 하모니카 연주 속에 정민이가 하모니카를 불 때 어떤 마음으로 부는지 녹여내는 거였어요. 때로는 떨리고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벅찬, 그런 마음이요. 그래서 요즘도 매일 연습하고 있어요.
<드라이 플라워>는 각자의 성장통을 겪고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잖아요. 주순 씨의 학창 시절에도 성장통의 순간이 있었나요.
음… . 동생이 많이 아팠었어요. 동생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제가 고등학생 때까지도 안고 잘 정도로 엄청 우애가 깊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스무 살이 되고, 집에서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같이 시간을 못 보냈어요. 제 앞에 펼쳐진 넓은 세상을 즐기느라 동생에게 형의 부재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한 거죠. 그렇게 군대에 갔고, 휴가 나왔을 때 동생이랑 둘이 여행을 갔어요. 그런데 동생이 짧은 거리인데도 숨이 차서 걷질 못하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사실 그 전부터 부모님이랑 통화를 하면 엄마가 ‘동생이 몸이 안 좋다’는 뉘앙스로 말하고는 했었는데, 저는 그냥 ‘고3이라 그래’ 라면서 넘겼거든요.
여행을 마친 후 동생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고,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 당시 의사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대요. 곧바로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저랑은 일치하지 않아서 외국에 있던 누나가 부랴부랴 한국에 와서 골수 이식을 해준 일도 있었어요. 다행히 동생은 몇 년에 걸친 치료 끝에 건강을 되찾았어요. 그때가 저와 제 동생, 저희 가족 모두에게 엄청난 성장통의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들을 겪고, 동생의 투병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니까 내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더라고요. 형제, 부모님,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이 세상에 중요한 건 없다는 걸 가슴 깊이 깨달으면서, 삶을 마주하는 마음가짐도 단단해졌어요.
2017년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배우 생활 7년을 꽉 채웠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배우라는 직업으로 무대 위에서 7년을 보내면서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 새롭게 든 생각이 있다면요.
우선,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데뷔 후에 꾸준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시간을 쏟을 수 있었고, 좋은 기회들 덕분에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걸어왔지만, 사실 매번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처음에 말했듯이 <쿠로이>나 <몬테크리스토>처럼 저에게 새로운 감각을 알려준 작품들을 만났을 때도 그랬고, 잠시 쉬면서 재충전을 했을 때도 그랬어요. 휴식을 마치고 만난 <드라이 플라워>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하고 있고요. 앞으로도 이렇게 행운과 함께(웃음) 매 순간 새로운 마음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