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사랑을 노래하는 멜로 판타지
한예종 음악극 창작과 동문인 박소정 작가와, 김아람 작곡가는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로맹가리의 소설 『벽』을 토대로 20분짜리 단막 뮤지컬을 만들었다. 이것을 발전시킨 작품이 바로 <페디큐어>이다. 20분짜리 단막 뮤지컬에서 하나의 모티프를 얻어 전혀 다른 작품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페디큐어>에는 원작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나의 창작물에서 발아해 새로운 꽃을 피운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단계 역시 무수한 가능성을 품은 또 하나의 씨앗일 뿐이다. 로맹가리 소설에서 <페디큐어>를 상상할 수 없었듯, 이번 리딩 공연에서 최종에는 어떤 <페디큐어>의 모습이 나올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는 신인 뮤지컬 창작자들에게 작품 개발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선보이는 프로그램입니다.
지겹고 진득한 사랑
기자 원래는 로맹가리의 단편소설 『벽』이 원작이었다. 이 소설은 옆집에서 짝사랑하는 여자의 신음 소리를 듣고 비관하여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사실 옆방 여자는 앓고 있었다. <페디큐어>에는 이런 원작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박소정 학교에서 만든 20분짜리 단막 뮤지컬은 원작 소설을 거의 그대로 우리나라 현실로 옮겨왔다. 공간을 고시원으로 옮겼고 남자를 무명 소설가로 바꿨다. 남자가 그냥 죽는 것이 안타까워서 엔젤의 빨간 페디큐어에 영감을 받아서 『페디큐어』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극 중 소설 『페디큐어』는 페디큐어 숍에서 일하는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불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액자 형식으로 써볼까도 생각했다가, 어쨌든 『페디큐어』라는 소설의 완성본이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소설만 다루어보기로 했다.
기자 남자의 소설을 극화한 셈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나?
박소정 아버지가 별에게 27년간 베풀었던 정말 지겹고 진득한 사랑. 그 사랑을 현수가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그 사랑으로 인해 뱀파이어인 별도 인간이 되고픈 욕망이 생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서 판타지 멜로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박소정 작가
기자 글쎄, 작품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지독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버지 자체가 부각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남녀의 사랑만 의식해서인지 별의 감정도 고마운 감정 정도로만 느껴졌다.
박소정 심정적인 주인공은 아버지였는데, 젊은 남자가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배우는 현수의 버전이 되었다. 올리고 보니까 처음 꽂혔던 아버지의 사랑으로 풀어가는 것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 판타지를 소재로 하는데, 그다지 이야기가 튀지 않는다.
박소정 비현실적인 소재라 오히려 더 전형적으로 가려고 했다. 판타지라고 해서 현실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한국적 정서에 어울리는 판타지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자 판타지물이지만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을 준 것은 좋았다. 그러나 작품이 인물들의 전사를 보여주고 끝나버리기 때문에 드라마가 밋밋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다음 이야기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음악 때문이다. <페디큐어>는 궁금하고 매력적인 이야기(플롯이 아닌)를 음악에 얹혀 진행되는 극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박소정 작업을 하면서 트리트먼트에서 음악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무대 어법에 익숙하지 않다. ‘페디큐어’도 몽타즈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가 별의 맨발을 만져주고, 아버지의 큰 신발을 신고 발 전체에 온기를 느끼고, 그러한 온기 때문에 페디큐어를 하게 되는 식으로 점층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것을 무대에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일상적인 드라마와 기괴한 음악
김아람 3주 전 리뷰를 할 때까지도 확신이 없었다. 언니도 영상적인 것을 좋아해서 영상과 무대적인 표현에서 갈피를 못 잡고, 나도 음악을 기괴한 스타일로 유지해야 하나, 평범하게 가야 하나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연출님이 합류하면서 많은 것들이 결정됐다. 기괴한 음악과 일반적인 음악이 반반이었다면, 지금은 7대3 정도. 일반적인 노래가 없어진 것은 아닌데 잘 안 보이게 됐다. 리프라이즈를 한다거나 했으면 더 드러났을 텐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자 음악적으로 좀 일반적이지 않은 음악을 많이 썼는데, 리딩을 해보고 난 후에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느꼈나?
김아람 드라마 따로, 음악 따로가 아니지 않나. 드라마랑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니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본다. 뱀파이어가 주는 이미지를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대나 조명도 그렇고, 배우도 창백한 이미지의 배우가 필요하고, 음악도 뱀파이어가 주는 모호한 이미지를 주어야 했다. 화성학이나 일반적인 어법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고, 가요나 뮤지컬 음악을 계속 듣고 자랐다. 집에서 기괴한 현대음악만 듣고 그러지 않는다. 일반 어법에 맞게 쓰는 게 편한데 그러지 않아야 별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좋을 거 같았다.
기자 흡혈귀가 나오는 일상적인 드라마지만 음악이 예쁜 멜로디나 익숙한 멜로디가 아닌, 낯설고 불편한 음악이어서 비현실적인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김아람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사람이 <페디큐어>를 보고 남긴 트위터 글을 훔쳐봤다. 여기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시험하는 실험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라. 상업 프로덕션이 아닌데 창작자들이 해보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조금 더 공부하고 이런 스타일에 능숙해지면 지금이랑 많이 바뀌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더 편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기자 드라마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현수가 별을 죽이고 아버지의 차로 도망가 잠이 든다. 거기서 유언장과 함께 어린 시절 자신을 키우고 자장가를 불러준 것이 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전 장면에서 이미 플래시백으로 다 알려줬던 내용이 아닌가.
김아람 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자장가를 흥얼거리다가 이 멜로디가 어디서 들은 것인지 모르다가, 별을 죽인 후 마지막 순간에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교통사고 다발 지역에서 별과 아버지의 전사를 어느 부분까지만 이야기하고 멈출 수가 없었다.
박소정 풀 스토리를 구성하고 전사가 부분부분 치고 들어오는 구성을 생각했는데 음악적으로 나눠 들어가기도 힘들어서 그렇게 못했다.
기자 어린 시절 별이 현수를 돌봐주었다는 것을, 자장가를 통해 지속적으로 암시하다가, 나중에 현수가 과거를 알게 된다는 구성은 좋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현수가 별과 아버지 사이에 숨은 사연을 찾아가는 구성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지금 대본에서는 아버지와 별의 전사가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나누어서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플래시백된 과거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과거의 사연을 완성하는 구조, 가끔은 잘못된 퍼즐도 나와서 관객들에게 전혀 다른 그림을 상상하게도 만들고, 그럴 수 있다면 흥미로운 드라마 구성이 될 것 같다.
김아람 작곡가
나를 이해한 것이 가장 큰 도움
기자 리딩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박소정 개인적으로 내가 쓰고 싶은 소재를 어느 정도나 풀어낼 수 있는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수능 보고 성적표를 확인한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장편을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어느 정도인지 간파할 수 없었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김아람 무형의 것을 형상화하여 무대에 올릴 때 다른 요소들과 시너지가 생기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그리고 긴 호흡을 가지고 곡을 뽑아내는 공부를 한 것 같다. 특히 이번 작품에는 노래 한 곡이 장면을 담아내는 빅 넘버들이 많았다. 음악 안에 드라마를 넣다보니 축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효율적으로 드라마를 음악에 담아내는 방식에 대해 공부가 많이 된 것 같다.
*<페디큐어> 작품 설명
병원장 딸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전도유망한 의사 현수는 건강 검진 결과, 아버지의 건강이 심각한 상황이란 것을 알게 된다. 입원 치료를 받으라는 제안에도 만류하고 사라진 아버지를 뜻밖에도 페디큐어 숍에서 만난다. 그곳에서 별이라는 여인에게 자신의 혈액을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아버지와 별 사이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현수는 창백하고 오묘한 매력을 주는 별이라는 여인에게 왜 끌리는 것일까. <페디큐어>는 교통사고 다발 지역에서의 인연으로 27년간 뱀파이어 여인을 보살핀 한 남자의 비밀을 따라간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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