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성의 날 특집_<나라는 이야기>
역사 속에서 잊히고 지워졌던 여성들. 그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다시 펼쳐집니다. 우리가 몰랐던 여성의 삶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평생을 예술과 함께한 실존 인물 김향안의 삶을 다루는 작품이다. 그의 인생을 두 가지 시간 축으로 나누어 동림(변동림, 김향안의 본명)의 시간과 향안의 시간을 교차하며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천재 시인 이상과 만나고 사별했던 동림의 삶은 순차적으로 나아가고, 김환기 화백과 만나고 여생을 함께한 향안의 삶은 역순으로 거슬러 가도록 대비해 예술과 사랑이 김향안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섬세하게 표현한다. 홍지희는 동림 역을 맡아 이번 시즌 처음으로 <라흐 헤스트> 무대에 선다.
<라흐 헤스트>와는 첫 만남이네요. 어떤 마음으로 준비 중인가요.
요즘 머릿속에 김향안 선생님밖에 없어요.(웃음) 벌써 세 번째 시즌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대로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연습을 시작했는데, 향안 선생님에 관해 공부할수록 너무나 큰 세계를 마주하게 돼요. ‘내가 이 분의 삶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라흐 헤스트>와는 어떻게 만났나요?
이번에 출연 제안을 받기 전부터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난 시즌에 꼭 봐야겠다는 생각에 예매까지 해두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보러 가지 못했었거든요. 아쉬운 마음이 정말 컸는데, 감사하게도 이번 시즌에 이렇게 좋은 기회로 만나게 되었으니 큰 고민 없이,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참여하게 되었어요.
동림이라는 인물을 잘 그려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요.
저는 어떤 인물을 연기할 때 제가 얼마만큼 그 인물에게 공감하는지가 가장 중요해요. 그래서 이 인물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요. 동림을 대하는 자세도 같아요. 특히 동림은 단순히 동림으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극 중 미래의 자신인 향안을 만나야 하고, 향안이 바라보고 있는, 향안이 기억하는 동림으로서도 존재해야 하죠.
마지막에 동림과 향안이 만나는 장면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에 대해서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그전까지는 향안이 수첩을 보며 동림으로서 살았던 때를 회상하면, 제가 그 회상 속의 모습을 펼쳐내는 느낌이라면, 두 사람이 같은 나이대가 되어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동림이 향안보다 더 먼 미래를 알고 있는, 다가올 향안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는 상태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향안에게 ‘지금까지의 기억은 내가 간직할 테니, 너는 앞으로 나아가라’는 애틋한 응원을 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어린 시절에 내가 썼던 일기를 읽으며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면, 그건 과거의 내가 나를 응원해 주는 것과 동시에 지금의 내가 나 자신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아직 저도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동림이 하는 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의 생각과 감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라흐 헤스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 자신의 위로와 응원이 되는 이야기라서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나를 확실히 위로할 수만 있다면 세상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저에게 엄격한 편인데, 사실 위로하고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요. 근데 쉽지 않더라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를 믿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언제나 공존해요. 어떨 때는 ‘이 정도면 잘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생각하다가도 어떨 때는 또 ‘좀 더 잘할 순 없는 거야?’(웃음)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도 이제는 저 자신을 조금 더 믿어주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지희 씨도 벌써 15년 넘게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평생을 예술과 함께한 인물의 삶을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정말 감사하고, 신기하고, 벅차요. 제가 지금까지 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은 그분 삶의 일부일 뿐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떻게 사람의 마음의 그릇이 이렇게 넓을 수 있나’ 감탄하게 돼요. 닮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나라면 이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해요. 이렇게 여러 마음이 들다 보니 김향안 선생님의 인생을 더 잘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사그라들질 않아요. 제가 느끼는 이 존경심을 관객분들도 함께 느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벅찬 마음으로 인물을 마주하고 있다니, <라흐 헤스트> 공연을 앞둔 마음가짐이 남다르겠네요.
<라흐 헤스트>가 좋은 작품이라는 건 이미 관객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제가 이 작품에 무언가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것도 좋겠지만, 그저 원래 이 역할을 계속해 왔던 사람처럼 작품과 캐릭터에 잘 녹아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요. 제가 생각하는 변동림이라는 인물이 관객분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에 대본을 보다가 문득, 제가 더 성숙해지고, 인생의 경험을 쌓고 난 후에 향안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영광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먼 미래에 그런 날이 오기까지, 동림을 성실히, 열심히 준비해 보곘습니다.
<라흐 헤스트>는 이상, 김환기의 아내로 기억되던 김향안의 삶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뜻깊어요. 이처럼 잊힌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 꾸준하게 만들어지고 있는데, 지금 여기의 우리가 여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존재했으니까요. 질문을 받고 오래도록 고민해 봤는데, 그것 외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싶어요. 우리의 곁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도 여성들은 언제나 존재했고, 그들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왔으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왜 이렇게 뭉클한 건지 고민해 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가 의식해서 귀를 기울여야만 여성들의 지나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아직 내가 모르는 이야기, 잊힌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싶고요. 이제라도 여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와서 반가워요.
그럼 이제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더 들려오길 바라시나요.
김향안 선생님처럼 누구나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이야기도 물론 더 많이 듣고 싶고,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위인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반대로 한없이 평범한 인간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엄마들의 이야기, 딸들의 이야기, 자매들의 이야기… 자매로 살아오신 분들은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자매들의 이야기가 아름답지만은 않잖아요?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 (웃음) 영화 <세 자매>나 연극 <청소하는 마음>처럼 일상과 맞닿아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오면 좋겠어요.
그런 날이 오기까지, 배우로서 어떤 자세로 변화를 마주하고 싶은가요.
궁극적으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이 생각을 가진 채 살아가고 싶어요. 그게 사소하고 진부한 이야기이든, 너무 아파서 꺼내기 힘든 이야기이든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뿐만 아니라, 배우, 창작자 모두요. 어떤 이야기가 됐든 보는 사람에게 잠시나마 위로와 공감을 주었다면 그 이야기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고민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자 예술가로서 요즘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고민이 있다면요.
어렸을 때부터 나라는 존재가 어떤 가치가 있나 계속 고민했어요. 딸로서, 친구로서, 배우로서 내 존재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가치 있는 것인가 찾아 헤맸죠. 그런데 제가 진짜로 듣고 싶었던 말,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사실 ‘가치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인 것 같아요.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져도, 어딘가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먹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릴 때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좋아야 좋은 거지!‘ 싶어서요. (웃음) 프로페셔널한 배우가 되고 싶어서 항상 날이 서 있고, 긴장을 하고 있는 편이었고요.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은 부드러워졌어요. 저 스스로 좋은 변화라고 생각해요.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괜찮구나, 내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가 이렇게 좋은 거구나’를 최근에 많이 느끼고 있어요.
당신의 삶을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요.
마냥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그렇다고 마냥 슬프지만도 않은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다음으로 들었어요. 왠지 모르게 포스터가 먼저 떠올랐는데, 포스터 속의 제가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더라고요.(웃음) 무의식중에 돌아본 제 삶이 그렇게 애를 쓰는 모습이었나 봐요. 저는 제 삶을 전반적으로 끌고 온 게 책임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저를 살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어요. 늘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지고 아등바등 살았거든요. 무게감에 눌리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요. 그런데 저를 오래 본 동료들이 최근 들어 다들 제 눈빛이 좀 편해졌다고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나이 먹어서 그래‘ 하면서 웃어넘겼는데, 듣다 보니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여유로워졌구나, 그게 눈빛에서 티가 나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삶의 엔딩은 아직 그 누구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평화를 찾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됐으면 좋겠어요.
이제 배우 홍지희는 어떤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싶은가요.
배우라는 이 직업이, 사실 직업이기 이전에 제 꿈이었거든요. 꿈이 이루어졌다는 건 너무 소중한 일이지만, 꿈이 직업이 되다 보니 어느 순간 삶과 일이 분리가 안 되더라고요. 일적으로 힘든 순간들이 제 삶 전체를 뒤흔드는 경험을 꽤 많이 해왔어요. 그러다가 ‘그럼 배우가 아닌 나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저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당연한 일인데 말이에요. 그때부터 배우가 아닌 나도 사랑해야 배우로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인간 홍지희가 조금 더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일희일비 하지 않고,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대학로를 걷는데 문득 내가 이 길을 벌써 10년 넘게 걷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 사이에 건물이 몇 개나 새로 지어졌고, 극장 이름도 몇 번이나 바뀌었죠.(웃음) 앞으로 다가올 10년에도 이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을 품은 채 대학로 길을 걷기 위해서라도, 배우 홍지희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인간 홍지희가 조금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성숙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