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주는 희열에 발을 담그다
뮤지컬 무대 위엔 다양한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이야기와 노래, 무대와 조명이 어우러지고, 그것은 다시 관객을 만나 배우에게로 수렴된다. 그러니 뮤지컬 배우는 자기 자신과 작품, 그리고 객석 안팎을 넘나들며 지치지 않는 고른 호흡으로 무대를 지켜야 한다. 배다해 역시 <셜록홈즈>를 통해 첫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작품이 인기를 얻다보디 자연스레 배우들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녀는 “사실 죄송한 마음이 커요”라고 말했다. 아직 온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뮤지컬 데뷔작인데, 너무 큰 영광을 누리는 것 같다고. “그래도 초연 때보다 자신감이 많이 붙었어요. 내가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해내야겠다고 마음먹게 돼요. 처음에는 피하고 싶고 두려움이 앞섰는데, 계속 깨지다 보니까 오기도 생기는 것 같고요. 이렇게 죽기 살기로 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니까요.” 지난해 초연부터 이번 재공연에 이르기까지 연일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요즈음 심리 상태를 묻는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 벌써 독하다.
노래만 하다가 연기까지 하는 일이 분명 녹록치는 않았을 터. 가수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거나 감동을 줄 수 있지만, 배우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이다. “제가 그 인물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처음에는 공연이 없을 때도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죠. 공연 들어가기 전날부터 루시로 있어야 하는 거예요. 죽고 싶어야 하고, 슬퍼야 하고, 그렇게 있어야 공연 날 집중해서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순간 집중해서 빠져들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한 것 같아요. 지금은 두 자아가 있어요. 내가 있고, 루시가 있고. 처음에는 그게 하나였으니까 빠져나오기도 힘들고 들어가기도 힘들었죠.”
헌데, 이어서 돌아오는 대답이 좀 의외다. 연기보다도 노래가 훨씬 어려웠다고! 본래 성악을 전공했고, 가수로 활동하면서 발표한 음반도 몇 장인데! 무엇보다 그녀의 노래 실력은 이미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져 온 국민이 검증해주지 않았던가. “분명 뮤지컬만의 특징이 있어요. 연기나 노래에 대한 해석 같은 것들인데, 물론 가사가 잘 들려야 해요. 하지만 단순히 잘 들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거죠. 그런데 전 그걸 잘 몰랐던 거예요. 처음엔 제 방식대로 했더니 관객 분들이 그냥 가요 프로그램 보는 것 같다는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대사도 그렇고 발성도 그렇고 뮤지컬 음악은 성악하고도, 가요하고도 전혀 다른 장르인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른 채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해서 머리가 다 깨졌다는 그녀의 농담이 지금은 왠지 뿌듯하게 들린다.
루시 존스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다고 했다. 극 중에서 온전히 다 표현되지 못한 건 자신이 부족해서겠지만, 그 역할의 오명만은 벗겨주고 싶은가 보다. “루시가 원래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거든요. 정말 별별 욕을 다 먹는데, 그만큼 작품에서 루시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거겠죠. 기본적으로는 에릭이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집중하다 보니 루시에 대한 설명이 좀 많이 부족해요. 어떻게든 그 빈구석을 채워보려고 나름대로는 서브 텍스트도 만들고 다양한 표현을 시도해 보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다보니 공연 시작 전에 ‘루시는 에릭을 절절히 사랑한 게 아니랍니다’ 라고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 한마디만 있어도 루시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이 훨씬 잘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것 역시 배우가 넘어서야 할 몫인 거죠.”
학교 다닐 때부터 뮤지컬 제안을 받아왔고 ‘넬라 판타지아’로 보여준 맑고 청아한 음색 덕분에 방송이 끝난 직후에는 수많은 러브콜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무대에 설 수 없었다던 그녀는 <셜록홈즈>를 통해 어느새 훌쩍 성장한 느낌이다. 앞으로도 계속 뮤지컬 무대에서 그녀를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관객과 평단은 이번 작품을 통해서 뮤지컬 배우로서 배다해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인정받을 때까지 하려고요.(웃음) 이제는 다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제 생애 가장 큰 난관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씩 해 나갔을 때의 뿌듯함이나 통쾌함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그 전에 일할 땐 많이 예민하고 스트레스 받고, 남들은 좋아해도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자괴감에 빠지고 그랬는데, 뮤지컬을 하면서는 희한하게 욕을 먹어도 희열이 생기더라고요.” 이전엔 모든 것들이 스스로와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뮤지컬 무대만의 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배다해가 ‘엄마’라는 말을 떼자마자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딸내미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유난히 예뻐했던 어머니 덕분에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냥 제 자체가 음악인 것 같아요, 이걸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고.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삶에 스며있고 내 안에 물들어 있는 거죠.” 하지만 성악을 그만두었을 때를 돌이켜봐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고. 가끔 일하다 마음이 너무 지치고 괴로울 때면, 그냥 정해진 길을 갔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좋다.
“솔직히 저는 잘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요. 공연 관련한 리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인데, 편견이나 선입견은 제가 넘어야 할 숙제인 거고, 제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니까 부딪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저는 관객들 한 분 한 분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요.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꼼꼼하게 듣고, 대화도 하고 싶고요.” 하지만 그녀가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결코 무대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들이 모두 다 만족스럽게 극장을 나갔으면, 어서 빨리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무엇이 진짜 연기인지, 어떻게 하면 잘하는 배우가 될 수 있는지, 이번 공연을 통해서 그녀가 찾아냈다는 그 열쇠는 어쩌면 이미 오래 전부터 손에 쥐고 있었던 게 아닐까. “끊임없이 고민을 하지만 여전히 너무 어려운 문제에요. 그런데 저는 좀 더디게 가더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가고 싶어요. 그런 것들을 같이하는 배우 분들한테 배우고 있어요. 아직 서툴고, 남들보다 더디더라도 가슴으로 얘기하는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인물에 대한 접근이나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런 것들로 연기하고 싶진 않아요. 남들이 봤을 땐 저건 우는 거야 웃는 거야? 라고 해도, 기술적인 연기를 하기보다는 내 마음이 먼저 가고 싶다는 거죠. 결국 그 무엇도 진정성을 이길 수는 없는 거니까요.”
<셜록홈즈>의 대기실은 언제나 즐겁다. 며칠 전엔 왓슨과 루시 역을 서로 바꿔서 연기해 봤다며 촬영하는 틈틈이 그녀는 자신만의 왓슨을 보여주거나 노래를 흥얼거렸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올해가 가기 전에 뮤지컬 한 편을 더하고 싶어요. 너무 민폐가 되지 않는 역할로(웃음), 장르 불문하고 할 수 있다면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은데. 주변에선 다들 말리지만 연극도 영화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죠. 난 뭔가 표현하고 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결국은 그런 걸 넘어서고 싶은 거니까요.” 그녀는 분명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이미 그 희열에 발을 담그고 말았으니, 지금 이 마음 그대로 오래도록 무대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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