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왜 여전히 무대 위에, 무대 곁에 존재하는 걸까?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 더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생각과 신념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담. 세 번째 인터뷰이는 뮤지컬 <에비타>의 배우 김소향, 연출가 홍승희입니다.

뮤지컬 <에비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자리까지 오른 인물 에바 페론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가난한 시골 소녀가 자신의 욕망을 좇아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과 영부인이 된 후의 행보를 다층적인 시각에서 풀어낸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진정성을 더하는 것은 연출가 홍승희, 배우 김소향의 몫이다. 2006년 <에비타> 국내 초연 당시 동료 배우로 함께 무대에 올랐던 두 사람은 19년이 흐른 지금, 작품을 이끄는 연출가와 타이틀롤로서 다시 한번 <에비타>를 마주하고 있다. 에바 페론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으로 삶을 채워 온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한 무대에 섰던 두 배우가 20년이 지난 후, 같은 작품에서 연출가와 주인공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뮤지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서사네요. (웃음)
김소향 그쵸? 거짓말이 아니라, 오디션장에서 연출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했어요.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면 내 인생에서 정말 특별한 일로 기억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디션도 정말 열심히 봤고요. 제가 오디션장에서 한 번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에비타> 오디션 때는 ‘저 진짜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할 수 있어요.’라고 어필하기도 했어요. (웃음)
홍승희 진짜 잘해요. 제가 보장합니다. (웃음) 저도 이 작품을 다시 만난 게, 연출로서 참여하게 됐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2006년 초연을 연출했던 배해일 선생님을 얼마 전에 우연히 뵀어요. ‘제가 이번에 <에비타>를 연출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니 놀라시면서 ‘그래 잘해 봐.‘라고 하시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믿기지 않더라고요.
정말 솔직히 말하면, <에비타>가 이렇게 어려운 작품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무대에 오를 때는 앙상블로서, 댄스 캡틴으로서 내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는 데 바빴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연출가의 입장으로 작품을 다시 만나고, 이 이야기와 인물들에게 더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어려운 지점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20년 전의 시각과 지금의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겠죠? 다시 만난 <에비타>는 어떤 작품이던가요.
홍승희 초연 당시에는 클래식한 고전 뮤지컬이라는 인식이 컸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김소향 제 기억 속의 <에비타>는 ’화려함’이 많이 부각된 공연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에비타>는 치장 하나 없이, 오롯이 에비타라는 인물 하나만 남은 듯한 공연이에요. 어떤 것도 그 인물의 옆에 두지 않고, 관객이 오직 그녀만 바라보고, 그녀의 여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공연이요. 그래서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인물에게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소향 씨는 2006년 초연 당시 ‘페론의 정부’ 역에서, 이번 시즌에는 주인공 에바 페론 역으로 돌아왔으니 작품에 임하는 마음이 한층 애틋하겠어요.
김소향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나 너무 행복해‘예요. (웃음) 배우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인물을 연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생길까요? 에바 페론이 무엇을 위해 살았을지, 그의 이면에는 어떤 면모가 있을지, 화려함 뒤에 숨겨진 그의 외로움은 어땠을지… 인물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작품은 배우에게 정말 특별해요. 단순히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이야기죠.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을 그리면서도 그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 않고, 그의 삶을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에요.
제가 출연했던 작품 중 다시 하고 싶은 작품 중 1순위가 늘 <에비타>였어요. 했지만, 제대로 해보지 못한 작품이니 언제나 그리워했죠. 이 작품을 그 누구보다 기다려 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연습 기간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을 하며 치열하게 준비했어요. 그래서 공연 중에도 깊게 몰입해서 정말 많이 울어요. 연출님이 그만 좀 울라고 할 정도로요. (웃음) 그런데 2막에서 철골 구조물에 올라 관객분들을 둘러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자연스럽게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되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해서, 앙상블 활동을 하고, 배우 생활을 잠시 멈추고 미국 유학도 다녀오고, 다시 돌아와 수많은 고생 끝에 여기까지 온 제 인생이요. 그렇기에 에비타가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오르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죠.
<프리다> <마리 퀴리> 등의 작품에서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했던 실존 인물과 인연이 자주 닿았잖아요. 이번에는 에바 페론의 삶을 무대에서 펼쳐내기 위해 또 어떤 고민을 했나요.
김소향 실존 인물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에비타>의 차이점은, 어떠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기에 앞서서 먼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거예요. ‘나 이렇게 살았고, 살면서 노력 정말 많이 했는데, 내 모습이 당신들에게는 어떻게 비춰져요?‘ 이 사실적인 질문이 요즘의 시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흔들리는 에비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고요. 그녀가 가진 욕망은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흔들리는 모습도 확실하게 표현해야 관객분들이 에바 페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험한 길을 달려서 저 자리까지 올랐지만 병마에 한없이 무너지는, 그저 한 인간이었구나.’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공연 중 에바 페론이 후안 페론의 정부를 마주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지금의 내가 19년 전의 나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일 듯합니다.
김소향 우선, 그 친구들이 너무 귀여워요. (웃음) 공연 시작 전 분장실 복도에 정부 역 맡은 친구들 목 푸는 소리만 울려 퍼져요. 긴장되고 잘 해내고 싶으니까 계속 연습하는 거죠. 그 네 사람(권가민, 은채현, 김가현, 오정우)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친구들이 나중에 어떤 배우로 성장할지 정말 기대돼요.
홍승희 아마 소향 배우도 처음 듣는 얘기일 텐데, 제가 어디 강의 나가면 꼭 하는 얘기가 있어요. 소향 씨가 초연 때 정부 역할이면서 동시에 에비타 커버도 맡고 있었거든요. 그때 주인공 역 배우에게 일이 생겨서 소향 씨가 갑자기 에비타 역으로 무대에 오를 일이 있었어요. 연습 한 번 제대로 할 시간 없이 무대에 오른 건데 한 번의 실수 없이 해내더라고요. 그때부터 알았어요. 이 배우가 나중에 뭐 하나 해낼 거라는 걸요. (웃음) 그래서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조언할 일이 생기면 꼭 이 이야기를 해요. 김소향 배우 같은 프로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김소향 그날은 저도 잊히지 않아요. 그때 저는 정부 역할이기 때문에 무대 옆에서 공연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았잖아요. 근데 한 번도 분장실에 들어가 있었던 적이 없어요. 공연 기간 내내 무대 옆 대기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서 에비타 역 언니들이 하는 걸 지켜봤죠. 그러면서 ‘나라면 저 장면을 어떻게 할까?’ 매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갑자기 무대에 올랐을 때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정부 역할을 맡은 친구들에게도 ‘너희들도 언젠간 에바 페론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옆에서 공연을 바라보면서 늘 공부하고 고민하라‘고 조언 해주고는 해요.
전 초연 때 연출님의 모습도 기억나요. 그 당시 공연의 오프닝을 여는 인물이었어요. 에비타의 서거 소식이 흘러나오면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언니였죠. 근데 3개월의 공연 기간 동안 한 번도 음 이탈 내지 않고 깨끗한 목소리로 그 역할을 해냈어요. (웃음)
홍승희 그때는 매일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목소리가 안 나오면 진짜 큰일 나니까. (웃음)

간결한 무대와 대비되는 강렬한 조명, 앙상블의 파워풀한 군무 등 세련된 무대 연출이 눈에 띄었어요. 2011년 재연 이후 14년 만에 공연되는 <에비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어떤 점에 신경 썼나요.
홍승희 설명적인 무대 세트를 빼고,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에비타가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공사 현장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철골 구조 무대를 구상했고요. 연출적으로도 에바 페론과 그를 둘러싼 노동자들, 민중들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민중을 표현하는 앙상블 배우들의 힘이 돋보이길 바랐죠. 무엇보다, 송스루 뮤지컬인 만큼 음악 안에 모든 드라마가 담겨 있거든요. 그래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에도 포커스를 주고 싶었어요. 음악과 앙상블, 그리고 에바 페론. 이 세 가지 요소에 중심을 두고, 철골 구조 사이를 흐르는 조명, 에바 페론의 빛과 어둠 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어요.
때로는 에바 페론을 비추고, 때로는 시민들을 비추는, 라이브 중계 영상을 활용한 연출도 인상적이었어요.
홍승희 그게 공연 중에 라이브로 송출하는 영상이라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웃음) 많은 시도 끝에 나온 결과물인데, 관객들이 그녀의 삶을 한 편의 흑백 영화처럼 바라보기를 바란 마음도 있고, TV로 송출되는 뉴스를 보는 것처럼 느끼기를 바란 마음도 있어요. 우리도 정치인의 모습은 늘 TV 화면으로만 보잖아요. 객석의 관객분들이 아르헨티나의 국민이 된 듯한 느낌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에비타의 이야기가 마음으로 와닿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근 웨스트 엔드에서도 <에비타> 리바이벌 공연이 화제 속에 공연되었죠. 한국에서는 14년 만에 다시 공연되고 있고요. 이 시대의 관객이 다시 <에비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승희 모든 인간의 거울 같은 작품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랑, 욕망, 야망, 고독 등 여러 감정을 지닌 한 여자이자 한 인간의 인생 이야기니까요. 그런 지점에서 전 세계의, 현시대의 관객이 공감하는 것 아닐까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현재 우리의 사회에 투영할 수 있는 지점이 있기도 하고요.
김소향 저도 이번에 <에비타>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문화 예술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어떠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누군가를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예술을 하는 목적이 뭘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적어도 그저 두루뭉술하게 좋은 이야기만을 하기 위함은 아니더라고요. 과거의 한 시대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 반성할 수도 없으니까요.

에바 페론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수 있도록, 욕망을 중심에 두고 여러 선택을 했어요.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최우선 순위로 두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홍승희 후회하지 않는 것. 예를 들어 무언가를 할까 말까 하다가 억지로 하게 됐을 때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선택한 일이라면 후회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자는 생각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 자신을 속이는 것 같더라고요.
김소향 언니가 정말 긍정적이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 이번에 연습할 때도 많이 느꼈는데, 거의 10명이 한 번에 달려와서 자기 의견을 말해도 웃는 얼굴로 들어주고, 최대한 의견을 반영해 주려고 하더라고요. 스트레스받을 만한 상황이 정말 많았는데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대단했어요.
홍승희 다들 열정을 가지고, 작품이 잘되기를 바라는 좋은 마음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거니까요. 배우들이 아이디어를 주면 시너지 효과도 나고, 작업이 훨씬 재미있어요. 뭐든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아요. 우리는 이 작품을 같이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라는 마음을 먹으면 모든 의견이 고맙죠.
김소향 연출님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는데, 저는 후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선택하고 후회할 때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그 후회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후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서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묻고 싶은가요.
홍승희 지금까지 질문 중에 이 질문이 제일 어렵네요. (웃음) “다음 작품은 뭐 하고 싶어?”
김소향 “나는 이번 해에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한 거 같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올해가 나의 황금기였어.”(웃음) 정말로, 진짜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한 1년이었어요. 물론 내년에도 계속 작품을 할 예정이지만, 지금의 제게 누가 ‘이제 뭐가 더 하고 싶어?‘라고 질문하면 ’다 해서 모르겠어‘라고 할 정도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은 한 해였어요. 음… 그래서 요즘의 제게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나이를 먹을 것인가’예요. 어떻게 해야 잘, 우아하게 늙을 것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연기하고 노래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연출님에게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요. “연출님은 어떤 장르의 작품을 하고 싶은가요?” 사적으로도 늘 궁금했어요. (웃음)
홍승희 저는 늘 제게 주어진 것을 열심히 했거든요? 모든 것이 다 내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혹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스토리나 무대 연출 등 작품에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간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두 분 모두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지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두 분이 무대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힘,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소향 배우 생활을 하다가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 뮤지컬을 관둘까 잠깐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오디션을 볼 때마다 다 떨어지니까. 진짜 그만해야겠다고 강하게 마음을 먹고 있던 때에 택시를 탔는데, <시카고>의 ‘올 댓 재즈‘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슬픈 노래도 아닌데 눈물이 펑펑 나더라고요. 내가 더 이상 이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슬펐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나는 이 일을 무조건 해야 한다는 걸. 그 후로 한 번도 뮤지컬 배우가 아닌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홍승희 그냥. 좋으니까? (웃음) 뭔가를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무대, 조명, 음향, 의상 등등 내가 하나하나 상상했던 것들이 한곳에 모여서 현실이 되었을 때, 그 벅참과 행복함을 포기할 수 없어서 계속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그 과정이 힘든 걸 더 좋아해요. 그 힘듦이 더 큰 행복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