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문화 칼럼니스트가 한 편의 뮤지컬을 심층 분석하는 리뷰를 연재합니다.

보이지 않는 문이 생겼다. 객석을 향해. 뮤지컬 <더 라스트맨>은 이제 더 이상 청년 고독사를 상상케 한, 극단적 고립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10여개 자물쇠로 꼭꼭 잠겨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장면이 유독 눈에 뜨인다. B103 방공호에 홍수가 나고 식수조차 떨어져 가는 극한의 위기에서 유일한 말동무 인형 존버가 집으로 가자고 설득하는 대목이다.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존버를 안고 생존자는 “그래, 집으로 가자”라며 철통같이 닫혀있던 문을 일단 열어 젖힌다. 지난 시즌까지는 살포시 열렸다 금새 꽉 닫혔다면 이번 시즌에는 활짝 열어놓는다. 무대 안쪽 문을 향했다가 이내 객석으로 돌아선 생존자는 객석쪽 보이지 않는 문을 향해 공포와 두려움, 안락과 평온을 저울질한다. 그러나 이내 “우리집은 원래 없었던거야”라며 문을 닫고 자물쇠를 모두 걸어 잠근다. 재연과 다른, 이번 삼연의 변주이다. 한 번이라도 외부의 공기가 가득 들어오도록 문을 활짝 열어봤다는 것은 많은 변화를 상상케 한다. 작품에서 반복되는 메시지인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십시오. 또 친구가 필요하면 찾아오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가 메아리 없는 독백에서 국내외 생존자들(어쩌면 관객들)을 향한 연대의 메시지로 한발 더 다가온다.
좀비 아포칼립스? 청년 고독사?
방공호 대피 초기, 생존자의 “나 혼자 살겠다”던 용기 백배와도 상반된다. 재연까지의 <더 라스트맨>은 작품의 상징적 메시지 중 하나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 마지막 대사에 천착했다. “인간의 모든 지혜는 기다림과 희망 속에 있다”는 명제는 넘버 ‘나 혼자 산다’의 중심 주제이다. 어둡고 축축한 신림동 지하 방공호 B103호에 장기 고립되면서 심신의 균열을 경험하는 생존자가 아직은 식량도 있고 전기도 나올 때 부르는 넘버 ‘나 혼자 산다’는 고립과 탈출 서사의 달인인 뒤마를 향한 자신감이기도 하다. 강렬한 록 음악으로 점증하는 음악은 뒤마를 향한 자신감으로 고립의 두려움을 덮는 구간이다.
“인간의 지혜는 기다림과 희망 두 단어로 집약된다. 작가, 알렉산더 뒤마. 나 할 수 있어.” — M04 ‘나 혼자 산다’ 중
무너지지 않기 위해 주문처럼 뒤마를 읊조리며 식량과 체중을 관리하는 생존자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가 처한 절대적 고독을 반증한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 외피가 선연한 극 초반에 생존자가 붙잡는 뒤마의 문장은 붕괴하는 자아를 지탱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읽힌다. 기다림을 통한 희망을 고대하지만 결코 그것은 오지 않을거라는 공포가 내재되어 있다. 바로 관객의 불안감이기도 하다.
2026년 여름,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더 라스트 맨>에서 이 넘버는 좀 다르게 와닿는다. 정말 실천 가능한 희망을 붙잡아 보려는 노력이 중간 중간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독한 절망과 고립의 서사에 연대라는 희망을 이식한 시도들이 작품 후반에 역력하다. 절망의 순간에 집으로 가자며 잠긴 문을 활짝 연다거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모니터 상 다른 생존자들의 모습, 객석을 향해 열고자 한 가상의 문 등이 그러하다. 동시대 청년들의 주관적 고독을 해부하고 반영하려는 시도이다. 재연 이후 이 작품은 국경을 넘어선 다성적 연대를 실험했다. 재연에서 얻은 폭발적 반응은 상하이, 도쿄, 뉴욕, 런던 등을 거치는 원동력이 되었다. 창작진들은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과 관객들의 반응에서 변화를 인식하고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작품 스스로 고독의 미학에서 연대의 플랫폼으로 정체성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통찰이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은 2021년 국내 초연 당시 독창적인 ‘1인 좀비 아포칼립스 뮤지컬’로 출발했다. 당시 팬더믹 상황에 따른 청년세대의 고통과 고립감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큰 반향을 얻은 바 있다. 2024년 재연에서 미세하나마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가능성을 좀 더 열어둔 변화는 2025년 상하이 라이선스 공연, 뉴욕·도쿄 리딩, 2026년 6개월 가까운 대장정의 삼연(2026.03.24 ~ 2026.08.09.)과 지난 5월부터 6주간 런던 공연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주요 도시의 B103 방공호를 가로질렀다. 스스로를 가둔 채 ‘세상이라는 공포(좀비)’로부터 도피한 생존자의 정체성을 다각화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프닝의 극장이 울릴 정도로 요란한 청각적 비상사태 속에서 저마다의 서사(자립준비 청소년, 공시생, 취준생, 기간제 교사 등)가 담긴 소품을 들고 방공호로 뛰어드는 생존자의 처절한 독백은 살면서 누구나 경험했을, 혹은 경험하는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다. 좀비 창궐을 예견하고 방공호를 마련해 둔 스스로를 칭찬하지만 결국 이는 생존을 빌미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가 된다. 모든 일상과 평범한 인간의 욕망을 희생하며 유일한 대화 주체인 인형 ‘존버’에 의지하는 과정이 안쓰럽다. 결국 1인극 특유의 밀도 높은 고독감과 육체적 고통은 또 다른 생존자를 주기적으로 찾게 만든다. 안전하고 포근한 이상향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외피 안에서 부상하는 현대사회의 소외와 박탈감은 생존자의 신체적 한계 및 공포와 기싸움을 벌인다. 마치 억눌린 풍선처럼 저절로 생존자끼리의 연대가 부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많은 부침을 겪은 생존자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확실시되는 극적 반전 또한 연대를 온전히 막아내지는 못한다. 좀비처럼 들이닥친 인구 조사원이나 월세 내라는 집주인의 독촉에 다시 두꺼운 철문을 닫으면서도 생존자는 바깥 세상의 시간과 관객을 향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다정하게 무반주 생목으로 선언한다. 이기적 생존의 크로노토프(시공간)를 타자와 함께 숨 쉬는 ‘대화의 광장’으로 전복시키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세상의 모든 라스트맨들에게 국경을 초월한 구원과 먹먹한 위로의 여운을 전한다.
2021년 초연 당시 한층 심화된 청년 고독사 문제와 맞물려 무거운 생존 과제에 짓눌린 청소년과 청년층의 가혹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 서사는 이제 실현 가능한 희망, 즉 그들만의 연대로 영역을 확장한다. 재연까지의 서사가 절망과 죽음 충동으로 눅진했다면 삼연은 여기에 생존자들, 명확히 말하면 소외된 이들의 연대가 가능한지, 그렇다면 어떤 변화를 이끌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닫힌 벙커를 통해 한 시대의 감각을 만끽하고 이를 다시 동시대와 연결하는 시공간의 실험이기도 하다. 더 이상 한 명의 생존자에 대한 장르극으로 머물고 싶지 않다는, 수많은 관객들의 호평과 바램이 반영된, 작품 스스로의 성장 의지 같기도 하다.
방공호과 문턱의 크로노토프: 고립의 미학
<더 라스트 맨>이 시도한 미묘한 변화를 탐지하기 위해, 삼연 중인 작품의 캐스트 대부분을 관람하면서 필자는 미하일 바흐친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개념을 떠올렸다. 크로노토프는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로노스(Chronos)’와 공간을 뜻하는 ‘토포스(Topos)’가 결합한 용어이다. 문학 내에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될 수 없이 긴밀하게 얽힌 ‘시공간적 상호의존성'을 의미한다.
이번 시즌들어 <더 라스트맨>은 ‘물리적 격리보다 심리적 고립’에 힘을 실었다. 방공호라는 폐쇄된 공간은 인물이 붕괴해 가는 주관적 시간을 결정하는 크로노토프적 무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더 라스트 맨>이 보통의 대학로 뮤지컬과 달리 매 회차 배우에 따라 무대 공간을 조금씩 변주한 배경이다. 배우가 바뀌면 생존자의 전사(前史)도 모두 달라진다는 것은 무대 소품과 배치도 모두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바흐친에게 크로노토프는 문학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의 내적 연관이다. 시간은 그 안에서 살이 붙어 가시화되고 공간은 플롯과 역사에 반응하는 의미의 장으로 변한다. 이 관점을 적용하면 신림동 B103 벙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몸을 통해 경험하는 고립과 유예, 불안과 버팀의 리듬이 응축된 시공간적 매트릭스가 된다.1) 무대 위에 겹겹이 쳐진 자물쇠와 닫힌 문은 바깥세상이라는 공적 공간의 선형적 흐름과 완전히 분절된 감옥의 크로노토프를 형성한다.
“너비는 구백 밀리미터, 높이는 이천백 밀리미터 / 두께는 육십 밀리미터, 무게는 칠십오 킬로그램 / 안쪽에서 열지 않는다면 밖에선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 M03 ‘The 1 Door’ 중
문과 잠금장치의 물리적 수치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이와 같은 행위는 단지 방어적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의 리듬을 재단하는 메트로놈이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과 나갈 수 없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각인되는 신체적 루틴이다. 김달중 연출이 초연의 물리적 격리보다 이번 시즌의 “심리적 격리와 고립”을 더 전면화했다는 말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2) 벙커라는 폐쇄된 공간이 시간의 성격을 바꾸고, 그 안에서 생존자의 몸은 같은 동작과, 같은 확인과, 같은 불안을 되풀이하며 정체된 시간 속에 묶인다.
후반부 환상이 깨지며 밀리미터(mm) 단위로 계산되던 문이 미터(m)와 톤(t) 단위의 거대 감옥으로 왜곡되는 변주(M13 ’The 2 Door‘)는, 이 문이 단순한 철문이 아니라 내부(안전/망상)와 외부(위험/실재)가 충돌하는 문턱의 크로노토프임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문은 나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지만, 동시에 나간다는 것은 실패와 수치, 관계의 상처를 다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에 결단은 계속 유예된다. 기간제 교사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김지온 배우는 이 대목에서 교장과 교사들, 학생들에게 고통을 당했던 시간들을 복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고통은 고립을, 공포를 넘어서게 한다. 관객 리뷰중 “초연과 다르게 잠시 문이 열리는 장면이 더 마음이 아프다. 조금만 용기를 내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taiji0***)라는 반응은, 바로 이 문턱의 시공간이 만들어내는 유예된 불안을 정확히 감각한 결과이다.3) 이때 벙커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몸으로 경험되는 고립의 시간 그 자체가 된다.

8인의 생존자와 공동창작, 다성성의 크로노토프
삼연에 이른 <더 라스트 맨>의 변모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달중 연출의 전작 계보를 잠시 복기할 필요가 있다. 음악극 <공생, 원>이 가진 시대적 부채감과 연대의 목소리, 1인 연극 <일리아드>에서 관객을 서사 안으로 호명하던 방식, 록뮤지컬 <트레이스 유>가 보여준 과감한 록의 분출 등 그의 궤적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망은 소외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대 위에 담아내려는 욕망이다. 이러한 성향은 전통적인 1인극의 문법을 파괴하는 동력이 된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김달중 연출은 “배우를 여러 명 캐스팅했다면 작품이 그 수만큼 나와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모든 배우와 약 2주간 일대일로 만나 시대적 설득력과 캐릭터의 사회적 전사를 함께 구성해온 이유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상 <더 라스트맨>은 배우와 창작진들의 공동창작 작품이라고 할만하다. 이 과정에서 배우는 이미 완성된 역할을 연기하는 수행자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의 시공간을 대변하는 B103 방공호에 머무는 동시대 청년으로서 정체성과 가치관을 탐구하는 생존자가 되어 작품의 극본을 공동 집필하는 저자이기도 하다. 배우에 최적화된 전사와 대사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번 시즌 <더 라스트 맨>이 형식적으로는 철저한 1인극이지만, 구조적으로는 8인의 생존자가 차례로 벙커를 점유하는 메타 n인극에 가깝게 변주된 것도 이런 창작과정에서 논의된 결과의 반영이다. 취업 준비생(김찬종), 초보 사진사(홍승안), 신입 연기자(김이후). 기간제 교사(김지온), 건설 노동자(주민진), 공시생(정민), 자립준비 청소년(홍나현), 사회 초년생(김려원) 등으로 분기하는 생존자들은 같은 동선과 무대를 공유하지만 전사가 달라지는 순간 벙커의 의미도 달리 해석한다. 각자의 캐릭터를 상징하는 소품들을 기반으로 한 사람에게는 취업 실패 이후 멈춰버린 시간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노동하면서도 도달할 수 없었던 안정의 시간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두려운 미래의 시간이 펼쳐진다. 행불행이 교차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폭소와 오열의 드라마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바흐친이 크로노토프와 인간 형상이 본질적으로 결합한다고 본 것처럼, 이 작품에서 B103 벙커는 곧 인간 형상을 만드는 신체적 장치이다.4)
예스24 홈페이지에 올라온 관객 리뷰는 이 다성성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홍나현 생존자는 그냥 고3이 아니고 자립준비청소년 이야기라 더 눈물이 났다”(jung15***), “회전을 돌수록 생존자마다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매력 있다”(rlarbfl***) 같은 후기는, 관객이 멀티캐스팅을 단순한 해석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적 자아들이 한 벙커 안에 차례로 입주하는 과정으로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B103은 하나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동시대 한국 청년세대의 여러 사회적 시간성을 수용하는 다성적 크로노토프가 된다. 1인극은 집단 초상으로 바뀌고, 하나의 벙커는 여덟 개의 사회적 자아로 분기한다.
브이로그, 존버, 그리고 신체화된 세계 감각
<더 라스트 맨>의 크로노토프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폐쇄적 공간의 구조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몸의 감각과 관계 욕망을 조직한다는 데 있다. 생존자는 끊임없이 카메라를 켠다. 자신의 생존을 기록하고, 생존 규칙을 설명하며, 미래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카메라 앞의 생존자는 혼자 있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다. 이 행위는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 타인이 사라진 세계에서 어떻게든 관계의 시간을 지속하려는 몸의 수행이다. <더 라스트 맨>의 브이로그 장면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된 존재가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는지 그 질감을 드러내는 작품의 심혈 같은 구간이다. 벙커의 시간은 생존자의 목소리와 호흡, 농담과 멈춤, 불안과 과장된 밝음 속에서 관객의 몸으로 이행된다. 더욱이 브이로그 장면은 공연 상연 중 제작사인 네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실시간 송출된다. 벙커에서 관객의 몸으로, 다시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또 다른 불특정 다수 생존자의 몸으로 고립된 이의 연대 바람이 재매개되는 과정이다.
초코파이로 생일상을 차리는 장면은 이 작품의 신체화된 크로노토프를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구간이다. 생존자는 혼자 초코파이를 쌓고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른다. 생일은 원래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기뻐해 주는 공동체적 의례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는 카메라를 켜 스스로를 축하하고 스스로의 관객이 된다. 어떤 배우는 이를 코미디처럼 희화하고, 어떤 배우는 처음부터 외로움과 고독을 전면에 드러낸다. 또 어떤 배우는 어머니의 기억을 길게 붙들며 애도의 의례처럼 만든다. 생일 자축과 초코파이로 대변하는 한국적 ‘정’에 대한 해석은 이 장면을 대표적인 오열 구간, 혹은 힐링 구간으로 인식케 한다. 벙커 속 감각을 자신의 감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존버 인형 역시 마찬가지다. 존버는 곰 인형이지만, 동시에 타인이 사라진 세계에서 만들어낸 최소한의 관계이며, 관계의 시간이 사물 안으로 이주한 흔적이다. 생존자는 존버에게 말을 걸고, 위로를 받고, 때로는 존버의 목소리로 자신에게 대답한다. 배우의 전사와 캐릭터에 따라 디자인이 모두 다른 존버 인형은 생존자와 연결된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존버는 병리적 환상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관계의 시간을 연장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신체화된 크로노토프라 할 수 있다. 몸은 공간을 지각하고, 그 지각은 시간의 성격을 바꾸며 대체품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감정과 의미를 낳는다.

런던 진출과 크로노토프적 재해석
이 동시대적이고 한국적인 문제작이 국경을 넘어 런던 오프-웨스트엔드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 엘리펀트 극장으로 이동한 과정도 잠시 돌아볼 가치가 있다. 지난 5월부터 6주간 이어진 런던 공연은 화제를 모은 젠더프리 더블 캐스트 공연이다. 런던에서는 거의 처음 시도된 형식으로 <더 라스트맨>의 다성성을 실현하기위한 실험이기도 했다. 김달중 연출은 이 작업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전했다. 그는 런던 공연을 준비하면서 애초 작품의 배경을 런던으로 옮겨, 현지 청년들의 이야기로 재구성하기를 원했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러나 현지 제작사의 판단에 따라 서울 신림동 B103이라는 배경이 유지되었다. 웨스트엔드 화제의 뮤지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작가이자 국내에서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와 <카포네 트릴로지>로 잘 알려져 있는 제스로 컴튼이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한국 관객의 성향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유명 작가가 합류한 셈이다. 런던 배우들은 서울 청년의 삶을 영어로 연기했다. 김달중은 이 선택에서 오는 이질감을 끝내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신체화된 크로노토프가 온전히 작동하기에는 극작과 배우들과 현지 창제작진들과 관객들의 융화에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이나 현지화의 문제가 아니다. 신체화된 크로노토프에서 장소는 단순한 지리적 배경이 아니다. 배우의 몸과 언어, 사회적 경험, 관객의 감각이 결합해 형성되는 장소감이다. 서울 신림동 B103은 서울의 주거 현실과 청년 고립, 노동과 생존의 조건이 축적된 시공간이다. 그런데 이 공간을 런던 배우의 몸과 영어 발화, 런던 관객의 감각 위에 그대로 얹으니 시공간의 결절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한 듯 하다. 배우의 몸과 언어는 런던의 현재에 속하고, 공연이 발생하는 장소와 관객 역시 런던에 있다. 그러나 인물의 사회적 역사와 거주 공간은 서울 신림동에 남아 있다. 배우, 공간, 사회적 시간, 관객의 결합이 어긋나는 순간 크로노토프는 분열된다. 2025년 상하이 공연이 현지의 크로노토프로 완성된 경우와는 다른 상황이다.
영국 기술 스태프들과의 노동 문화 차이 역시 이 문제를 확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 창작진은 공연 직전까지 수정과 보완을 반복하는 방식에 익숙하지만, 런던의 제작 환경은 전혀 다른 시간 감각과 노동 윤리를 가진다. 김달중 연출은 한국에서 축적한 공연 제작의 예상값이 런던에서는 상당 부분 유효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작업 스타일의 차이를 넘어, 공연을 삶과 어떻게 연결시키는가라는 가치관의 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런 시행착오가 유의미한 것은 김달중 연출이 끝내 도달한 개방적 결론 덕분이다. 그는 “런던에 가면 런던 라스트맨, 상하이에 가면 상하이 라스트맨, 서울에서는 서울 라스트맨이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상하이 공연에서는 실제로 현지 배우들과 상하이 청년들의 욕망과 좌절을 논의하고 배경을 상하이로 옮겨,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도시의 크로노토프를 새로 구성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즉 <더 라스트 맨>은 여느 국내 창작 뮤지컬과는 다른 결의 DNA를 갖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콘텐츠의 오리지널리티를 박제하여 그대로 재현하는 완성형 수출 모델은, 이 작품처럼 시공간과 관객의 융화가 생명인 경우에는 신중히 고려해야 할 문제다. 현지 창작자들과 젊은 세대가 스스로의 고독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프로덕션 자체를 열린 시공간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이야말로 작품의 DNA를 온전히 수혈하는 필요충분조건일 수 있다. 서울의 벙커를 그대로 복제하는 레플리카가 아니라, 각 도시의 청년이 자신의 사회적 조건과 실패를 반영해 자기 버전의 벙커를 만드는 논레플리카 공연 플랫폼이 유용하다는 진단이다. 이때 비로소 <더 라스트 맨>의 크로노토프는 서울, 상하이, 런던, 도쿄로 확장되는 다도시적 시공간이 된다.

관객의 몸으로 확장되는 크로노토프와 연대의 플랫폼
<더 라스트 맨>의 크로노토프가 작품 바깥으로 확장되는 지점은 관객 반응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와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국가 재난 사태를 선포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77조에 의거 비상계엄을 선고합니다”라는 오프닝 멘트는 장르적 긴장과 동시에 현실의 재난을 작품 안으로 끌어온다. 이어서 “생존자가 있으면 대답하십시오”라는 방송 멘트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응답할 생존자가 있는지 묻는다. 서사적 의미 생산은 텍스트의 추상적 해석만이 아니라 독자의 생생한 심적 이미지와 물리적 현존의 감각, 정서적 반응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최근 관객 리뷰는 <더 라스트 맨>의 크로노토프가 어떻게 객석의 몸에 새겨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생각보다 더 묵직했다, 현대사회의 외로움과 마음의 균열을 건드렸다” 등의 관객 리뷰는 벙커의 시공간이 관객의 신체 감각과 정서적 반응을 통해 재구성되되고있음을 입증한다. 특히 마지막 대사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는 거의 모든 반응을 수렴하며 다시 관객에게 선물처럼 위안을 선사하고 치유 효과로 기능한다. 단순한 위로의 슬로건이 아니라 응답 없는 시간과 닫힌 공간을 통과한 뒤에야 도달 가능한, 인식 가능한 깨달음의 공감대로 작동한 것이다. 극중 생존자는 물론이고 이 작품을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흡입하고있는 관객 또한 가장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 한 마디이기 때문이다. 이에 공감하는 관객들의 리뷰들은 결국 관객들이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전환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객석의 관객은 자신의 고립과 연결되고 비로소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다.
김달중 연출은 초연 이후 이 작품의 중심이 물리적 격리에서 심리적 격리,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같이 연대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부연했다. 연출 의도와 관객 반응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관객들은 <더 라스트 맨>을 “나 또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로 읽는 동시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존자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바램으로 확장한다. 신림동 B103은 이제 무대 안에서만 작동하는 설정이 아니다. 객석의 현재 시제와 접속하는, 살아 있는 크로노토프로 기능한 것이다. <더 라스트 맨>은 단지 한 명의 생존자가 벙커 밖으로 나오는데 그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벙커에 흩어져 있던 생존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는 장면, 다시 말해 고립의 미학이 연대의 플랫폼으로 전환되는 장면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 8개의 스크린중 가운데에 등장하는 다른 생존자의 브이로그가 바로 이런 심리변화의 시각화이다.
자 그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상해 보자. 무대 위 8개의 스크린에 이번 시즌을 함께 빌드업한 8명의 생존자가 동시에 등장하고, 객석의 관객이 아홉 번째 히든 캐스트로서 이 연대에 참여하는 파이널 무대를. 이 송신호는 무대 위 배우의 외로운 독백을 넘어 스크린과 객석, 서울과 런던과 상하이의 방공호를 잇는 청년 생존자 연대의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다. 김달중 연출은 필자의 이런 상상에 대해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라며 공연은 “시대를 반영할 수 없고 시대를 쫓아갈 수 없으면 폐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분히 시대가, 관객이 원한다면 실현 가능한 상상이라는 의미이다.
<더 라스트 맨>은 팬데믹의 물리적 격리에서 심리적 고립으로, 한 명의 생존자에서 여덟 명의 사회적 자아로, 서울에서 다른 도시의 벙커들로 이동하면서 여전히 진화 중이다. 고립된 벙커의 크로노토프는 각자의 일상 속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벙커들을 잠시 한 시간대에 포갠다. 생존자가 마지막 장면에 생목으로, 라이브 밴드 연주없이 전하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는 연대를 촉발하는 신호일 수 있다. 관객을 현실로, 현재 시공간으로 옮겨놓고 서로의 고립과 고독에서 세상을 향해 손을 한번 뻣어보는 것은 어떠냐는, 친절하고 다정한 시공간 실험이다. 이제 라스트 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 아직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다양한 생존자들이 어딘가에 있을 뿐이다. 이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뒤마의 명제는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인간의 모든 지혜는 기다림과 희망 속에 있다”.
참고문헌
- 「문학적 크로노토프와 신체화: 바흐찐 소설 이론과 2세대 인지과학의 만남」,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7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5.
- 미하일 바흐찐, 전승희·서경희·박유미 공역, 「소설 속의 시간과 크로노토프의 형식」,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창작과비평사, 1988.
- M. Bakhtin, “Forms of Time and of the Chronotope in the Novel,” in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 trans. Caryl Emerson and Michael Holquist,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1.
[1] 노대원은 이를 제2세대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시간과 공간이 몸에 기반한 지각과 감각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체화된 크로노토프(embodied chronotope)’ 개념으로 확장한다.
[2] 필자는 7월4일, 김달중 연출과 1시간 반에 걸친 전화 인터뷰를 통해 삼연에 이른 <더 라스트맨>의 변화와 모든 배우들과의 공동창작 과정, 상하이 및 런던 공연에 대한 소회를 정리해 본고에 반영하였다.
[3] 티켓예매처 ‘예스24’ 관객 리뷰중 6월14일부터 7월6일까지 올라온 내용을 참고하여 이 글에 인용하였다.
[4] 노대원이 말하듯, 크로노토프는 작중인물이 맥락 속에 존재하는 방식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형식적 범주이며, 따라서 생존자는 언제나 크로노토프적 존재로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