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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30년 만에 다시 태어난 <페임>…김세은 연출가의 영국 공연 작업기

글 |김세은(연출가·통역가) 사진 |. 2026-08-28 408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김세은 연출가가 지난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에서 새롭게 선보인 뮤지컬 <페임> 프로덕션에 참여했습니다. 현지에서 보내온 생생한 작업기를 확인해 보세요!


사진 : Steven Haywood

 

1995년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에서 영국 초연된 <페임>은 이후 웨스트엔드에 진출해 여러 극장을 거치며 10년 넘게 공연됐고, 해외 투어도 이어간 작품이다. 영국 관객들에게는 한 세대를 대표하는 뮤지컬 가운데 하나인 만큼, 영국 초연 30주년을 맞아 초연 장소였던 같은 극장에서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이번 프로덕션에는 “새로 불붙은, 새로 부활한, 새로 해석한”이라는 슬로건이 붙었다. 단순히 과거의 작품을 다시 올리는 리바이벌이 아니라, 오늘날의 관객에게 맞게 작품을 새롭게 되살리고 다시 해석하겠다는 방향을 담고 있다. 특히나 영화의 ‘Out Here on My Own’, ‘Hot Lunch Jam’, ‘I Sing The Body Electric’ 세 곡을 무대 버전에도 추가한 점도 큰 기대를 모았다.

 

무엇보다 <페임>이 지금까지 사랑받아 온 이유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에 대한 향수가 있다. 예술학교라는 공간에서 처음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망과 창작에 대한 굶주림으로 가득했던 시절, 그리고 그 날것의 아름다움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함께 성장해 가는 것에 대한 찬사다. 이는 내가 관객으로서도 무척 좋아하는 테마이기에, 새로운 <페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조연출로 함께할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채용 공고를 보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 지원했고, 서류 전형을 거쳐 시니어 프로듀서와 연출이자 공동 안무를 맡은 톰 잭슨 그리브스와 면접을 진행한 뒤 조연출로 선발됐다. 이번 글에서는 한 편의 뮤지컬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조연출의 관점에서 기록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작업하며 익숙했던 방식과 영국에서 실제로 마주한 방식 사이에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리 프로덕션 —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만들어지는 것들

이번 프로덕션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구체적인 각색 및 개발 과정을 거쳤다.

 

첫 번째 워크숍은 지난해 9월 진행됐다. 연출 톰 잭슨 그리브스(〈스프링 어웨이크닝〉, 내셔널 씨어터 〈위험한 관계〉, 〈아멜리에〉)를 중심으로 세트 및 공동 의상 디자이너 수트라 길모어(〈앤줄리엣〉, 〈투 스트레인저스〉, 제이미 로이드 연출의 〈선셋 블러바드〉, 〈에비타〉 등), 크리에이티브 어소시에이트 오마리 더글라스, 댄스 캡틴 에드윈 레이 등이 참여해 작품의 새로운 방향성을 탐색했다. ‘기존 작품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보다 ‘지금의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서 출발한 과정이었다.

 

1월과 2월에는 오디션을 통해 배우들을 선발했고, 4월에는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배우들과 두 번째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 시기에는 새롭게 캐스팅된 배우들과 대본 작업을 진행하며, 편곡자 매튜 말론의 새로운 보컬 파트 및 편곡 데모를 적용해 보는 한편, 안무에 집중한 프리프로덕션도 진행했다. 본격적인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대본과 음악, 움직임을 계속 실험하며 작품을 구체화해 나간 셈이다. 덕분에 안무의 상당 부분이 이미 구성되어 있고 배우들 역시 작품의 스타일과 움직임에 대한 이해를 갖춘 상태에서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짧은 리허설 기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이러한 사전 안무 프리 프로 과정은 매우 일반적이다.

 

사진: Johan Presson

 

런던 리허설 — 시간은 짧고, 시스템은 촘촘하게

첫 번째 워크숍을 거쳐 본격적인 리허설에 들어간 첫날, 배우들과 크리에이티브 팀은 모두 동그랗게 둘러앉아 자기소개와 함께 각자 <페임>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저는 <페임>을 정말 좋아했어요. …1월에 오디션을 본 이후부터요!”라고 말하는 배우부터 “불행히도 영화가 개봉했던 때를 기억할 정도로 나이가 많답니다”라고 농담하는 창작진까지, 서로 다른 세대와 인종,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작품을 만난 배우들이 이제 같은 무대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공연의 메시지와도 연결되는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경험했던 <페임> 프로덕션을 언급했는데, 소개가 끝나자 한국에 내한 공연을 왔던 배우와 스탭들이 한국과 관련된 프로덕션 경험들을 이야기해주어 흐뭇했다.

 

런던 리허설은 약 2주 동안 진행됐다. 한국에서 경험한 제작 환경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시간 운영 방식이었다. 이번 프로덕션은 총 5주의 리허설 기간을 거쳐 프리뷰를 시작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영국 상업 뮤지컬 프로덕션에서는 일반적으로 5~6주 정도의 리허설 이후 1~3주의 프리뷰 기간을 갖는 경우가 많다. 공지된 하루 8시간의 리허설 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졌고 연장 리허설은 없었다. 배우들의 근무 시간은 개인별로 모두 트래킹 됐고, 이를 기준으로 스케줄이 운영됐다. 장기 공연이 대부분인 영국의 제작 환경에서는 배우 개인의 컨플릭트도 비교적 적은 편이기에 가능했다. 물론 나는 적어도 며칠 정도는 한국식 ‘텐투텐’으로 치열하게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신 필요한 전문적인 지원은 적극적으로 제공됐다. 미국 액센트 코치, 롤러스케이트 트레이닝, 스페인어 컨설턴트, 뺨을 때리는 장면을 위한 파이트 디렉터, 안무의 비중이 큰 작품인 만큼 피지오테라피까지 다양한 전문 지원이 이루어졌다. 필요한 배우들에게는 1:1 세션이 제공됐고, 언더스터디 배우들 역시 트레이닝에 참여했다. 리허설 초반뿐만 아니라 테크 기간까지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코칭이 이어졌다.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가 갖춘 지원 시스템 역시 눈에 띄었다. 스트레스와 정신 건강, 법률 및 재정적 자문 등 공연 제작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원과 상담이 제공됐으며, 24시간 상담 및 응급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훈련에는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작품의 큰 방향이 바뀌면 이미 준비한 요소를 과감하게 수정하는 것도 특징적이었다. 롤러스케이트 트레이닝은 런던 리허설 초반부터 플리머스 리허설과 무대 테크 기간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됐지만, 장면 간 전환의 방향성이 바뀌면서 최종적으로는 과감하게 삭제됐다.

 

사진: Johan Presson

 

지금의 <페임>을 만드는 조연출의 역할

이번 프로덕션에서 중요했던 것은 단순히 기존 <페임>을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초연 대본부터 2015년에 업데이트된 대본까지를 바탕으로 인물과 관계성을 전면적으로 다시 들여다보며, 지금의 관객에게 이 이야기가 실제로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민하고 혼란스러운 성장기를 창작과 예술로 살아가는 이들은 사실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이러한 행동과 태도가 자칫 일관성 없는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앙상블 중심의 작품인 만큼 개별 캐릭터의 여정이 충분히 두드러지지 않을 수 있어, 장면 사이의 시간과 관계의 흐름에 대한 백스토리를 촘촘하게 쌓고 대본에 없는 실마리들을 앞선 장면들 곳곳에 심었다. 작품 전체를 하나의 성장 여정으로 보다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각 학년의 시작점마다 미스 셔먼의 스피치를 하나의 기준점으로 배치하고 이를 졸업식까지 연결했다. 그 결과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으로 흘러가는 앙상블 뮤지컬이 아니라, 미스 셔먼의 시선으로 학생들의 4년을 되돌아보는 하나의 회상극과 같은 구조가 만들어졌다.

 

또한 원작 영화가 보여준 당시 뉴욕의 어두운 면을 반영해 캐릭터들이 마주하는 위기와 위험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닉에게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둘러싼 분명한 성장 과정과 그로 인한 위기감을, 자신의 몸무게를 유머로 삼는 메이블에게는 음식과 몸에 대한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설정하는 동시에 스스로 행복하게 예술하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창작의 주체성을 부여했다. 가족에게서 오는 부담감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느끼는 열등감 역시 특정 인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솔직한 경험으로 풀어냈다. 새롭게 추가된 영화의 넘버들은 단순히 유명곡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캐릭터의 내면과 여정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접근했다.

 

그렇기에 이번 프로덕션은 기본적인 조연출의 업무뿐만 아니라 드라마터그로서의 역할도중요했다. 나는 이전에 한국에서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통해 연출인 톰과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었다. 이미 서로의 작업 방식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쌓여 있었던 것은 이번에 새로운 버전의 <페임>을 함께 만들어가는 데 정말 소중한 자산이었다. 특히 톰은 리허설 시작부터 모두 앞에서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주었고, 많은 일들을 맡겨주었다. 덕분에 나 역시 필요한 작업들에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어 전념할 수 있었다.

 

연출인 톰이 공동 안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테이블 세션을 맡아서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고, 특정한 테마나 배경에 대한 리서치, 대본엔 없지만 맥락과 연결에 도움을 주는 추가 텍스트들을 정리하고 공유했다. 캐릭터별 타임라인이나 언더스터디 트랙 등을 문서화 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대본은 프리뷰 기간까지 크고 작은 수정이 계속해 이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드래프트를 제시하고 배우들과 논의하고, 또 컨펌한 수정 사항들을 대본에 업데이트해 공유하는 임무도 컸다.

 

특히나 2막 첫 장면을 시작하는 미스 셔먼의 3학년 스피치는 내가 쓴 모놀로그로,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내가 개인적으로도 깊게 믿는 바이기에 실제로 대본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매우 기뻤고, 매일 밤 되새겼고, 대사 일부가 리뷰의 헤드라인으로 쓰이기도 해 뿌듯했다.

 

사진: Talia Palamathanan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 – 무대 너머에서 계속되는 프로덕션

리허설은 이후 플리머스로 이동해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의 제작센터 TR2에서 약 2주 반 동안 이어졌다. TR2에는 세 개의 리허설룸뿐 아니라 세트, 의상, 소품 제작 워크숍이 모두 한 건물 안에 모여 있는 공간이다. 거대한 컨테이너 형태의 건물 구조로 벽 자체가 문처럼 열리기 때문에 제작 워크숍에서 만든 대도구를 그대로 리허설룸으로 반입할 수 있고, 의상 피팅 역시 제작 공간과 가까운 곳에서 효율적으로 진행됐다. 여러 회의실과 밴드 연습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시츠프로브 역시 같은 건물에서 진행할 수 있었다. 리허설과 제작 부서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필요할 때 즉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바다가 탁 트여 있어 쉬는 시간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자연스럽게 바닷가를 오가는 풍경 역시 TR2에서의 리허설 기간을 특징짓는 요소였다.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는 웨스트엔드에서 제작된 훌륭한 투어 공연을 지역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역할뿐 아니라 직접 공연을 제작하는 프로듀싱 극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공연장을 지역 사회와 연결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운영한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가족과 어린이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은 물론 지역 예술가 육성 사업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페임> 리허설과 테크 기간에도 지역 아티스트들의 리허설 참관 프로그램, 조명과 의상 제작 등 실제 제작 부서에서의 실무 트레이닝, 로컬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전시, <페임>의 주제와 연결한 지역 아티스트들의 모놀로그 및 안무 창작 프로젝트 등이 이어졌다.

 

또한 다양한 관객이 공연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자막, 오디오 디스크립션, 수화 공연, 터치 투어, 백스테이지 투어 등의 접근성 프로그램도 운영됐다. 수화 공연이 있는 날에는 배우들도 커튼콜에서 짧게 수화 인사를 함께했다. 하나의 공연이 극장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예술 생태계 및 관객이 공연장에 접근하고 경험하는 방식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방식 역시 씨어터 로열 플리머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사진: Theatre Royal Plymouth 

 

테크 & 프리뷰 —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가는 시간

TR2 연습실에서 리허설을 마친 후엔 리릭 대극장 무대로 옮겨 4일간의 셋업과 4일간의 테크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경험한 제작 일정과 비교하면 이 정도 규모의 작품을 위한 일정으로는 상당히 압축적이다. 그만큼 각 부서가 자신의 역할과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일정만큼 눈에 띄었던 것은 테크를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수정 사항은 계속 발생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감정보다는 시스템이 먼저 작동한다. 각 부서가 자신의 역할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필요한 결정을 빠르게 이어갔고, 결과적으로 매우 침착하고 평화로운 테크 기간이 이어졌다.

 

테크 일정이 짧게 운영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프리뷰를 창작 과정의 일부로 바라보는 방식도 있다. 프리뷰 기간에는 낮에는 리허설을 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올리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수정하고 보완한다. 모든 문제를 첫 공연에서 해결하려 하기보다 수정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지금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와 다음 프리뷰로 넘겨도 되는 문제를 구분한다. 리허설 중 자주 들었던 표현이 “그건 프리뷰 3일 차 문제야”였다.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을 언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첫 프리뷰에는 보통 연출이나 프로듀서가 무대에 올라, 아직 다소 러프할 수 있는 첫 공연을 함께해주는 관객들에게 너그럽게 봐주시고 응원해 주시길 부탁하며, 관객들의 반응이 공연을 완성해 가는 데 필수적인 피드백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감사를 전한다. 우리의 첫 프리뷰는 특히 1995년 초연 당시의 티켓 가격인 £14.50에 판매되어 매진되었고, 연출인 톰이 짧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열렬하고 따뜻한 성원 속에서 프리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프리뷰는 리허설과 공연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테크 이후 계속해서 몸도 피곤하고 작품을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피곤하다. 3주 가량 프리뷰를 하는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 공연들은 이 기간이 가장 힘든 과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도 첫 프리뷰와 두 번째 프리뷰 사이만 해도 메인 넘버인 '페임', 1막 엔딩, 커튼콜, 대사가 계속 수정됐고 이동형 계단 세트가 컷 되기도 했다. 프리뷰는 완성된 공연을 선보이는 기간이라기보다, 관객을 만나는 동시에 작품을 계속 만들어가는 창작 과정의 연장선에 가까웠다.

 

사진: Franny Rafferty

"나의 테크 테이블! 테크 때 만큼은 커피믹스가 필수다." 사진: 김세은 연출가

 

오프닝 — 공연이 완성된 순간, 그리고 그 이후

네 번의 프리뷰를 마친 뒤 토요일 저녁 공연에서 쇼 락이 이루어졌다. 쇼 락, 혹은 쇼 프리즈는 작품이 창작 단계에서 운영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이후에는 새로운 장면을 만들거나 대사를 수정하는 등 창작적인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템포와 디테일을 다듬는 클린업을 중심으로 공연이 유지된다.

 

조연출에게도 쇼 락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리허설 기간 동안 계속 업데이트되던 대본을 최종 버전으로 정리해 모든 팀이 동일한 버전을 기준으로 공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공유한다. 연출과 안무, 동선 역시 이를 기준으로 남은 공연 기간 동안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쇼 락 직후 월요일에는 프로모션용 영상 촬영이 있었다. 한국처럼 프레스를 초대해 장면을 시연하는 방식과 달리, 영국에서는 프로덕션 자체에서 보도자료에 활용할 프레스 키트를 제작해 배포하는 시스템이 일반적이다. 크리에이티브 팀과 마케팅 팀의 논의를 통해 촬영할 장면과 섹션을 구상하고 총 9개의 장면을 촬영했다.

 

화요일 저녁은 프레스 나이트였다. 영국에서는 공연이 프리즈 되고 공식 오픈한 시점부터 리뷰 엠바고가 해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날 평론가와 리뷰어, 업계 관계자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이후 파티가 이어지며, 각 매체의 리뷰 역시 이 시점부터 공개된다. 공연 종료 후 2~3시간 뒤부터 리뷰가 업로드되기 때문에, 다들 읽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파티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그 결과를 따라가게 된다.

 

공연 직후에 4대의 빨간 2층 버스가 모두를 태우고 TR2 연습실의 오프닝 파티로 이동했다. 평소 우리가 연습하던 건물 전체를 80년대 졸업 파티 테마로 꾸며놓아, 같은 공간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플리머스에서 제작된 공연인 만큼 평론가들이 이날만 집중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고, 특히 컴퍼니의 가족과 지인들이 많이 참석해 친근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있었다.

 

밤 11시 30분에는 플리머스의 지역 특산품인 파스티를 실은 푸드 밴이 도착했다. 감자와 고기 등을 넣은 큰 만두 같은 파이 형태의 음식으로, <빌리 엘리어트>에서 할머니가 찾는 간식으로도 등장한다. 공연을 올린 지역의 전통 음식을 함께 나누며 오프닝을 마무리하는 것 역시 이 프로덕션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사진: Johan Presson

 

 

오늘날의 관객 — 30년의 기억과 새로운 만남

관객들의 반응도 흥미로웠다. 단체로 드레스업을 하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는가 하면, 30년 전 <페임>을 기억하는 관객들과 이번에 처음 작품을 만나는 젊은 관객들이 함께 가족 단위로 공연장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나에게 무슨 포지션이냐, 어떤 노트를 적는 거냐며 궁금해 말을 거는 관객들도 종종 있었다. 작품에 대한 좋은 말들을 건네며, 꿈을 이룬 삶이라며 축하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특히 1980년대의 예술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 만큼 소품에서도 세대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대에는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가 등장하는데, 요즘 배우들은 카세트테이프를 어느 방향으로 넣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반대로 댄스 클래스 장면에서 테이프를 다시 감는 소리가 들리자, 어르신 관객들은 그 순간을 너무나 반가워하며 웃고 즐거워했다.

 

이후 공개된 리뷰에서는 주요 매체인 가디언, 타임즈, 더 스테이지 등에서 별 네 개의 감사한 평가를 받았다. 같은 시기에 개막한 다른 대형 뮤지컬들과 함께 비교되며 새롭게 돌아온 <페임>에 대한 관심도 이어졌다.

 

“끝없이 빠른 템포와 즐거운 레트로 감성을 지니면서도, 캐릭터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현재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평이 많았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캐스팅”이라고 표현하며 전체 배우들의 캐스팅과 앙상블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30년 전의 작품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야망과 낮은 자존감, 인종적 편견, 경제적 장벽, 성적 정체성, 착취와 약물 문제 등 작품 속 여러 테마가 오늘날 영국의 불안정한 예술교육 환경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짚었다. 특히 타이틀 넘버를 비롯한 앙상블 장면을 두고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을 하나로 모을 때 공연이 가장 밝게 빛난다”며 그런 순간들에 미스 셔먼의 “성공은 함께”라는 메시지가 가장 분명하게 울린다고 짚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리셉션에서 반복해서 등장한 단어는 에너지, 앙상블, 현재성,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었다. 30년 전 처음 영국 무대에 올랐던 작품을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지금 이 작품이 왜 다시 필요한지를 찾고자 했던 우리의 방향성이 관객과 평단에게도 선명히 전달된 것 같아 기뻤다.

 

사진: Johan Presson

 

언더스터디 리허설과 모니터링— 공연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과정

공식 오프닝 직후 곧바로 언더스터디와 커버 리허설이 시작되는 점 역시 원캐스트로 진행되는 영국 프로덕션 시스템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언제 어떤 상황이 생길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공연의 정식 오프닝 이후 리허설이 시작되지만, 물론 그 전에 최소한의 준비로 무대에 올라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비평가들이 참석하는 프레스 나잇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바로 다음 날에 스케줄 변경이 많기도 하다.

 

조연출로서 무대감독, 협력 음악감독과 함께 스케줄을 계획하고 기본적인 음악 연습, 블로킹과 동선뿐 아니라 캐릭터의 드라마와 장면에 대한 질문들도 함께 다룬다. 나는 역할별 언더스터디를 정리한 도표를 무대감독팀, 음향팀 등 테크니컬 파트와 공유하고, 또 언더스터디 의상을 준비해 줄 의상팀에게도 공유했다. 배우들에게는 배역별, 장면별로 기본적인 동선과 유닛, 액션, 캐릭터 노트 등이 적힌 언더스터디 바이블을 제작해 해당 배우들과 공유했다. 실제로 언더스터디가 공연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당일 풋인 리허설을 진행해 전체 컴퍼니와 호흡을 맞춘다.

 

웨스트엔드의 상주 크리에이티브는 보통 공연이 시작된 이후 언더스터디 리허설과 풋인 리허설을 진행하며, 평소에는 주 2~3회 공연을 관람해 공연의 일관성과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노트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뿐 아니라 공연이 시작된 이후 그 완성도를 유지하는 시스템까지 하나의 체계적인 제작 과정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진: Theatre Royal Plymouth 

 

컴퍼니 문화 — 무대 밖에서 만들어지는 앙상블

연습 전부터 컴퍼니는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방법, 어떤 대명사로 불리기를 원하는지, 알레르기 및 건강 상태, 계약 기간 중에 모두와 함께 축하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등을 조사했고 연습실, 공연장 등과 관련된 정보와 함께 웰컴팩을 제작해서 배포했다. 오케스트라, 상주 기술 스태프 등이 확정되면서 웰컴팩도 업데이트되었다. 생일을 맞은 컴퍼니 멤버들은 영국의 상징적인 콜린 애벌레 케이크로, 비건인들은 물론 비건 케이크로 축하를 받았다. 나 역시 연습 기간 중 생일을 맞았는데, 마침 음악조감독과 생일이 같은 날이라 함께 두 배로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

 

우리는 컴퍼니에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배우들이 있어 땅콩의 반입이 전면 통제되었다. 이렇듯 개인별 식습관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식사 제공이 없고, 대부분의 배우 스태프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과는 달리 차 문화가 강한 영국은 휴식 시간도 커피 브레이크가 아닌 티 브레이크이고, 우유 역시 일반 우유에 오트, 아몬드, 두유 등 대체 우유들이 구비되며, 간식 역시 비건, 글루텐프리 등의 옵션이 항상 제공된다.

 

플리머스는 인접한 콘월과 지역 경쟁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콘에 크림을 먼저 바르냐 잼을 먼저 바르냐 하는 귀여운 논쟁이다. 우리도 두 가지 모두를 먹어보고 투표를 하는 재미있는 액티비티를 진행했는데, 이때에도 모두를 위해 비건 스콘, 비건 크림, 다양한 성분의 잼들이 공수되었다.

 

영국 공연에서 미국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차이 가운데 하나는 워밍업 문화다. 개별적으로 워밍업을 진행하는 미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음악감독이나 댄스 캡틴이 리드해 배우들이 함께 워밍업 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웨스트엔드 공연들 사이에서는 80년대 레트로, 프라이드 등 특정 테마에 맞춘 워밍업을 여러 공연팀이 함께 진행하기도 한다. <페임> 역시 런던 리허설 마지막 날 프라이드 테마의 워밍업으로 리허설을 마무리했다.

 

바닷가를 마주하고 있는 플리머스라 프로듀서가 연습 첫날부터 “꼭 수영복 챙겨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단체로 여름 휴가를 온 듯한 마음으로 함께 수영도 하고 보트 트립도 가고 국립공원도 방문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학교 단체”냐고 물어봐서, 캐스팅을 참 잘했구나 싶었다.

 

사진: Johan Presson

 

마무리 — 함께하는 성장, 함께하는 창작

이번 프로덕션을 통해 내가 다시 확인한 것은 결국 공연을 만드는 일도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다양한 작업 방식을 경험하며, 영국에서 한국 출신의 연출가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한국과 영국, 서로 다른 문화와 작업 환경 사이에서 내가 가진 나만의 경험과 관점을 나누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작업 방식으로부터 배우며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계속 작업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리뷰가 이어지면서 이번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영향력 있는 유명 프로듀싱 컴퍼니의 관계자들도 공연을 관람했고, 새로운 만남과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이 결정된 것은 없지만, 조만간 런던에서 더 많은 관객들과 <페임>을 만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마음을 내가 2막 시작에 직접 쓴 ‘3학년’ 모놀로그로 마무리하며 전하고자 한다.

 

“3학년. 여정은 계속됩니다.

기대치는 높아지고 경쟁은 심해지고 중요성은 여느 때보다 커진 지금. 허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내 사람들을 찾았다는 것. 빛나는 혼돈 속, 우리라는 부족을.

도전하게 만든 선생님, 영감을 준 친구들, 어려운 시기를 지나올 수 있게 함께한 사람들.

우리는 성공이 1인극이라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서로가 있기에, 조금씩 목소리가 커져 갑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말할 수 있는 힘을, 서로가 있어,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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