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뮤지컬 <드라큘라>는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여인만을 사랑한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다. 드라큘라 백작이 평생에 걸쳐 사랑한 운명적 상대는 바로 미나. 조정은은 2014년 처음 <드라큘라>의 미나를 만난 후 2020년과 2021년에 이어 이번 시즌 다시 한번 미나 역을 맡아 무대에 서고 있다.
2001년 뮤지컬 <태풍>으로 데뷔한 조정은은 올해로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작품의 개수나 활동 햇수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매 순간 눈앞의 작품에 집중해 온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저는 어떤 작품을 할 때 자신감이 넘치거나 ‘나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성향이 아니에요. 작품을 선택할 때도 조심스럽고 신중한 편이죠. 그래서 25년을 활동한 것에 비해 작품 수가 많지 않고요. 늘 조심조심하면서 지금까지 왔는데, 그게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하니까 스스로 애썼다는 생각도 들어요.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일은 제가 재미있어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늘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일만큼 저를 열정적으로 만드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차분하게 걸어온 25년의 시간을 축하하듯, 지난 1월 열린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는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25년간 신중하게 한 발씩 내디뎌 온 그를 한층 단단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이 더욱 뜻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높은 산 같은 작품이었어요. ‘이걸 진짜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했고, 자신이 없어 출연 제안을 여러 차례 고사하기도 했죠. 출연을 결심하고, 공연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굉장히 낙심했던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제게 ‘뭘 기대했어? 그게 네 실력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저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죠. 눈물이 찔끔 나면서 정신이 바짝 차려지더라고요. ‘그렇지, 이게 내 실력이지. 내가 뭘 기대한 거지?’ 싶었어요. 그 말 덕분에 ‘지금 내가 ‘0’의 상태구나, 그럼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는 감상에 빠지지 않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큰 산을 정면 돌파해서 넘고 나니까 더 큰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마주하는 태도는 오랜 시간 무대를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저는 연습을 오래, 많이 해야 하는 배우예요. 빨리빨리 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예전에는 그게 참 아쉬웠어요. 다른 사람들은 몇 번만 연습하면 금방 잘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저한테는 다행이었다 싶어요. 그렇게 천천히 쌓아 올린 덕에 오히려 꾸준히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성향상, 배우라는 직업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다. 배우 생활을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에, <드라큘라>가 조정은에게 찾아왔다. 그는 “2013년 <레미제라블> 공연을 마친 후, 공연을 쉬면서 충분히 고민했다. 그때 스스로 내린 답은, 단지 두렵고 자신이 없는 것일 뿐, 이 일이 재미없거나 하기 싫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작품이든 상관없이,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2014년 <소서노>에 이어 <드라큘라>를 만났고, 그러면서 작품을 준비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드라큘라> 초연 때 정말 치열하게 준비했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연출님께 끝까지 물어봤죠. 그때는 좋은 사람이 되는 걸 포기했던 것 같아요. 제가 끊임없이 질문해서 분위기가 싸해지더라도 ‘오케이, 하지만 나 이거 알아야겠어’ 하는 마음이었어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무대에서 연기를 잘 해내는 게 저한테는 더 중요했거든요. 그렇게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기하는 데 큰 재미를 느꼈어요.”

앞서 말했듯 조정은에게 <드라큘라>는 연기의 재미를 다시금 일깨워준 특별한 작품이다. 벌써 네 번째 만나는 미나이지만, 이번 시즌의 미나는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조정은은 익숙한 역할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작품과 캐릭터는 같지만, 제가 바뀌었잖아요. 나이가 들었고, 여러 경험을 했고, 다른 작품들도 만났죠. 이번에는 ‘미나에게서 새롭게 찾아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이전에 했던 걸 그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다행히 연출님의 디렉션과 새롭게 만난 배우들 덕분에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완전히 새로운 걸 찾아냈다기보다는 이 작품과 인물이 저한테 와닿는 폭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조정은은 미나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관객이 미나의 이야기를 단순히 구경하는 입장으로 남는 것이 아닌, 인물에게 공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미나에게 깊숙이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라큘라>는 음악에서 느껴지는 드라마의 힘이 커서, 저도 연기할 때 음악에 담긴 드라마에서 많이 발견하려고 했어요. 제가 생각한 미나는, 드라큘라를 단순히 매혹적인 남자로 봤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던 미나가 드라큘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늘 마음속에 막연하게 있던 무언가, 즉 전생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게 되는 거죠. ‘방황한 끝에 내 앞에 그대가 서 있다’는 드라큘라의 노래를 들으면서 미나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경험을 했을 거예요.”
<드라큘라> 공연을 마친 후, 조정은은 또다시 차근차근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계획이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오래오래, 배우로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에 집중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애썼던 때가 있어요. 결과적으로는 부족함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것은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좋은 부분도 보지 못하게 됐었죠. 그 후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됐어요. 나는 나니까, 나라는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언제까지 배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이 일을 쭉 하고 싶어요. 너무 소박하지만 그게 제일 큰 목표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