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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렛미플라이> 정분·선희, 삶을 탐험하는 사람

글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유)렛미플라이 2026-10-16 173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뮤지컬 <렛미플라이>의 이야기는 1969년 7월 16일에 시작한다. 아폴로 11호 발사 당일, 남원은 복장학원 합격증을 받고 정분과 함께 서울행을 준비한다. 다음 날 눈을 뜬 곳은 2020년의 하숙집이다. 꿈꾸던 패션 디자이너가 아닌 수선장이가 된 남원 곁에는 정분이 아닌 선희라는 할머니가 자신의 아내로 있다. 남원은 1969년으로 돌아가기 위한 미래 탐사를 시작한다.

 

왜 1969년일까. 인류에게 1969년은 달 탐사를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해다. 남원에게는 복장학원 합격으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 때이기도 하다. 정분에게는 기대와 슬픔이 공존하는 시기다. 남원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꿈꿨지만, 아버지의 사고로 고향에 남아야 하는 상황.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제한된 삶이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생긴다. 남원은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때 놓쳐버린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과 정분이라는 사랑을 되찾으려 한다.

 

남원과 정분에게는 각자의 꿈이 있다. 남원은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고, 정분은 달에 가고 싶다. 하지만 두 사람의 꿈은 현실이 될 가능성에서 차이가 있다. 남원에게는 복장학원 시험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지만, 정분에게는 꿈을 현실로 옮길 뚜렷한 경로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라이프>지를 읽고 또 읽으며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밖을 상상하는 것뿐다. 정분의 꿈이 현실과 먼 이유는 단지 달에 가는 길이 어려워서만은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비극을 술로 달랜다. 당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폭이 넓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분에게 꿈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아폴로 11호의 발사는 그런 정분에게 더 중요하다. 인간이 실제로 달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정분이 꿈꾸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마저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부러운 거야.” 누군가에게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에게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분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없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정분 자신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NASA에서 일하는 여성 과학자들을 보며 궁금해하는 일이다. 중요한 일을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러나 호기심과 부러움은 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의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잣대가 된다.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자신이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멀리 갈 수 없는 상황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결국 정분이 부러워하는 것은 성공한 사람의 성취가 아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다. 좁은 방에서 꾸는 꿈이 빛난다고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막연하고 거대한 꿈일지라도 달에 가겠다는 마음만큼은 정분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분의 꿈은 사라졌을까.

 

 

두 사람은 또 다른 갈림길에 선다. 아버지의 사고로 서울에 갈 수 없는 정분은 남원에게 이별을 고한다. 뒤늦게 서울행 기차 앞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남원은 돌아와 정분의 곁을 지키기로 다짐한다. 두 사람은 오래 함께하는 미래를 선택하고, 익숙한 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며 둘만의 달을 만든다. 정분이 선희가 되는 것도 이때다. 이들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막연하게 꿈꾸는 것이 아닌,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구체적인 순간들을 선택한다. 패션 디자이너와 달 탐사라는 각자의 꿈이 함께하는 미래라는 일상으로 옮겨간 셈이다. 열아홉의 정분이 일흔의 선희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선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그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섬세하게 채소를 기르고, 한 자리를 오래 지키며, 함께 살아온 남원의 일상을 살핀다. 선희(善喜)라는 이름처럼, 기쁘고 좋은 순간을 쌓아가면서.

 

이러한 태도는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남원을 대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남원은 자신이 살아온 현재보다 꿈을 꾸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선희는 그를 억지로 현실로 데려오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남원이 과거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그의 장단에 맞춰준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 거기서 행복하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문장은 남원이 어떤 시간 속에서 행복을 느끼든 그 마음을 존중하고 기꺼이 곁에 있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선희는 남원의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 불가능을 꿈꾸는 정분에게 “연설하고 있네”라고 시니컬하게 말하거나 ‘지팔지꼰’을 외치며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원의 기억 속 정분은 현실에 주눅 들지 않고 타인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꿈과 순간마다 내린 선택들, 그로 인해 걸어온 시간까지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 바라볼 때, 내가 살아온 시간을 실패와 후회만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정분은 좁은 동네를 누비는 일을 ‘탐험’이라 불렀다. 선희는 기억을 잃은 남원과 과거를 다시 탐험한다. 탐험 끝에 무엇이 있을까.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선택이 모여 삶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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