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클로저>(2004)는 인생작으로 꼽는 이가 수두룩하다. 나탈리 포트만(앨리스 역)이 눈물을 흘리며 주드 로(댄 역)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은 개봉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바이럴된다. 스토킹, 가스라이팅, 성매수, 로맨스 스캠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세계, 남성은 도취하거나 회개하고 여성은 머물거나 애원하는 장면을 동일선상에 두는 세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이성애 중심의 로맨스가 작동하는 방식이 대체로 그러하다. 자기연민에 휩싸이기 쉽고, 자기위로가 따른다. 이 세계의 이성애 구조가 완전히 뒤집히지 않는 한 영화의 명성은 지속될 것이다.
영화가 감상주의적 한계를 드러낼 때면, 연극 <클로저>에서 대안을 찾는다. 연극 관객은 댄이 그릇된 탐욕을 정당화할 때 실소를 터트리고, 성매수에 거리낌없는 래리에게 비웃음을 보낸다. 간혹 참을 수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야유를 뱉어내는 관객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시대 반응이 피부에 닿을 때 비로소 <클로저>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클로저>는 영국 극작가 패트릭 마버가 쓴 희곡으로, 스트리퍼 앨리스, 사진작가 안나, 부고 기사 담당 기자 댄, 피부과 의사 래리 등 각기 다른 사랑의 방식을 지닌 네 남녀가 복잡하게 뒤엉키며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1997년 초연되어 그해 유수의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휩쓸었고, 한국을 포함해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50여 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상연,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영화가 개봉한 2005년 첫 선을 보인 이래 올해까지 무려 11시즌에 걸쳐 무대에 올려졌다. 2010년까지 매년 공연되다 한동안 공백기를 거쳤던 이 작품은, 지난 2024년 8년 만에 새로운 번역본으로 무대에 돌아왔다. 당시 번역은 스타 번역가 황석희가 맡았으나, 이후 그가 강제추행 및 불법촬영 등 성범죄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단 한 시즌 만에 이름이 사라졌다.

연극은 안나에게 거절당한 댄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안나의 이름과 자주 찾는 장소를 이용해 음란채팅을 벌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댄의 대화 상대는 성적 쾌락에 빠진 래리다. 댄은 래리와 음란채팅을 이어가고, 수족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다. 약속된 시각, 여느 때처럼 수족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안나는 다짜고짜 다가온 래리와 마주친다. 안나는 자신이 채팅 속 인물이 아니라고 해명하지만, 래리는 도리어 화를 내며 몰아붙인다. 안나는 이 모든 사달이 댄이 저지른 일임을 직감한다.
<클로저>가 쓰인 199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온라인 통신망이 보급되며 사이버 공간이 대중화되던 시기였다. 온라인 통신망 이용자들은 거리와 상관없이 낯선 사람과 실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대화가 실제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시대상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상공간에서 시작된 만남의 약 33%가 실제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1997) 역시 PC통신 채팅방을 매개로 마음을 나누는 두 남녀를 그려내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낭만을 심었다.
그러나 기술 발전에 따른 그늘도 있었다. PC통신 대화방을 통한 음란채팅으로 중고생 70% 이상이 음란물에 노출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1997)가 발표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서는 사이버 언어폭력과 스토킹, 성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연극 속 댄의 악행처럼 PC통신에서 만난 여성과 헤어진 뒤 해당 여성의 연락처 등 개인정보를 성인 사이트에 유포해 성노동자로 위장시키는 악의적인 범죄가 잇따랐다. 이러한 기술 기반 폭력 양상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AI) 발달로 로맨스 스캠과 디지털 성범죄는 한층 정교해졌고, 직장 동료나 학교 동창 등 지인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범죄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재난으로 등장하였다.
2026년 무대에 오른 <클로저>는 타인의 개인정보를 도용해 성적 유희의 도구로 삼는 행위가 명백한 범죄라는 인식이 상식으로 자리 잡은 시대, 그리고 스토킹과 가스라이팅을 로맨스로 포장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상연되고 있다. 낯선 이가 불쑥 던지는 성적 언어가 성희롱이라는 인식도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의 안나라면 래리와 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경찰서로 달려갔을 테다.
이 지점에서 연극은 작품을 동시대에 옮기는 방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답은 ‘거리두기’. 영화가 인물의 감정선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면, 연극은 관객이 인물들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도록 여지를 남긴다. 김지호 연출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아름답고 몽롱한 멜로, 연극은 이상과 다른 현실 속 사랑에 대한 연민과 냉소”다. 무대 위 네 인물은 서로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배신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각자가 신봉하던 사랑의 정의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관객은 이들의 균열을 관찰하며 저마다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영화를 관람하며 느꼈던 감상과 일치할 수도, 또는 완전히 상충할 수도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영화와 연극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는 안나와 앨리스의 관계성에 있다. 영화는 두 여성을 분리하여 유대와 소통을 단절시키는 반면, 연극은 두 여성이 대면하여 감정을 교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안나와 앨리스는 짧은 대화를 통해 여전히 낯선 존재인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경험을 한다. 짧지만 진실된 교감이다. “헬로, 스트레인저”(안녕, 낯선 사람)라는 작품의 상징적 대사는 두 여성의 대화를 거쳐 비로소 완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