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초연된 <쓰릴 미>는 이후 매해 공연장을 옮기면서 공연됐고, 그때마다 극장에 맞게 무대 디자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여섯 번째 재공연 무대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투입된 사람은 오필영 무대디자이너다. 그가 디자인한 무대에는 어떤 은유가 숨어 있을까? *편의를 위해 ‘나’는 네이슨으로, ‘그’는 리처드로 표기한다.
무대 공간은 대본에 쓰인 장소가 아닌 등장인물의 관계에서 나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때 말하는 관계란 인물 간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물과 시대의 관계, 또 인물과 장소의 관계 등 작품 속에 나타난 여러 관계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디자인 작업의 출발점이다. 더욱이 <쓰릴 미>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2인극인 만큼 네이슨과 리처드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디자인을 풀어가는 핵심 열쇠였다. 그런데 궁금증을 풀어줄 실마리를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오리지널 캐스트 리코딩 음반을 듣다가 ‘Now our lives will be entwined completely’라는 가사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Entwined’라는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Entwined, 뒤엉켜있다!(이는 나와 그가 함께 부르는 ‘계약서’ 가사 중 일부로, 국내 공연에서는 “완벽하게 묶인 우리 인생과 우리들의 우정”으로 번역됐다.)
이번 무대 디자인에서 네이슨과 리처드의 공간을 명확히 구분 짓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네이슨이 리처드의 공간을 차지하고 리처드가 다시 네이슨의 공간을 장악하는, 즉 한 공간을 뺏고 빼앗기는 행위를 통해 함께 엉킨 채 끊임없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두 남자의 관계를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연출가가 두 사람의 공간을 나눠달라고 요구했다면, 공간은 구분 짓되 서로 교차해 쓰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절대 한 사람이 한 공간을 쓰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대로 네이슨과 리처드의 관계에 집중해 작품을 보다 보면 두 사람의 심리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게 된다. 이 영민한 소년들은 각자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치밀한 신경전을 벌이며 그 과정에서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결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요즘 말로 하면 그야말로 밀당의 선수들이다. 그런데 밀당의 핵심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 아닌가. 네이슨과 리처드 역시 시작부터 끝까지 숨기는 게 너무도 많다. 무대 디자인의 시각적 컨셉은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Somethings is Behind’, 무언가 숨겨져 있는 무대. <쓰릴 미>의 유일한 세트라 할 수 있는 책상과 침대를 어딘가에 숨겨 놓고 빈 무대로 공간을 사용한 건 다 이 테마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이외에도 상징적인 은유가 세트 곳곳에 숨어있다. 첫 번째 은유는 직사각형 무대. 극장의 원형 돌출 무대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날카롭게 떨어지는 사각형으로 바닥을 만듦으로써 공간 자체가 이들을 압박하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 두 번째 은유는 벽체다. 4개의 벽체는 조리개처럼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벽 뒤로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이는 두 사람의 심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 벽체의 무늬는 핏줄을 상징하며 핏줄로 얽힌 이들의 운명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결국 두 사람이 피로 계약한 피의 맹세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 않나. 따라서 피의 맹세 장면을 좀 더 부각 시키고자 한 의도도 있다.
그렇다면 컨셉과 반대되는 프로젝션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영상은 배경을 설명하는 장치가 아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네이슨의 회상이기에 프레임 안에 옛 사진 한 장이 꽂혀 있는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던 거다. 뚜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아닌 흐릿한 이미지를 사용한 건 그래서다. 네이슨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기억의 사진 속에서 리처드가 걸어 나오고, 네이슨의 가석방으로 이야기가 끝나면 리처드는 다시 그 기억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네이슨은 정말 자유를 얻은 걸까? 심의실의 문을 닫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억의 문을 닫음으로써 리처드를 영원히 자신 안에 가둬놓고 싶었던 게 아닐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9호 2012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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