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내가 처음 본 뮤지컬은 1993년에 롯데월드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레 미제라블>이다. 정식 라이선스 공연은 아니었지만 국내 초연이었고, 남경주 씨가 마리우스로 출연했다. 당시 나는 대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이었고 오페라를 좋아했는데,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대서사극이 잘 압축돼서 빠르게 진행되면서도 음악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페라와 다르게 역동적이며 열정적인 무대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방면의 음악 작곡에 관심이 많을 때였지만, 내가 앞으로 뭘 하면 좋을지 조금 막연했다. 그때 마침 <레 미제라블>을 보고선 ‘내가 가야할 길은 이거다’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극 음악을 할 수 있을까.’ 황홀한 충격에 빠져 이후에 대여섯 번쯤 더 본 것 같다. 폐막까지 남은 공연 횟수가 많지 않아 그 정도였지, 더 오래 공연했다면 더 많이 봤을 거다.
당시 공연 때 한국 캐스트로 녹음한 음반이 나왔다. OST 음반을 사서 그걸 다 외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뮤지컬을 처음 봤고 작곡을 배우고 있을 때라, 드라마와 음악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는 몰랐고 곡을 만드는 것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저런 멜로디를 만들었을까.’ ‘같은 곡이 또 나오는데 저렇게 편곡을 했구나.’ 가장 좋아하는 곡을 꼽기 힘들 정도로 <레 미제라블>의 모든 곡을 좋아한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과 ‘Stars’ 등 좋아하는 곡이 많다.
뮤지컬 작업을 갓 시작한 초보 시절, 작곡할 때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많이 응용했다. <레 미제라블>의 ‘One Day More’을 가장 좋아했는데, 한 명씩 각자 솔로로 부르다가 점점 합창이 되는 곡이다. 내가 작곡가로 데뷔한 <하드락 카페>는 록 음악이 주였고 소극장 공연이었다. 그런데도 ‘One Day More’ 같은 곡을 만들고 싶어서, 인물 각자의 테마 곡을 만들 때부터 그 멜로디들이 합쳐졌을 때 한 곡이 될 수 있도록 구상했다. 그렇게 만든 곡을 1막의 엔딩에 넣었다. 앞으로의 전개를 암시하는 정도의 장면인데, 마치 나라를 구하러 가는 사람들처럼 한 명씩 나와서 비장하게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고 결국은 5중창이 되는 거대한 곡을 만들었다. 리듬이나 멜로디는 다르지만 ‘One Day More’과 비슷한 형식의 곡을 만들어놓고선 혼자 만족했다. 그런데 함께했던 연출가를 비롯하여 뮤지컬 경험이 많은 스태프들이 곡이 너무 무겁다고 하더라. 그땐 내가 조금 알면 다 아는 것만 같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걸 하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낯 뜨겁다. 작곡에 대한 욕심만 앞섰지, 극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쑥스러운 과거지만 그만큼 <레 미제라블>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 덕에 이후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금까지 뮤지컬 음악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좋은 작품을 따라하려 하지 않고 독창적인 나만의 것을 찾으려고 연구하고 있다. 국악을 활용하지 않고 서양 음악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한국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그런 음악을 들려주고자 노력 중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1호 201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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