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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목소리가 마음을 <키스 미 케이트>의 릴리 [No.83]

글 |박민정(객원기자) 일러스트레이션 | 권재준 2010-09-07 4,966

목소리가 마음을 <키스 미 케이트>의 릴리

 

 

“당신 정말 원하는 게 뭐야?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프레드는 다그치며 물었지만 릴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프레드는 재차 물었고, 그녀는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대신 엉뚱하게 화부터 냈다.
“프레드, 당신은 배우라는 사람이 어쩜 감수성이 그 모양이야?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지!”
그들은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이혼 후의 재회로 기뻤고, 그토록 오랫동안 기대려왔던 것이 서로였다고 생각할 정도로,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내 집에 돌아온 듯 아늑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짐도 잠시, 다시 잘 지내보기로 약속했지만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댄다.
“프레드, 취향 한번 독특하지. 로아 레인이 그렇게 좋았어?”
릴리는 지난 공연에 함께 출연했던 로아 레인에게 프레드가 전하려던 꽃이 자신에게 잘못 배달되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로아 레인 얘기를 할 거야? 당신 그런 태도가 날 얼마나 숨 막히게 하는지 알아?”
평소 같으면 지지 않고 대꾸했을 릴리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마음을 열 준비도, 진실해질 용기도 없으면서 프레드가 다시 내 곁으로 오기를 바라는 것일까?’
릴리는 피로감을 느꼈다. 공연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생활은 전과 다를 바 없는데 유달리 더욱 피로하다고 느끼는 것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우선 순위에 두면서, 숙제 안 한 아이처럼 괴로워했다. 육체적인 노동에서 오는 피로가 아니라 긴 상념 끝에 오는 피로였다. 
‘내가 좀 더 상냥하게 굴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릴리는 종종 후회해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자잘한 습관을 바꾸려드는 프레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프레드는 그녀가 입을 가리지 않고 크게 웃거나, 우당탕 소음을 내며 계단을 오르내릴 때, 그녀에게 주의를 주며 길들이려 했다. 그럴 때마다 릴리는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부정당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속상했다. 로아 레인이라면, 모르는 척 남자들의 취향에 맞춰 주었겠지? 릴리는 동시에 여러 남자를 사랑하고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는 로아 레인이 부러웠다. 로아 레인은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길 뿐, 자신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누구든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다른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한 사람을 원했고 그 대상에만 몰입하고 싶었다. 이런 릴리의 집요함은 프레드를 질리게 했고, 말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프레드의 무심함은 릴리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사실, 릴리는 큰 사건 앞에서는 쉽게 체념하면서도 사사로운 일에는 목숨을 걸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프레드, 당신은 참 가벼운 남자야.”
“당신도 나랑 이혼하고 나서 다른 남자와 약혼했잖아? 왜 나한테만 야단이지?”
그런데 릴리는 새 애인을 만나고 근사한 데이트를 즐기면서도 단 한 순간도 프레드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프레드를 잊고 싶었다면, 그가 제작하는 작품에도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한 번도 진정으로 이별하지 않았다. 진짜 이별하려 했다면 둘 중 누군가는 연락처를 바꾸고 이사를 가고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치우고 영영 연락 불가능한 장소로 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마주보고는 있지만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한때 릴리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이라면 두 사람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프레드의 일이라면 자신이 다 알고 있기를 원했고,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 모르는 추억이나 비밀이 간직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자신의 기호에 맞게 상대방을 길들이려 할수록 그들은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프레드, 정말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게 뭘까?`
“말하고 나면 별 것 아닐 것들도 가슴속에 담아 두면 뭔가 대단한 게 되잖아. 난 정말 눈치도 없고 행간을 읽을 줄도 모르지만 당신 얘기를 잘 들어줄 준비는 돼 있거든.”
“나 정말 애정 결핍인가 봐. 너무 두려워서 이렇게 바보같이 행동하게 되거든. 당신이 내게서 떠나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신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했어.”
릴리는 평소답지 않게 마음속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이 좀 어색했다. 진심을 감추려고 일부러 반대로 행동하는 모습은 그녀가 연기했던 말괄량이 ‘케이트’와 꼭 닮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여동생 비앙카와 비교당하며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케이트처럼 그녀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악역을 자처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감추려고 정반대로 행동하는 게 더 쉬운 이유는 뭘까?
“아무도 당신을 억압하지 않아.”
“그런데 나만 그런 거야? 다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고 사는 거야?”
릴리는 가슴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가득했다. ‘왜 좋아하는 프레드에게는 당장 끝낼 것처럼 행동하고, 관심도 없는 남자와는 약혼까지 했던 것일까?’ 그녀는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들이 의식의 바깥으로 나오면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버리는 이유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3호 2010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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