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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만족하는 순간 퇴보한다, 박은태 [No.105]

글 |정세원 사진 |김호근 2012-06-11 8,520

 

시퍼렇게 날이 선 루케니로 오랜 시간을 보낸 탓인지, 이제 막 <엘리자벳> 무대에서 내려온 박은태는 ‘예민해졌다’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루케니로 살아온 4개월 동안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엘리자벳>과의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모차르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박은태와의 대화를 전한다.

 

 

<엘리자벳>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기분이 어떤가.

힘들게 연습을 했는데, 다행히 큰 탈 없이 잘 끝낸 거 같아 만족스럽다. 기대 이상의 칭찬을 받은 것도 감사하고. 사실 <엘리자벳>의 루케니는 오랜만에 새로 만난 캐릭터라 기대가 컸지만 부담은 더 컸다. 다른 형님들과는 다르게 루케니를 사이코패스적인 인물로 풀어낸 것도 마음에 든다.


무대에서 보여준 광기 어린 눈빛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루케니를 사이코패스로 해석하게 된 건가.

루케니는 살인을 계획한 현장에 엘리자벳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칼의 방향을 바꾼 거다. ‘어? 그래? 죽여야지!’ 하면서. 그런 사람이라면 무정부주의자나 정부를 비판하는 혁명가보다는 사이코패스로 표현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코패스 루케니의 인생이 보일 수 있도록 풀어갔다. ‘밀크’에서 시민들을 선동한 것도 그들의 삶이 안타까워서라기보다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 그저 우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중간에 대사를 바꾼 것도 그래서다. 게다가 100년 동안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더 심하겠나. 첫 신과 마지막 신에서는 원 없이 보여준 것 같다. 이번 공연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인물을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작업이 얼마나 재밌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없나.

왜 없겠나. 원래 정신병원 신은 루케니의 애드리브가 필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나는 최민철, 김수용 형님처럼 순발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내공도 부족한 사람이다. 적절한 애드리브가 떠오르지 않아 스트레스를 좀 받았는데, 나중에는 너무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려고 욕심 부리지 말자 싶더라. 나만이 풀어낼 수 있는 루케니가 뭘까 다시 고민했고, 극에 어울릴 만한 나만의 주관을 담은 대사를 추가하게 됐다. ‘미친 세상이 미친 사람을 만든다’는 내용의 뫼비우스 띠 얘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물론 내가 못해서 바꾼 거라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 같다. 연출님이 의도하신 바는 아니었지만, 100년 동안이나 반복되는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엘리자벳이 왜 죽어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또 거기에 우리네 삶을 투영해야 할 것 같았다. 하나의 큰 굴레 속에 들어있는 우리네 인생 말이다. 그런 얘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해설자밖에 없지 않나. 근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잘난 척해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루케니 역으로 더 뮤지컬 어워즈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솔직히 기대는 좀 했다. 상을 받고 싶다기보다는 후보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내가 해석하고 연기한 루케니를 다른 분들도 인정해주신 거라 생각할 수 있으니까.


결과도 좋길 바란다. 공연 마친 후에는 뭐하며 지내나.

밀렸던 레슨 하고, 또 받고 있다. 발레하고 성악. 발레는 루케니의 풀어진 자세가 안 나올까봐 <엘리자벳> 하는 동안 쉬었는데 몸이 좀 굳은 것 같아 다시 시작했다. <모차르트!> 연습 들어가면 시간 내기가 힘들어질 거라 여유 있을 때 해야 한다. 오늘도 인터뷰 마치면 레슨 받으러 간다. 내가 좀 피곤한 성격이라 마냥 쉬지를 못한다. 그래도 요즘은 노래하기 위한 컨디션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니까 잠은 좀 못 자도 마음 편히 흐트러진 생활을 하고 있다. 어제도 새벽 4~5시까지 만화책 <나루토>를 봤다.

 


모든 생활이 노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맞다. 스무 살 때부터 그런 고민을 해서 그런지 컨디션이 안 좋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면 노래가 안 된다. 그래서 가수가 안 맞았나보다. 가수들은 오전에도 노래할 일이 종종 있지 않나. 주신 달란트가 다른 것 같다. 뭔가 갑작스럽게 해야 하는 일에 좀 약하다. 그래서 뮤지컬이 편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떤가. 부담스럽지는 않나. 근본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른 선생님들을 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또 있더라. 내가 레슨 받으면서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는 엄격한 선생님이다. 뮤지컬이라는 세계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뭐든 쉽게 얻으려 하지 말라고 채찍질을 많이 한다.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무조건 이 악물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노파심이 드는 것 같다. 


박은태라는 이름 앞에는 성실함, 노력형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다른 수식어가 욕심나지는 않나.

팬들 사이에서는 ‘까칠한 배우’라는 수식어도 생겼다.(웃음) 사실 나한테는 ‘성실과 노력’이 전부다. 타고난 재능도 없고 선천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지도 않으니까. 성실하다는 건, 마지막에 부여잡은 한 가닥 희망 같은 거였다. 조인성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타고난 재주도 없고 배우로서의 출발도 늦고…. 성실하기라도 해야 했다. 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끈질김이다. 내가 상처도 잘 받고 흔들리거나 넘어지기도 잘하는데, 요즘 들어 많이 예민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별일 아닌 일에 흔들리는 나를 보면 더 큰 일을 당하면 얼마나 휘청거릴까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지금 나한테는 오뚝이 정신이 필요하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의외다.

나는 매 작품 할 때마다 ‘지금이 내가 넘어질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목을 크게 다친다거나 작품의 흐름에 흡수되지 못해서 ‘박은태 왜 저래?’ 하는 시기 말이다.

성대결절로 고생했던 <노트르담 드 파리> 국립극장 공연 때의 충격이 꽤 컸나 보다.

어쩌면 내가 그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정말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다. 성악을 7년째 배우고 있는 지금도 그랭구아르의 노래를 하면 힘든데 그땐 얼마나 심했겠나. 내 실력은 생각도 않고 오디션에 합격한 기쁨에 들떠서 성남 공연을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한 거다. 내 목이 얼마나 약한지, 컨디션 조절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내가 한국의 그랭구아르’ 하는 자만심이 있었던 것 같다. 성남 공연 이후라도 쉬었어야 했는데 <사랑은 비를 타고>, <햄릿> 등에 연이어 출연했고, 그 후에 다시 <노트르담 드 파리>에 합류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성악 레슨을 받으면서도 선생님 말씀을 잘 안 믿었다. 내가 잘난 줄만 알았다. 레슨 때는 대충 하고 노래는 내 멋대로 하고. 결국 성대결절로 고생하고 초연 때 좋게 봐주셨던 분들한테 욕먹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성악 레슨도 제대로 다시 받았고. 지금의 고음들, 목을 덜 상하게 하는 방법들은 다 그때 배운 것들이다. 역시 사람은 바닥을 쳐야 자기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더라. 아마도 그 시기가 다시 올 것 같다.

그런 내일을 생각하면 불안한가.

그걸 불안해 할까봐 불안하다. 내가 점점 예민해지고 있는 거나, 나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는 거, 그로 인해 내가 달라지고 싶어 하는 마음… 언젠가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놓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해지는 것 같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나보다. 데뷔 이후로 거의 쉬지 않고 작품을 해서 더 그런 것 같다. 근데 또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나 싶기도 하다. 할 수 있을 때, 목 관리를 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달려볼 생각이다.


스스로 예민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 계기가 있나.

글쎄. 작품을 하면서 배우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면 깊숙한 곳의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원래도 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더 예민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앙상블 할 때 선배들한테 ‘배우는 변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도 많이 변해있더라.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어쩔 수 없는 과도기 같다. 무대에 서면 관객들과 기 싸움을 하게 되지 않나. 실수라도 하게 되면 수백 수천의 관객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스트레스가 있다. 블로그나 트위터 등에서 보게 되는 좋지 않은 리뷰들도 상처를 주기는 마찬가지고. 다른 분들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나한테는 문화적인 충격이다. (김)준수와 작업하면서 한번도 그가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돈과 인기는 있을지언정 자기 삶을 포기하고 팬들을 피해 다녀야 하지 않나. 그런데 어느 순간,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그런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응원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하고 잘해드리고 싶지만, 지치고 힘들 때는 나 또한 그분들한테 이해받고 싶을 때가 많다. ‘박은태가 떠서 변했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 같다.

 


<모차르트!>는 벌써 세 번째 무대다. 이번 공연은 김준수라는 큰 그늘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그래서 부담이 크다. 대중들에게 <모차르트!>는 항상 김준수의 <모차르트!>였으니까. 그걸 깨보고 싶은 욕심은 있다. 경쟁심이라기보다는 ‘뮤지컬 배우 박은태가 연기하는 <모차르트!>도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도 좀 봐 주세요’ 하는 마음인 것 같다. 그렇지만 지난 공연처럼 뭔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앞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마음을 비우고 연습하면서, 그 흐름에 맡겨보고 싶다. 나태해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내지 않겠다는 얘기다.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컨디션으로 공연을 보여주고 싶다는 거다. 첫 공연 관객들과 마지막 관객들이 같은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노력형 배우 박은태가 해석하는 천재 모차르트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분들은 아마데를 내면 또는 분신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저 천재성으로 해석했다. 볼프강 모차르트는 천재가 아니라 ‘아마데’라는 천재성의 굴레에 갇혀 사는 불쌍한 실현자일 뿐이다. 놀고 싶어 하고 사랑도 하고 싶어 하고 아버지와도 잘 지내고 싶어 하는 보통의 청년이지만, 항상 아마데에 의해 방해받는다. 돈을 벌 수 있는 쉬운 음악을 써야 하지만 우주 언어를 써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굴레를 갖고 태어났을 뿐이다. 볼프강은 행복해지고 싶어서 아마데를 떠나지 못하는 거다. 마지막 장면에서 항상 눈물이 나는데, 천재성이라는 존재 역시 피의 영감이 사라진 후에는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아마데로 인해 모든 사람을 떠나보냈는데 그 역시 등을 돌려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모차르트가 행복해지기 위해 아마데를 찾는다고 했는데, 당신은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하나.

당연히 뮤지컬이다.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좋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나를 믿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들이다.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공부하라고,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없다. 멀쩡히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노래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믿어주시는 만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나도 자식을 낳으면 그렇게 키우고 싶다.


현재의 고민은?

노래와 연기에 대한 고민 말고는 특별히 없다.


노래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당신이 생각하는 노래 잘하는 배우는 과연 어떤 배우인가.

<빨래>에서 할머니 역을 하셨던 이정은 배우. 기술적으로 보면 음정도 이상하고 발성도 없고 노래라고 하기 힘든 노래를 하시지만, 듣는 사람을 펑펑 울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분처럼 노래하고 싶은 게 최종 목표이긴 한데 마음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닌 거 같다. 지금도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는데 남는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내공이 부족한 탓이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노래와 연기는 만족하는 순간 퇴보하기 시작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5호 2012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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