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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LAL INTERVIEW] <라카지> 천호진 [No.105]

글 |김영주 사진 |심주호 2012-07-02 4,917

 

 오랫동안 원했던 스스로를 위한 선물

 

언제부터인가 그는 캐스팅 명단에서 이름을 발견하면 작품에 대해서도 좀 더 믿음이 가는 배우가 되었다. 현대극단의 30년을 회고한 책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에비타>에 그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언젠가 다시 한번 뮤지컬 무대에서 이 배우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화제작 <라카지>로 그 예감은 실현되었다.

 

 

13년 만에 뮤지컬 무대로 돌아오셨어요. 

돌아왔다는 말은 내가 무대에서 출발한 사람이 아니니까 좀 어폐가 있고요. 그냥 좋아해서 계속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하게 됐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 처음 작품 제의를 받으셨어요? 주인공 조지 역에도 어울렸을 것 같은데.

저기 있는 저 사람(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차 대표와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나는 모르다가, <말죽거리 잔혹사>를 하면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됐죠. 차 대표는 내가 뮤지컬을 한 적이 있다는 것도 몰랐대요. (웃음) 사실 악어 컴퍼니의 조 대표가 조지 역할을 이야기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부담이 됐어요.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어서 그 정도로 큰 역할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연습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으니까요. 내가 꾸준히 무대에 서왔던 게 아니라서 감을 찾는데도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비중이 작더라도 임팩트 있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역을 원했고 딩동을 하고 싶다고 내가 먼저 말을 했어요.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은 이 정도라고.


딩동 역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세요?

캐릭터 자체가 마음에 든다기보다, 뭐랄까. 딩동은 아주 견고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거든요. 그걸 표현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앨빈과 조지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지만 딩동은 우리나라 아버지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방식의 자식 사랑이니까 거기 기대서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했어요.

 

기존에 계속 같이 작업을 했던 현대극단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가요?

처음에는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배우가 됐는데 우리 때는 다 방송국 공채를 봤거든요. 그때는 그걸 입사라고 했어요. 83년에 나를 비롯한 MBC 17기 공채 배우들이 연수 기간에 다 같이 현대극단에서 2개월간 수업을 받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좀 더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계속하다가 85년도였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처음 뮤지컬을 했고, 그 다음 작품이 <에비타>, 마지막으로 99년에 다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빌라도 역을 했죠. 99년에 (윤)도현이가 예수 역을 할 때였어요. 뮤지컬은 그렇게 두 작품을 했고 또 뮤지컬 영화로 <삼거리 극장>이라는 작품도 했어요. 결과는 별로 안 좋았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분야여서 시도를 했는데 환경이 워낙 열악해서 힘이 들었어요. 

 

그래도 <삼거리 극장>은 좋아하는 분들이 종종 보이던데요.

마니아층은 있다고 보는데 난 솔직히 좀 미안해요. 아쉽기도 하고. 워낙 상황이 열악해서… 알다시피 뮤지컬을 형상화한다면 무대나 의상, 조명 등 제작비가 상당해서 어려움이 많은데 재정적인 한계가 있다 보니 완성도 있게 제대로 못한 게 미안해요. 시도는 했는데…

 

본인의 연기 외에도 작품 전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편인가봐요.

네. 한 작품에는 여러 캐스트들이 있잖아요. 그 캐스트들이 각자 자기 역할만 생각하는 것에 반대해요. 가령 한 작품에 배우 열 사람이 모였다면 그 사람들이 다 자기 역을 하기 위해서, 개인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모인 게 아니잖아요. 제일 중요한 건 그 열 사람이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무대와 영화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하는 게 특히 어려울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는 끊고, 또 끊어서 가다보니까 배우가 순간 몰입이나 집중력은 생기는데 한 호흡에 기승전결을 쭉 이어가는 힘이 약해져요. 한 번씩이라도 무대를 서고 싶어 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해요. 나는 영화를 할 때는 물론이고 TV 드라마를 할 때도 50부작이면 50부작 전체 작품을 보고 싶어 해요. 요즘 친구들이 그 훈련이 잘 안 돼서 연기를 할 때 길게 호흡을 가져가는 걸 잘 못해요. 순간순간은 멋있는데 전체 작품을 다 봤을 때 묵직하게 남는 걸 찾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젊었을 때는 나도 그랬던 것 같아요. 한 20년 하고 나니까 보이더라고요. 아,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이끌어야 하고 이럴 때는 내가 참는 게 맞고 이쯤에서는 좀 나서야 하고 이런 게 보여요. 그리고 그게 한눈에 보여야 비로소 배우인 거 같아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동성애자 역을 하셨어요. 소재 면에서는 <라카지>와 겹치는 면이 있네요.<라카지>에서 저는 동성애자는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쪽에 있는 인물이죠. 하지만 전체 작품으로 놓고 보면 또 일맥상통하는 게 있어요. 타인을 포용하자는 거니까.


특정한 소재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으세요?

어휴, 그런 거 없어요.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인간들이 있는데요. 그걸 표현하는 게 배우죠. 다만 딱 하나,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있는데 억지스럽고 억척스러운 역이에요. 대놓고 하는 깡패 영화들이 있죠.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인데, 그러려면 휴머니즘이 기본이 되는 게 옳다고 봐요. 물론 악역도 필요하지만 악역도 인간으로 그려야 페이소스를 느끼게 할 수 있죠. 작품의 소재가 어떤가는 상관이 없어요. 그걸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니까요. 난 배역에 대해서는 잡식성이 되고 싶어요. 배우가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될 필요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수많은 개성들이 있는데 그 캐릭터를 다 한 번씩만 해보려고 해도 얼마나 많겠어요. 사실 연기는 그 재미로 하는 거죠.


13년 만의 뮤지컬인데 연습을 해본 소감은 어떠세요?

이지나 연출은 번역된 대본을 갖고 그대로 가지 않더라고요. 우리 무대에 맞게 갈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가는데 나로서는 굉장히 고맙더라고요. 내가 아무리 연기를 오래했다고 해도 뮤지컬은 99년 이후 13년 만에 공연을 하는데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어요. 내가 무대에 설 때만 해도 제대로 된 보이스 트레이닝 같은 것도 없었어요. 그냥 배우 중에 노래 좀 한다 하면 너 뮤지컬 해볼래? 이런 분위기였지. 이제 학교에서부터 제대로 공부한 친구들과 같이 공연을 해야 하는데 내가 말만 선배고 뭐하나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으면 얼마나 실망스럽겠어요. 무대에 서는 게 긴장되는 것보다 같이하는 사람들과의 호흡에서 내가 얼마나 맞춰줄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이 많아요. 참 많이 변했어요. 충무아트홀처럼 좋은 연습실도 없었고, 대본을 가지고 디테일하게 분석을 해서 들어가고, 소품, 의상도 제대로 갖춰져 있고 이런 상황이 아니었어요. 배우가 소품도 했다가 분장도 직접 했다가 의상도 챙기고 그랬으니까요.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연극계 출신도 아니면서 30년을 배우로 활동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어요.

내가 나를 되돌아봐도 나는 좀 특별한 놈 같아요. 그냥 혼자 여태껏 30년간 매니저도 없이 이 일을 해오고 있는데… 지난번 드라마를 하면서 배종옥 씨랑 무슨 이야기 끝에 참 배우는 팔자에 있는 것 같다 그 말을 했는데 진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나 혼자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찾아 주는 사람이 있고 작품을 할 수 있는 이것도 다 팔자가 그러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 솔직히 답은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팔자라고밖에 말을 못하겠어요.

 

나 지금 잘하고 있구나라는 자기 확신을 할 때가 있으세요?

배우는 끝까지 그러지 못할걸요. 끝까지 그렇게 느끼지 못할 거예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 도공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완성된 도자기를 백번 넘게 깨는 것처럼, 그런 개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은, 글쎄 그렇게 마음 가지는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런 확신이 없이 계속 이 일을 하는 건 너무 어렵지 않나요?

그러니까 팔자죠. 30년을 하고 돌아봐도 그것밖에는 답이 없어요.(웃음) 나이 어릴 때는 팔자인지 아닌지 사실 몰라요. 앞으로가 어떨지 모르는 나이에는 그게 보이지 않아요.

 

처음 아버지 역을 맡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하세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역을 하게 됐는데, 큰 거부감은 없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젊은 역을 나이 들어서까지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래서 아버지 역은 피한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요. 작품만 좋으면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 사고방식을 젊었을 때도 갖고 있었나요? 생각은 그렇게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대로 다 되는 건 아니어서 나도 중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갈등도 있었고. 그런 고민도 없이 순탄하게 왔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게 나이 좀 먹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인 것 같아요. 아,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기분. 어려웠을 때 기억들은 다 잊어버리고.


지난 작품들을 다시 돌려보기도 하세요?

아유, 난 안 봐요. 가능하면 시사회도 잘 안 가요. 사실 배우는 한 캐릭터를 연기한 다음에는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그걸 자꾸 되뇌어봐야 득보다 실이 많다고 봐요. 애착이 가는 작품이야 물론 있지만 거기서 내가 했던 연기는 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그것도 배우 수업 중의 하나고 굉장히 중요한 훈련이에요. 내가 몇 년 전에 뭘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건 상당히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비우고 또 비우다보면 마지막에는 뭐가 남나요.

아무것도 없죠, 뭐. 없어요. 그런 직업이에요, 이 직업이. 뭔가를 가져갈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자꾸 떨쳐버려야 정신 건강에 좋아요.(웃음)


작품을 하면 의무처럼 해야 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할 만하세요?

‘제가 이런 작품을 하게 됐습니다’라는 걸 알려드리는 의미에서 하는 인터뷰는 괜찮아요. 그런데 TV 오락 프로그램마다 다 나와서 떠들어야 하는 그런 것들은… 홍보에 대한 개념들이 조금만 더 어른스러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소진이 빨리 돼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배우는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그러는 일들은 욕을 먹더라도 배우 스스로 적절한 선에서 끊어야 한다고 봐요. 저도 작품은 거절을 잘 못하지만 그런 일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거절을 해요. 내가 생각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 있는데 그걸 무너뜨리려고 하지 말라고 하죠. 배우가 그 정도 고집도 없이 어떻게 일을 하겠어요.


그런 거절을 하기에는 젊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젊은 배우들은 더 쉽지 않겠죠. 그리고 경험을 해봤으니까 이 정도까지 해주는 게 맞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거고… 나이가 들면 더 좋은 게 있어요.

 

그렇게 더 좋아진 것이 어떤 시점부터였는지 기억나세요?

어느 배우든 간에 젊었을 때는 멋있는 역을 하려는 욕심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접었다는 거, 내 캐릭터 하나를 보는 게 아니라 작품 전체를 볼 수 있게 된 그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삼거리 극장>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작은 규모의 작품이었어요. 나는 개런티에 대한 욕심은 없었어요. 미술 쪽에 돈이 많이 부족하면 내 출연료에서라도 갖다 쓰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에요. 그렇게 애착이 갔어요. 우리나라 문화계 전체를 생각했을 때 꼭 나와야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마음, 때로는 무모해 보일 수 있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도 있어요. 무식해서 용감하다는 말도 있지만 배우는 멋모르고 덤비는 그런 맛도 좀 알아야 해요.


어두운 역할을 하면서 지나치게 몰입을 한다거나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적은 없나요? 굳은살이 좀 많이 배기면, 그것도 괜찮아요. 너무 그런데 집착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연기라는 건, 객관적이어야 해요. 요즘 보면 자기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배우는 사실 그 자리에서 그냥 필요한 만큼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해주기만 하면 돼요. 배우가 화면에서 혼자 다 해버리면 보는 사람들은 정말 부담스러워요. 그러면 오래 볼 수가 없어요. 첫째는 배우 스스로 객관적이어야 하고, 둘째는 내가 지금 기승전결 중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그것만 알면 굳이 연기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어도 돼요. 특히 영화는 편집이 있고 음악도 있고 여러 가지 배우를 받쳐줄 효과들이 다 있어요. 관객이 음악으로 느끼는 것도 있고 비주얼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있는데 다 필요 없고 내가 혼자 다 하겠다고 나서면 보는 사람이 힘들죠.


영화나 드라마와 뮤지컬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같은 역에 두 사람 이상의 배우가 캐스팅되는 일이 많다는 건데 어떠세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때 빌라도를 유인촌 선배와 더블로 했는데 선배는 빌라도를 아주 장군 같은 사람으로 연기했고 나는 아주 선병질적인 인물로 표현을 했어요. 이런 부분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더블 캐스팅의 재미죠. 딩동은 아직 어떻게 가겠다고 확실히 잡은 건 아니지만 또 이런 재미가 있겠지요.

 

해보고 싶은 뮤지컬이 또 있으세요? 솔직히 뮤지컬 전문 배우가 아니니까 어떤 작품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만 두 편을 했으니까 그 스타일의 리듬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요. 더 좋은 작품이 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뮤지컬을 하는 이유는, 내가 무대에서 신이 나기 때문이에요. 다른 건 없어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밝고 코믹한 작품이어서 신이 난다는 게 아니에요. 내 직업은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건데, 사실  내 자신이 그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무대 위에서가 제일 많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5호 2012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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