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태어난 권리를 말하는 것이 불온한 죄였던 시절, 김민기는 엄혹한 시대를 버텨내야 했던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이끄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대가 바뀌었다. 세상도 바뀌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보다도 삶과 노래에 모순이 없기가 더 어려울 일일 텐데, 그는 여전히 자기 노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청년 문화의 상징이었던 싱어송라이터는 언제부터인가 직접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1991년 대학로에서 둥지를 튼 작은 극단 학전은 그의 노래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외면하고 싶은 서울의 민낯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고, 믿을 수 있는 배우들을 키워냈다. 노래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경계를 낮추고, ‘문화 상품’ 이전의 ‘문화’에 전념했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에게 한자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닌 희귀한 어린이 뮤지컬을 만드는 데 온 마음을 쏟고 있는 그를 만났다. 학전의 지난 20년, 그리고 여전히 현실을 포기하지 않은 오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렸을 때 집에 <겨레의 노래> 카세트테이프가 있어서 계속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96년에 처음 <지하철 1호선>을 봤고요. 저야 학전의 식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런 인연만으로도 이번 20주년 기념 공연을 지켜보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시간을 이겨내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 <겨레의 노래> 팀이 함께 학전을 만든 거예요. 시간을 이긴다는 건 너무 건방진 발상이고(웃음) 얹혀가는 거죠. 공연은 뭐, 엉망이었지. 집안 잔치다 보니까… 처음에 공연을 준비하면서 ‘인터미션 포함해서 두 시간 반 넘어가면 우리 다 죽자’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결국 3시간 반이 나와버려서 죄송하고…. 왜 죄송하냐면, 집안 잔치가 되면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것밖에 안 되는데, 여길 거쳐 간 사람들도 많고 작품도 많다보니까 자꾸 길어지더라고요. 감개무량하고 그런 건 모르겠고, 집안 잔치에 돈 받고 관객을 받은 것 같아서 관객들에게 미안하고, 그동안 쭉 거쳐 갔던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고맙고 그런 것밖에 없어요.
20년간 학전을 거쳐 간 배우들의 합동 공연이다 보니 원래 같은 공연 팀이 아니었던 여러 세대의 배우들이 함께 호흡을 맞췄는데,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15일에 공연도 늦게 끝이 났지만 공연 후에도 끝까지 연습실에 빡빡하게 몰려 앉아가지고 술을 먹데요. 난 네 시쯤 갔나? “많이들 처먹어” 그러고 그냥 나온 거밖에 없죠.(웃음) 완전히 흥부네 집 같더구먼. 흥부네 집에 애들이 많잖아요. 집은 좁고 애들은 많아서 발이 문밖으로 나가는데 먹을 것도 없는, 딱 그런 흥부네 집이더라고요.
보기 좋으셨겠네요.
아니 뭐 흥부네 집 보는 게 뭐가 좋아요. 돈도 좀 있고 그래야 좋지.(웃음)
학전에 대해서 배우들이 ‘고향에 온 것 같다’는 표현을 많이 하더군요. 저는 그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이, 한국인들에게 고향이란 그립기는 하지만 벗어나 있고 싶기도 한 애증의 대상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게 그래요. 10대, 20대에는 엄마한테서 벗어 나야 해요. 무조건 떠나야 해. 그렇게 떠나서 객지 생활을 하다보면 서로 기용해서 써먹는 바깥세상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또 10년, 20년이 지나고 보면 더 이상 10, 20대는 아니게 되잖아요. 난 어디서 왔는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의문을 가지면서 다시 학전을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옛날이면 극단이라는 개념 안에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요즘은 극단이 어디 있어요. 다 기획사지. 기획사에는 소속 개념이 없어요. 돈으로 엮여 있다가 풀리는 거죠. 학전에서 뭐 걔들한테 잘해주고 그래서가 아니라, 그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물론 학전 초기에는 다른 데와 비교해서 최고로 대우를 해주긴 했어요. 출연료를 사기당하고 하는 일들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 기억에 대한 감사도 있긴 하겠지. 그리고 이번 공연은 돈을 주고 출연을 시키는 개념이 아니에요. 애당초 서로 그런 계산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그냥 와서 하고 가, 그러는 것도 내 자존심에 안 되는 일이니까 차비는 주마, 회당 3만 원. 그런데 뭐 (조)승우가 여기서 3만 원 받으려고 공연을 하는 거겠어요.
15일 공연이 끝난 후의 뒤풀이는 학전 마당에서 벌어진 동네잔치처럼 보였습니다. 날도 춥고 발 딛을 곳도 없는데 사람들로 가득 차서 시끌벅적한 광경을 보면서 이곳에 뭐가 있어서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순수하게 기뻐할까, 이 중심에 있는 게 뭘까 싶었습니다.
돈이 있었으면 그렇게 안 모였을 거예요. 가난해서 그래요.
20년 전 처음 학전의 문을 열 때, 이런 날을 생각해보셨어요?
지금도 아무 생각 없고 옛날에도 아무런 생각 없이 시작했어요. 목표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있는 것 주섬주섬 엮어서 시작을 한 거죠. 옛날에 노래를 만들 때도 그랬는데…. 그래서 내가 스스로를 영원한 아마추어라고 생각을 하나 봐요. 어떤 목표가 있어서 그에 맞게 상품을 제조한다면, 그건 프로에요. 그런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예전에 곡을 만들 때도 내 주변의 것들을 일기로 쓰거나, 스케치나 크로키를 하는 것처럼 했기 때문에, 이런 것으로 노래를 만들어서 어떤 가수를 써서 가요로 대박을 내겠다는 식의 목표가 없었어요. 그 후 학전에서 한 작업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여전히 아마추어죠. 어쩌다가 보니까 20년이 된 거에요.
20년은 사람으로 따지자면 성인이 되는 해잖아요.
그러니까 창피하죠. 어쩌다가 20년이 됐고 말하자면 성년식인데, 해놓은 꼴이 말이 아니어서, 창피하고 속상하고 그런 거죠.(웃음) 그런 게 있어요. 난 원래 미대 출신인데, 요즘 미술이야 그렇지 않지만 예전 뽕짝 시절의 미술 전시회라고 하면, 그 마지막 과정이 캔버스를 액자에 끼우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 창피한 걸 돈 들여서 액자에 끼워서 포장을 한다는 게. 그게 늘 불편했는데 아직도 그래요.
그만큼 쑥스러움이 많고 드러내는 걸 꺼려하는 분이 그림을 그린다거나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타인에게 자신을 열어 보여야 하는 작업을 어떻게 하셨나요?
그게 제일 힘들죠. 난 내 식으로 그냥 서툴게 사는 건데, 그 과정에서 극장이나 액자를 통해서 타인과 만난다는 것이, 그런데 어떤 시점에 가면 피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힘들어요. 그런데 피할 수가 없으면 해야죠. 작업을 하다보면 그런 게 있어요. 난 천생 작업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어느 날 돌아보면 ‘아아, 또 저질렀네. 이걸 어떡하지’ 하게 되고, 그럴 때는 별다른 수 없이 드러내야죠. 2007년이었나, 독일에서 괴테 메달이라는 걸 받았는데 그해 수상자가 세 명이었어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나, 그리고 헝가리의 시인인 탄도리라는 노인 양반이었어요. 그 시인이 시상식에 불참하면서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자기는 새들에게 먹이를 줘야하기 때문에 집에서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중에 나한테 직접 그린 그림에 글을 써서 보내왔어요. 그 그림이 뭐였냐면 산꼭대기로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야. ‘산다는 게 참 이렇게 쓸데없이 고달프다’라고. 내가 하는 짓도 그래요. 시시포스 같은 짓이지. 올려놓으면 또 굴러 내려가고, 또 굴러 내려가고.(웃음)
<지하철 1호선>과 <의형제>는 각각 독일과 영국 작품을 원작으로 두고 있습니다. 독일과 영국의 음악극이 그 이전까지 선생님의 작업에서 기반이 되었던 것들과 맞물리는 지점이 어디였을까 궁금합니다.
내가 20대 때, 그리고 <공장의 불빛>, <개똥이>를 만들었던 30대 초반의 그 시절까지는 그야말로 창작자, 싱어송라이터의 입장에서 내 것만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어요. 그런데 세상이 지랄 맞아서 공백기를 그만큼 보내고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내 것만 하겠다는 일종의 국수주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그게 어렸을 때 고집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어렸을 때는 그런 고집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아이덴티티를 찾는 건 어렸을 때의 방식이구나 싶었어요. 난 천생 뭘 만들어야 하는 놈인데, 농사짓고 뭐 그런 시간을 보내고 오니까, 그 만든다는 것의 영역, 차원에 대해서 좀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 그 다음부터 생각을 바꿔 먹은 게 배울 건 배워야겠다, 그런데 그 배우는 과정이 한국화가 되어야겠구나, 그리고 남에 대해서 존중을 해줘야겠다. 싸우려고 들지만 말고.
<지하철1호선>이나 <의형제>를 보고서도 해외 원작이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는 관객들도 있습니다.
로열티를 주고 직수입하는 게 아니니까요. 나한테는 번안이 그렇게 남에게서 배워가는 과정이었던 거예요. 그 전제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잘 살고 못 살고 가까이 살고 멀리 살고의 문제 이전에 사람이라는 보편성이 그 밑에 존재한다는 믿음이었어요. 베를린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도시인과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회사원은 전혀 다른 역사와 사회적 배경을 두고 살아가지만, 그들 사이에 있는 인류 보편성에 대해 믿고,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을 내가 좀 배워야겠다는 거예요. 2007년에 독일에 갔을 때 괴테가 바람피운 동네까지 데리고 다니길래, 독일인들이 왜 이렇게까지 괴테를 자신들의 정신적 국부로 떠받드나 궁금했어요. 그런데 괴테는 그리스 로마를 비롯한 온갖 문명을 따라 다니면서 끌어온 것들을 가지고 독일 문화라는 걸 세웠어요. 수많은 다른 문명을 찾아다니면서 배우고 깨우친 것들로 고트족의 콤플렉스를 넘어선 문화를 세운 그게 괴테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는 삼투압이 되는 거예요. 단일민족이라는 건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밖에 안 돼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남들과 섞이면서 우리 식의 것을 만들어 나가느냐에 오늘의 문화가 달려 있어요.
학전의 대표작들은 뮤지컬로는 드물게 리얼리즘이 깊이 반영된 작품들이었습니다. 가령 <의형제>에서 어린 현민과 무남이 노는 장면을 보면 옛날 아이들의 놀이를 어쩜 저렇게 생생하게 복원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정말 저랬는데!’라는 반응이 많았거든요.
그건 관객이 속는 거죠. 가령, 그림으로 치면 풍경화를 실사로 그린다고 했을 때, 사진기로 찍어서 비교를 해보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똑같이 그리겠다고 해도 그건 또 다른 허구에요. 인물화를 그리면 화가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을 그려 넣어요. 그렇게 작가가 반영이 될 수밖에 없는데 관객은 어쩌면 저렇게 내가 아는 것과 똑같이 재현을 했을까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 그 당시에 그런 모습이었던 건 아니에요. 정말 그랬던 것처럼 관객이 착각을 하는 거죠. 아무리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그건 작가와 연출가, 배우로 인해 새롭게 재탄생한 과거에요. 일례로 그 애들이 놀면서 외치는 ‘앗싸라비아’는 실제 그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에는 없었던 말이에요.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진짜 그랬던 것처럼 깜빡 속는 거죠.
갓 스물이던 어린 조승우에게 <의형제>의 해설자인 걸인 역할을 맡겼던 것도 그렇고, 젊은 배우들을 의외의 역할에 배치한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하철 1호선>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캐릭터가 곰보 할매인데, 11차 공연 중에 가장 나이 어린 여배우가 곰보할매 역을 한 적이 네 번이었어요. 아무리 어려도 그 캐릭터에 맞을 때가 있어요. 그것이 무대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현실에서는 그렇게는 안 되죠. 먼저 한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실제로 그런 모습이어서 그대로 무대에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럴 법한 모습으로 무대에서 표현을 하는 게 연기에요.
학전 출신이라는 것이 배우의 역량과 태도에 대한 인증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엄격한 선생님이라는 소문은 들었는데요.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는 이야기를 내가 많이 하긴 해요. 그런데 사실 그게 말이 안되죠. 내가 연기자 출신도 아니고… 배우들은 다 예민한 사람들이에요. 자기도취가 없이는 무대에서 그 일을 안 해요. 자기도취에 싸여있는 게 기본 상태인데, 그 껍질을 벗겨줘야 해요. 그런데 그걸 야단치고 윽박질러서 떼어내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난 어차피 연기자 출신도 아니고 다만 내가 이런 걸 썼고, 그걸 너희들이 연기해주는 건 고맙고 미안한데, 관객들한테 너희가 지금 어떻게 보이고 있다라는 걸 리플렉션만 해주는 거예요. 그럼 그 애들이 서서히 자기 식으로 껍질을 벗기 시작해요. 그때까지 굉장히 오래 기다려줘야 하는 거죠.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게 자기 스스로 천천히 자라난 것이 학전 출신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서 단단해질 수 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어요. <지하철 1호선>을 15년을 했으면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이 작품을 했겠어요. 또 자기들끼리 얼마나 많은 조합이 생겼겠어요. 그걸 어떻게 똑같이 보이도록 맞춰버릴 수가 있겠어요. 그런 건 지금 한국 교육의 방식이죠. 그게 아니라 너는 너대로 장점을 살리고 또 너는 너 나름으로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알려주고, 기다려주는 거예요. 참 미련하고 못 할 짓이지만 그렇게 해왔어요.
지난 20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일본의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는 공연을 만든다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인지, 무의미한 일인지 모를 혼란이 생기지 않습니까?
어제였나, 오에 겐자부로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지적이 있었어요. 원전이라는 것은 원폭이 될 수도 있는 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건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사용하는 선을 넘어서서 성장에 이용을 한 결과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는 돈이 있었다는 것. 돈의 논리가 이 사태를 야기했다는 아주 중요한 지적이죠. 사람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 문제를 체감할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날 거라고 봅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면서 사고를 칠 거냐, 아니면 전면적으로 재검토를 하느냐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이번 20주년 기념 공연에 세시봉 팀도 참여를 하는데요. 대중이 그 시절의 음악에서 다시 찾으려고 하는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난 세시봉은 신입생 환영회 때 딱 한 번 가봤고, 60년대 말에 내가 거기 낄 군번이 아니었어요. 묶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난 사실 거기 멤버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여튼 사람들이 그 꼰대들을 이렇게 찾는 게 그냥 갑자기 있는 일이 아닐 거라고 봐요. 지금 일본의 사고가 난 곳에서는 각 개체들이 생명을 보전해야하는 필사적인 상황이고, 이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한다는 각성이 있을 텐데, 그 전조가 아날로그, 세시봉을 찾는 사람들한테서도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메커니즘이라고 치고, 콘텐츠는 무엇인가, 뭐가 제일 가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생각할 때는 아이를 가진,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라고 봐요. 그건 누구도 건드리면 안 돼요.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 말고는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지점이 없을 거 같아요. 내가 어린이극을 해야겠다는 것도 그런 이야기에요. 이걸로 장사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처럼 말도 안 되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 아래 내던져진 아이들이 없는데 그걸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성인극보다 어린이극을 잘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정확히 그렇죠. 예술은 경험론으로 접근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도 젊었으니까, 나도 어렸으니까 그 애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보여줄 수 있다고 하는 건 틀린 이야기에요. 학전이 대변신을 한번 해야 하는 게, 어린이극을 하면서 여기로 와서 보라고만 할 수가 없게 됐어요. 우리가 찾아가는 유랑극단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극장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오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가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하려니까 자금이 필요했고, 이번 공연의 수익금으로 그걸 해보려고 해요. 사실 아이들이 학원이다 뭐다 해서 공연을 보러 올 틈이 없는 것도 어려운 부분이지만 아이들이 워낙 빨리 자라기 때문에 어린이 관객들은 사실 장기 관객이 될 수가 없다는 점에서도 어려움이 있어요.(웃음)
일본의 어린이 뮤지컬이라고 하면 극단 시키의 작품들이 생각납니다. 일본에서는 연매출이 2천5백억 원이 넘는 거대 기업이 어린이 뮤지컬을 주도하고, 한국에서는 그 역할을 학전이 한다는 것이 묘하게 대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극단 시키의 어린이극, 독일 그립스 극단의 청소년 어린이극과 차별화되는 학전의 어린이극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어요. 어쨌든 부모와 아이가 다 같이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아이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는 지금의 시스템은 정말 아니에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교육 시스템 속에 아이들을 내버려 둬서는 안 돼요.
창작자이자 경영자로 겸업을 하는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좀 수월해지셨나요?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능력이 많을 수가 없어요.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못해요. 어차피 나는 ‘쟁이’ 위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개 기획실과 부딪히는 부분이 있죠. 대표면 경영자여야 하거든요. 경영자는 작가, 연출가, 배우, 음악인들을 기용해서 그 조합으로 상품을 만들어서 관객들에게 내놓고 그걸로 돈을 벌어서 수익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는 게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정상적인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기용되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할 놈이 대표가 되니까 이게 어긋나는 거예요. 그래서 늘 부딪히지. 부딪히는데, 어쩔 수가 없어요. 여긴 흥부네 집이니까.(웃음)
20년 전, 정해진 목표 없이 학전을 시작하셨다고 했지만, 지금은 좋은 ‘어린이극’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학전의 목표인가요?
당분간은 목표여야 할 것 같아요. 근현대 작가 중에 장욱진이라는 화가가 있어요. 장욱진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야기를 하시길, ‘그림이 크면 싱거워’라고. 그러니까 이게 자본주의하고 전혀 안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큰 극장에서 폼 나게, 뭐 그렇게 해야 하는데 안 그러니까요. 그런데 일본처럼 저런 엄청난 사고가 터졌을 때 누군가가 혼자 고립돼 있다고 하면 다른 누가 어떻게 도울 수 있겠냐를 생각해봐요. 그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장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좁고 외롭지만 바로 옆으로 가서 직접 말을 걸고 같이 나와야 하죠. 그게 아날로그에요. 우리 교육의 문제도 그래요. 아이들 바로 곁으로 가서 터치를 해주는 수밖에 없어요. 지네 시스템과 안 맞게 그런 짓을 자꾸 하니까 옛날부터 나를 위험한 놈으로 모는데, 난 그 영역들을 꼭 지켜야 한다고, 미련하게 생각해요. 학전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거 아닌가?
<지하철 1호선>을 21세기 판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에 대해 관심들이 많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하겠지. 그런데 꼭 언제라고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가오는 4월 30일이 그립스 <지하철 1호선>의 25주년이래요. 그날 세리머니에 (나)윤선이가 와서 첫 곡을 부르게 될 거 같고, 그 전날 <지하철 1호선>을 공연하는데 그 하루 전에 <지하철 2호선>을 한대요. 우리 공연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지하철 2호선>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번에 가서 그 공연을 보고 나서 또 생각을 해봐야겠죠.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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