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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기다리는 사람 <몬테크리스토>의 에드몬드 단테스 [No.81]

글 |박민정 일러스트레이션 | 권재준 2010-08-05 5,674


기다리는 사람 <몬테크리스토>의 에드몬드 단테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있던 곳에 그저 머물러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원 벤치에 누워 책을 읽고 읽던 에드몬드는 갑자기 책 속의 구절을 읽다가 중얼거렸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머물러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언제나 혼자 모험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지혜와 부까지 쌓을 수 있게 된 그는 이 문장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행은 홀로 낯선 곳에 머물면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새롭게 인생을 배우는 것 아닌가. 그는 혼자 훌쩍 떠나간 곳에서 불안하고 경직된 시선으로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고, 허름한 음식점에 들어가 급하게 접시를 비웠으며,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목이 잠겼고, 기대만큼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 떠오르긴 했지만 애써 부인했다.
어쨌든 지금 그의 곁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원을 손질하고 있는 메르세데스가 있다. 십여 년 전보다 조금 연약해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당당하다. 하지만 에드몬드는   감옥에서 긴 세월 동안 자신이 기다린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장미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혹시 날카로운 가시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다가 처음 느낀 감동을 잊어버릴 때와 같다. 그가 소중하게 느꼈던 것들은 너무 많은 생각 속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메르세데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에드몬드에게 다가왔다. 사실, 웃고 있는 그녀 마음속에는 커져가는 불안과 의심과 의혹이 있었다. 그녀는 갈수록 에드몬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어렵다고 느꼈고 억지로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곤 했다. 그럴 때 메르세데스는 “당신 원래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당신 곁에 있어도, 왜 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요?”라고 돌려 말하며 웃었다. 그런데 끝까지 침착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에드몬드를 화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속으로 ‘늘 기다리고 있다고? 내 부재를 못 견디고 몬데고에게 가버린 인내심이라곤 없는 여자면서!’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히려 에드몬드였다. 무엇을 위한 기다림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그는 메르세데스가 몬데고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감옥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그냥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몰랐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착각이 힘이 되었지만 그래도 종종 그는 메르세데스가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라 믿었던 것에 수치심을 느껴서인지, 예전 같이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물론 이제 청춘을 넘긴 그들은 상대방을 배려하며 너그럽게 대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면 참 아름답게 어울리는 둘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사실, 에드몬드는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기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몬데고는 이제 세상에 없으니 그가 싸워야할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에드몬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복수였는지 사랑을 되찾는 것이었는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자신을 불행하게 한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건 정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복수를 하면 할수록 한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결핍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메르세데스는 말한다.
“사람들을 용서해요. 그래야 당신 마음도 편안해지겠지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사랑하는 여자와 이별하는 것쯤이야 다른 젊은 남자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에드몬드는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남자들보다는 수십 배는 더 힘들어할 만큼 마음이 약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가 만약, 메르세데스도 그저 그런 여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실망감도 덜했을까. 언제나 희망이나 기대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 속엔 아무 것도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이….
에드몬드가 한참을 딴생각에 빠져있을 때, 메르세데스가 그에게 물었다.
“그때, 우리가 처음 다시 만났던 파티에서 왜 날 모른 척 했어요?”
“이제 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니까.”
그 모든 것이 절실했던 시절은 지나갔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무슨 희망으로 살아요? 날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다시 찾아온 거죠? 복수가 끝나서 시들해진 거예요?”
감옥에서 혼자 오래 지낸 습관 탓일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고행하는 것에 익숙했으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하지 못했다. 매사에 그 무엇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면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
“마셔요.”
메르세데스가 따뜻한 포도주를 한잔 건넸을 때, 그 속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의심하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다.
“도저히, 이제 더는 안 되겠어!”
“응? 무슨 말이에요?”
간밤에 폭풍이 지나간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빗물을 닦지도 않고 벤치에 앉은 메르세데스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에드몬드는 그런 그녀를 외면하고 뒤돌아선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지만 울지는 않고 두 번, 에드몬드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쯤 더 불렀다면 에드몬드는 그녀를 돌아볼 생각이었으나 메르세데스는 두 번에 그치고 만다. 
다시 혼자가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 추측하고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더 좋을지 계산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몬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들의 사랑을 이토록 보잘 것 없게 만든 것은 자신의 소유욕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는 사냥감을 빼앗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복수에 혈안이 되었던 자신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지나왔던 것처럼, 또 이렇게 지나가게 될 것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1호 2010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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