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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무대디자이너 정승호의 작업 공간, 학교

글| 정세원 | 사진| 이맹호 2009-10-13 8,315

창을 통해 공간과 사람을 배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들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영감에 자기만의 숨을 불어넣는 사람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들의 위대한 작업들은 과연 어떤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을까. 무대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무대디자이너 정승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학과 학과장실에서 창작 작업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금속성의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가 돋보였던 <스위니 토드>, 빛바랜 옛 사진을 보는 듯 아련했던 <내 마음의 풍금>, 다양한 패턴을 활용해 모던함을 더한 <마이 스케어리 걸> 등의 무대가 그곳에서 탄생했다.

 

 

“멋진 작업 공간을 기대하셨을 텐데 실망시켜서 어쩌죠? 비 오는 날 멀리 안산까지 오셨는데….” 정승호 무대디자이너는 서울예대 나동에 마련된 학과장실로 이동하는 내내 미안함을 표했다. 연극과 학과장으로 취임하면서 외부에 있던 작업실을 정리하고 열 평 남짓한 사무실 한켠에 작업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단다. 집에도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거의 매일 출근해야 하는 탓에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모형을 만들려면 교내 다른 건물에 마련되어 있는 무대 제작소로 이동하는 번거로움이 없지 않지만,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구체화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에 있어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한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걸어 다니면서 다양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잖아요. 공간이라는 것은 어떤 생각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필요한 것이고. 요즘은 대부분의 작업을 컴퓨터로 하는데다, 인터넷이 발달해 리서치 작업도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편해졌어요. 또 도서관 자료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좋고. 이곳에서 보낸 지 2년 정도 됐는데, 나라는 사람이 공간에 적응을 참 잘하는 것 같아요. 넓으면 넓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금방 익숙해지더라고요.”(웃음)

 

전체 사무실 규모의 3분의 1 정도인 그의 공간에는 커다란 책상과 그 위에 단출하게 놓인 노트북, 대학 시절부터 즐겨 찾는 자료서적들로 가득한 책장, 직접 제작한 도구함 정도가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제자들이 선물한 작은 소품들과 작업했던 디자인 모형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직접 제작한 초록색 책상이다. 디자인 모형을 올려놓고도 충분히 여유 있는 크기에, ‘소리’, ‘窓’, ‘Dream’, ‘Human’, ‘Design’, ‘디자이너’ 등의 단어들이 표면에 새겨져 있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 단어들일까. “디자인할 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소리’예요. 음악도 소리의 한 부분이잖아요. 뮤지컬 무대를 디자인하면서 좋은 점이 음악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이에요. 장면이 넘어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넘어가느냐가 더 중요한 거거든요. 음악이 갖고 있는 템포와 리듬 등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줘서 디자인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스위니 토드>의 ‘끼이익’ 거리는 기계소리로 작품을 기억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는데 이러한 예가 그의 얘기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듯하다.

 

정승호 무대디자이너에게 창(窓)은 무대 위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무대 위의 창은 또 다른 배우’라며 무대 위에서 물체는 배우와 어떻게 함께 하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고 했다. “창뿐만 아니라 의자나 문도 제가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이에요. 무대를 디자인할 때 박스를 즐겨 사용하는데 때로는 그것이 창을 의미하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학생들과의 공간과 구분 짓는, 정승호 무대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책상 파티션도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창과 박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특한 패턴들이 가득했던 <마이 스케어리 걸>의 무대는 무려 200여 개가 넘는 박스들로 만들어졌다. 창과 박스에 대한 무한 애정은 그의 학생들에게도 전파되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 들어와 강의를 시작한 후로 ‘코넬 박스’ 수업을 한해도 빼놓지 않고 있어요. 미국의 초현실주의 작가 조셉 코넬의 작품명이기도 한 ‘코넬 박스’는 주제에 맞는 스토리와 오브제들을 박스 안에 배치하고 그것을 프리젠테이션 하는 수업이에요. 텍스트가 있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 시각적으로 표현을 하는 게 무대디자인이잖아요? 수업을 하다보면 학생들의 가족사, 아픔, 즐거움을 다 알게 되는데, 단순히 공간만을 가르치기보다 공간 안의 스토리, 거기서 오는 감동을 어떻게 전달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하는 점이 재밌는 것 같아요.”

 

창과 박스로 이어지는 그의 얘기는 자연스레 ‘사람’으로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정승호 무대디자이너의 창작 공간인 학과장실은 서울예대 연극과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정승호 무대디자이너는 멋있는 공간보다 그 공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일을 통해 공간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공간이지만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그의 작업 공간이다.

 

현장에서 작업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CF 감독을 꿈꾸며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연기자로, 무대디자이너로 인생의 목표 설정을 바꿔가는 동안 정규 미술 교육 한 번 받은 적 없던 그가, 미국 유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은사인 무대디자이너 마이클 밀러의 힘이 컸다. 스승의 칭찬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그의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꿔 놓았고, ‘자료의 보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인턴 과정 중에 섭렵한 수많은 자료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공부가 되고 있다. <쓰릴 미>를 시작으로 뮤지컬과 인연을 맺은 그는  <스위니 토드>와 <내 마음의 풍금>으로 더 뮤지컬 어워즈와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무대미술상을 수상하며 무대디자이너로서 입지를 굳혔다.

 

 “좋은 팀을 만나야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것 같아요. 무대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공간이 부각이 되려면 음악, 조명, 안무 등 그 장면을 꾸미는 모든 요소들이 고르게 어울려야 하거든요. 호흡이 잘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할 때 더 좋은 그림이 나오더라고요.” 현재 진행 중인 작품들 중 뮤지컬 <남한산성>가 <어쌔신>은 이미 합을 맞춰본 스태프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 중이다. 두 작품 모두 진중하고 무게 있는 어두운 뮤지컬이라 기대하는 바가 더욱 크다고.

언젠가 자신이 무대미술을 공부한 미국에서 디자이너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정승호 무대디자이너. 그는 자신이 꿈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자신의 작업 공간에서는 더 좋은 무대와 가능성 있는 무대디자이너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랐다. 언젠가 학교 밖에 자신만의 멋진 작업실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에 정승호 무대디자이너는 들뜬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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