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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3] <스페셜 레터>의 김상호

글 |박민정 2009-11-09 6,328

우리의 상처를 감싸는 것은
위악일까 눈물일까

 

누군가는 웃는데, 누군가는 운다. 저곳은 해가 찬란한데, 이곳은 먹구름이 잔뜩 껴있다. 멀리서 보면 저마다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풍경일 뿐인데 내가 슬픔의 당사자가 될 때 의미는 달라진다. 내 슬픔이 가장 크고 내 눈 앞의 문제가 가장 절실하다. 나에게서 빠져나와 전체를 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김상호도 그랬다. 좋아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을 때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필 납니까? 그녀는 좋아하는 남자랑 잘 돼서 웃는데 난 우울해 하고 있다니요.”
“그때, 우울해 했던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훌훌 털고 일어나서 전혀 상처받지 않은 줄 알았어요.”
“일부러 그랬던 거죠. 그녀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만들면 내가 덜 초라해질 것 같았으니까.”
한때 그는 ‘쿨한’ 남자로 불렸다. 상처 받아도 돌아서면 훌훌 털었고 사람들의 행동도 보이는 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상냥한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무뚝뚝한 사람은 그 반대로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복잡하게 꼬여있지 않았지만 달리 말하면 지나치게 단순했다.
“수수께끼는 싫어요.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죠. 액면 그대로를 믿었어요. 이면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건 치사하고 구차합니다.”
그럼에도,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전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말하지 않을수록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들…. 보고 듣고 말할 수 없을 때, 감각의 촉수가 더욱 예민해지기도 한다.
“텔레파시 게임 알아요? 두 사람이 동시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름이나 숫자 등… 얼마간 함께 집중하는데, 이때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고 쪽지에 적은 후에 결과를 비교해보는 거예요. 둘이 똑같은 걸 생각하면 둘은 텔레파시가 통하는 사이인 거죠.”
“하하핫, 바보 같은 게임이군요. 설사 같은 숫자나 단어를 말한다 해도 그건 순전히 확률 문제죠! 말을 안 해도 진실은 통한다는 믿음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김상호는 복잡한 것은 질색이라며 웃었다. 그는 단순하고 명쾌했고 거리낌 없이 무례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그의 확신에 찬 말투에 마음이 상한 나는 그가 아직 모르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군대 후임 철재의 친구 은희는 여자가 아니라고, 당신이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은 ‘은희’가 아니라 ‘순규’라고.
“그녀가 면회 올 때 함께 온 남자 신경 쓰이지 않았어요? 당신 눈치가 좀 없나보네요. 그녀 이름은 순규고 함께 왔던 남자가 바로 은희, 즉 순규가 좋아하는 남자죠. 그녀는 당신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의 질투를 유발한 거예요.”
“저도 다 알아요. 철재가 나중에 이실직고했어요. 근데 뭐 그녀 이름이 순규면 어떻고 은희면 어떻습니까? 나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분명한 사실은 그 두 가지 뿐이에요.”
화를 내는 대신 단순명료하게 사실을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내뱉는 자조 섞인 말들이 그의 감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삐딱한 시선, 심각하지 않은 듯 투덜거리는 행동이 불안한 내면을 그대로 드러냈다. 제대 후, 보다 정확히는 은희가 순규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그는 결국 버럭 소리를 쳤다.
“뭘 그렇게 보세요? 제 말 속에 다른 뉘앙스가 숨어 있지는 않나 짐작합니까? 당신은 마치 심리치료사나 된 것처럼 나를 살피는군요. 나라는 인간의 속사정을 파악할 만한 단서는 없나, 궁리하나본데 섣부른 과잉 해석은 그만두시죠.”
“아니, 당신이 좀 변한 것 같아서요. 이렇게 대놓고 말로 물어야 당신이 솔직하게 답해 주리란 걸 잘 알고 있는데 제가 왜 섣불리 짐작하겠어요?”
“그래요. 그녀를 알고 난 후 좀 변했지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난 웃으면 기분이 좋은 거고, 찡그리면 나쁜 거예요. 내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싫어도 싫은 내색을 안 했고 화가 나도 마음을 억누르더군요. 그래서 그녀의 속마음도 모르고 혼자 좋아했던 거예요.”
“솔직한 게 미덕은 아니지요. 때론 진심보다 포장된 말들이 우리를 더 기쁘게 하잖아요. 진실을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위악보다 위선이 허용되기 더 쉬운 세상인 것 같아요.”
“그래도 세련되게 포장된 예의와 미소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요. 모두들 그게 가식이라는 걸 알지만 단지 암묵적인 동의 하에 서로들 그렇게 지내요. 그게 피차 편하니까요.”
“그래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 역을 맡고 현실을 잊어버리기도 하죠. 다른 사람 앞에서 영혼을 숨기는 일은 이제 습관이 됐어요. 그런데, 행복을 연출한다고 진짜 행복해지는 건 아니죠.”
“바로 그거예요. 제가 이렇게 포커 페이스에 약하고 매너 있는 행동도 못하는 이유가요.”
몸에 밴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그의 직설적인 태도는 무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더욱 편안하게 느껴졌다. 허용된 시간이 지나가고 그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을 때,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저 ‘수고 많았습니다’라고 한다. 독창적이고 진실한 인사는 역시 불가능이다. 언젠가는, 고양이처럼 이마를 스치거나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간결하고도 진심 어린 인사가 인간 사이에도 가능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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