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채우기 위해 나를 비우는 시간
데이트 신청을 한 지 2주 만이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강필석은 마치 자신의 차기작이라도 고르듯 신중하고 적극적으로 데이트 코스를 정했다.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야 결정된 공연이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흑인 아카펠라 그룹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다. 공연을 앞두고 LG아트센터에서 만난 강필석은 자신의 휴식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다는 뜻밖의 얘기를 건넸다. <나인>, <씨왓 아이 워너 씨>, <쓰릴 미> 등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자신의 깊은 감정을 끌어내기에 바빴던 그가 연기에 대한 긴장을 풀기 위해 <김종욱 찾기>를 택했던 것처럼, 진정한 뮤지컬 배우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자신을 재정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단다. 오랜 고민을 마친 후에 즐기는 콘서트 무대가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의 자유롭고 흥겨운 무대를 바라보는 강필석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사실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라는 그룹을 미리 알고 찾은 공연은 아니었다. 평소에 음악 공연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계속 작품을 하다보니 따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 아쉬워 하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찾는 콘서트를 기대하면서 정보를 찾던 중에 ‘45년간의 발자취’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살펴보니 맘바조는 1960년대 죠셉 사발랄라가 형제와 조카들을 규합해 만든 남성 9인조 아카펠라 그룹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부터 지난 45년 동안이나 남아공 흑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노래해왔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올해 ‘아너링 샤카 줄루(Honoring Shaka Zulu)’로 세 번째 그래미상 최우수 월드뮤직 앨범상을 수상한 그룹이었다. 월드뮤직계의 수퍼스타의 첫 번째 내한 공연을 그냥 놓치면 후
회할 것 같아 공연장을 찾았는데, 전석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놀랐다.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의 공연은 정말 재밌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첫 번째 무대 빼고는 다 웃겼던 것 같다. 공연을 위해 많은 연출을 시도하는 보통의 가수들과는 달리, 맘바조의 아홉 멤버들은 ‘혹시 공연 준비를 따로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유롭게 무대를 누볐다. 줄루족 전통의 자유롭고 흥겨운 리듬과 가스펠의 정서가 혼합된 아름다운 보이스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멤버들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었지만 리더 죠셉 사발랄라의 자기 마음대로 부르는 듯한 노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치 가수 송창식 씨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어떤 격식도 없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를 연출하는 그는 진정한 대가인 듯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아프리카 전통 민요와 ‘Oh Happy Day’, ‘Amazing Grace’ 등의 가스펠, 빌리 조엘의 ‘River of Dreams’, 폴 사이먼의 86년 앨범 「Graceland」에 함께 참여한 ‘Homeless’ 등을 들려주었는데, 아카펠라 그룹 특유의 완벽한 하모니를 선보이는 데 집중하기보다 새로운 무대 위에서 새로운 관객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즐기는 듯했다.
이들에게는 `아카펠라 퍼포먼스 그룹’이라는 수식어가 조금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단순한 리듬에 맞춰 추는 힘찬 발차기 춤과 화음을 만들 때의 몸짓이 무척 흥겨웠다. 하지만 발차기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하다가 마이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춤추는 데 집중하는 모습은 특히 더 재밌었다. 이들이 초창기에 참가한 모든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얻었다는 그룹명이 충분히 어울리는 무대였다.
관객들의 반응도 기억에 남는데, 남아공 출신으로 보이는 몇몇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아르르르르’, ‘아바바바바바’ 등의 추임새를 더해 맘바조의 노래에 흥을 더했다.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무대에 직접 올라가 멤버들과 함께 발차기 춤도 선보였는데, 사방이 확 트인 열린 공간에서 이들의 무대를 봤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의 공연을 보면서 노래하는 기술이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나서야 사람의 목소리에 매력을 느낀 나는 지금까지 가창력이나 기교보다는 연기적인 면에 집중해서 노래를 불러왔다. 하지만 내가 공연한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노래를 하면 할수록 뭔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내 앞에 놓여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당분간 공연을 쉬면서 노래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맘바조의 자연스러운 무대에 감동받으면서도 이들의 경지가 한편으로는 실력을 갖춘 자만이 갖는 여유가 아닐까 싶었다. 감동을 주는 무대, 그리고 노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반가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