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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ime Travel] 디즈니가 브로드웨이에 부린 마법 [No.107]

글 |이민선 도움 | 조용신 2012-08-30 5,660

우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을 알기 전부터 미키마우스와 도날드덕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자랐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처 알지 못하고 꿈을 꾸던 시절, 동화 속 주인공들이 스크린에 되살아나 천연색으로 장식된 모험과 환상의 세계로 어린이들을 인도했다. 디즈니 캐릭터 상품은 늘 주변 어딘가에 놓여 있었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세상은 디즈니랜드에서 재현되었다. 그런데 어린이들의 친구로만 생각했던 디즈니가 뮤지컬을 제작해 성인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더 이상 디즈니를 다 큰 어른이라고 얕잡아볼 수 있는 만화 공장으로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다. 디즈니가 전 세계인에게, 특히 브로드웨이에 무슨 바람을 불러온 것일까.

 

 

 

 

 

 

 

 

 

 

 

 

 

 

 

 

 

 

 

 

 

 

 

 

 

 

 

 

 

 

디즈니는 뉴암스테르담 극장을 매입하고 보수 공사를 거친 후, 1997년에 <라이온 킹>의 초연을 올렸다. 현재 뉴암스테르담 극장에서는 <메리 포핀스>를 공연 중이다.

 

 

 

뮤지컬에 최적화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디즈니라는 거대 기업의 소박한 시작은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광고 회사의 도안사로 일하며 애니메이션에 눈을 뜬 월트 디즈니는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1923년에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연다. 1928년, 젊은 형제는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만들어내어  <미친 비행기>와 <증기선 윌리>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미친 비행기>는 무성 애니메이션이었으나, 곧 음향 시스템의 개발로 유성 영화가 등장한 데 발맞춰 디즈니 역시 <증기선 윌리>에 배경 음악과 미키마우스 목소리를 삽입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이후로 제작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는 늘 사운드트랙이 함께했다. 1937년에는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내놓았고, 1940년에는 <피노키오>에 이어, 차이코프스키와 스트라빈스키, 베토벤 등의 고전 명곡을 배경 음악으로 활용한 <판타지아>를 만들어 세간을 놀라게 했다. <덤보>(1941)와 <밤비>(1942), <신데렐라>(1950) 등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디즈니의 작품은 드라마와 음악이 결합된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꾸준히 사랑받았다.


디즈니는 이후로도 승승장구했다.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가족용 실사 영화를 제작하고, 디즈니랜드를 설립하였으며, 디즈니 케이블 채널을 갖게 되었다. TV 사업과 테마파크 건립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1966년에 월트 디즈니가 세상을 떠난 후 1980년대 말에 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전까지,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힘들었다. 1970~8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은 별로 흥행하지 못했고(이 시기에는 디즈니 작품뿐만 아니라 뮤지컬 영화들의 성적이 대체로 저조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이끌던 리더들도 회사를 떠났다. 그리하여 디즈니사는 파라마운트와 워너브라더스에서 마이클 아이즈너와 제프리 카젠버그, 프랭크 웰스를 영입하게 된다. 1984년에 디즈니사에 합류한 이들은 디즈니의 중흥기를 이끈다. 1989년에 탄생한 <인어 공주>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를 연 것이다. <인어 공주>의 성공은 음악에 힘입은 바가 크고, 그 음악을 탄생시킨 이들은 하워드 애쉬맨(작사)과 알란 맨켄(작곡)이었다.


아이즈너는 그동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흥행 실패 원인을 음악에서 찾았다. 대중적이되 좀 더 뮤지컬다운 음악을 원했던 그는 1980년대 초에 크게 흥행했던 뮤지컬 <리틀 숍 오브 호러스>의 창작자들을 눈여겨보고 애니메이션 음악을 맡겼다. 애쉬맨과 맨켄은 브로드웨이 스타일로 오래도록 회자될 만한 노래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인어 공주>는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으며, 그래미 시상식에서 사운드트랙 음반상을 받았다. 애쉬맨과 맨켄 콤비는 <인어 공주>에 이어 <미녀와 야수>(1991)에도 참여해 전작을 훨씬 능가하는 성공을 거둔다.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과 영화 <뉴시스>(1992) 등 알란 맨켄은 이후로도 꾸준히 디즈니 작품에 참여했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가 얻은 호평과 흥행 성공에 힘입어, 디즈니는 브로드웨이 진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드라마와 음악이 결합된 작품으로 이미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든든한 자본력까지 뒷받침되니, 자사의 콘텐츠로 뮤지컬을 만들려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었을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뮤지컬화는 오래전부터 운명 지어진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진출
1993년 디즈니 시어트리컬 프로덕션이 설립되고, 1994년에 첫 번째 뮤지컬 <미녀와 야수>가 세상에 나왔다.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니, 디즈니는 뮤지컬로 선보여도 손색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디즈니는 원작 창작자들을 그대로 뮤지컬에 투입했다. 린다 울버튼이 각색을 맡고, 애쉬맨과 맨켄 그리고 팀 라이스가 뮤지컬을 위한 일곱 곡을 추가했다. 만화 속 세상이 무대 위에 화려하게 재현됐다. 워낙 잘 알려진 원작이라 대중들에게 큰 관심을 얻었지만, 브로드웨이의 기존 프로듀서나 평론가들이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만화 영화를 뮤지컬로 만들다니. 뉴욕의 교양 있는 공연 애호가들 역시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재연한 공연의 예술성을 폄하했고, 뉴욕 타임스의 비평 또한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이전에 한번도 뮤지컬을 본 적이 없었던 이들도 친숙한 이야기와 화려한 쇼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 관람객들도 인기 만화 영화의 부활을 궁금해 했다. 예술성은 부족했을지언정 선한 스토리와 흥겨운 음악, 스펙터클한 무대는 가족 관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1994년에 팰리스 극장에서 초연한 <미녀와 야수>는 극장을 옮겨가며 2007년까지 공연됐다. 13개 국가, 115개 도시에서 공연됐고, 전 세계에서 14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미녀와 야수>의 성공에 힘입어, 디즈니는 두 번째 뮤지컬을 선보였다. 다음 선수는 엘튼 존과 팀 라이스가 참여해 스크린에서 성공을 거둔 <라이온 킹>. 엘튼 존은 <라이온 킹>의 뮤지컬화를 통해, 원했던 뮤지컬 작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개막 전부터 인기 원작과 유명 창작자의 만남에 대한 기대와, 동물 캐릭터의 무대 구현에 대한 우려가 공존했다. <미녀와 야수>가 원작의 환상적인 재연에 초점을 맞췄다면, 디즈니는 두 번째 작품에서 좀 더 무대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무대에 걸맞는 마법을 부리는 도전을 감행했다. 세계 각국에서 인형극을 배우고 경험한 줄리 테이머를 연출가로 영입한 것이다. 그녀는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해 가면과 각종 소품, 의상으로 표현된 아프리카 자연을 무대에 옮겨놓았다. 1997년에 초연한 <라이온 킹>은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 속에 <미녀와 야수>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라이온 킹> 역시 극장을 옮겨 현재까지도 공연되고 있으며, 올해 4월에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작품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로 디즈니는 꾸준히 뮤지컬을 제작했다. 디즈니가 제작한 뮤지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작품은 자사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2006년에 선보인 <타잔>과 2007년 <인어 공주> 등이 그런 예이고, 추후 <알라딘>과 <정글북> 등 뮤지컬화할 계획을 갖고 있다.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가 참여해 2004년에 웨스트엔드에서 먼저 개막한 <메리 포핀스>, 디즈니 채널에서 브로드웨이로 옮겨진 <하이 스쿨 뮤지컬>, 올해 개막한 <뉴시스>는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를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자사의 콘텐츠가 아닌 원작을 택한 것은 2000년에 초연한 <아이다>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제작된 <메리 포핀스>와 <인어 공주>가 어느 정도 흥행하기는 했으나, 1990년대 브로드웨이에 진출했을 당시만큼 화려한 전성기를 가능케 한 작품은 없었다.

 

 

 


디즈니 뮤지컬들은 대중들에게 이미 익숙한 자사의 콘텐츠를 재료로 만들어졌다. 저작권 취득의 어려움 없이 원작의 활용과 각색이 용이하고, 이미 검증받은 원작은 초연의 위험도를 낮추었다. 폭력성과 선정성과는 거리가 먼, 가족 친화적이며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원작들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관객들을 공략하기에 좋았다. 게다가 들을 거리와 볼거리가 충분한 쇼는 누가 봐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기존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과는 조금 달랐지만, 자본과 인력이 뒷받침되는 디즈니 뮤지컬은 상당히 세련된 비주얼을 제공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드라마와 캐릭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디즈니 뮤지컬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다.


캐머런 매킨토시가 앞장섰던 메가 뮤지컬의 성공에는 글로벌 콘텐츠의 개발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넘어서 세계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와 음악을 만들어 본토에서의 장기 흥행은 물론, 저작권 수출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같은 공연이 동시에 오르도록 기획했다. 디즈니 뮤지컬 역시 전 세계로 팔려 나갔는데, 이는 예견된 수순이었으며 매킨토시보다 한 수 위의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매킨토시가 보편적으로 감동적인 드라마를 찾을 때, 디즈니는 이미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캐릭터와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TV 만화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서 부활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 세계의 어린이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주인공이 꿈과 희망을 이루어내는 데 매료되어 있었기에, 디즈니 뮤지컬의 파급력은 클 수밖에 없었다.

 

 

 

 

 

 

디즈니의 뮤지컬 사업 전략
경제 공황과 전쟁을 겪는 동안 브로드웨이 극장가, 특히 42번가의 극장들은 대부분 폐쇄되고 타임스 스퀘어는 우범지대로 변모했다. 1980년대 중후반, 런던에서 날아온 빅4 뮤지컬들의 성공으로 브로드웨이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자,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뉴욕의 시장으로 부임했던 루돌프 줄리아니는 타임스 스퀘어가 어두운 그림자를 거둬내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을 펼쳤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타임스 스퀘어에 메리어트 호텔과 MTV, ABC 방송국 등이 들어섰다. 과거 <지그필드 폴리스>를 공연했던 명성을 지녔지만, 수십 년간 문을 닫고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뉴암스테르담 극장 역시 재탄생했다. 디즈니가 극장을 사들이고 3년간 보수 공사를 행한 후, 1997년에 <라이온 킹>을 올리자 뉴암스테르담 극장과 42번가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의 40개 극장들 중 2/3 이상은 슈베르트와 네덜란더, 쥬잠신, 빅3 극장주들이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극장들도 개인이 소유하거나 비영리 극단들이 운영하고 있다. 연초에 어느 정도 대관 일정이 정해지는 국내 뮤지컬계와 달리, 브로드웨이는 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오픈 런으로 공연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응이 좋지 않아서 개막일에 막을 내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의외의 성공으로 극장을 떠나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공연장 대관 일을 예측하기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사의 뮤지컬을 올리는 데 용이하도록 디즈니는 직접 운영할 극장을 필요로 했고, 비어 있던 뉴암스테르담 극장을 매입해 재개관했다. 디즈니 작품은 가족 관람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며 42번가의 부활에도 한몫하게 된다. 우범지대를 안전지대로 탈바꿈하는 데 영향을 미친 디즈니는 영리 활동을 하고도 문화적 공공성을 지닌 기업인 듯한 호의적인 이미지까지 얻게 되었다. <라이온 킹>은 2006년에 민스코프 시어터로 옮겨서 공연 중이며, 현재 뉴암스테르담 극장에는 <메리 포핀스>가 둥지를 틀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디즈니는 자사의 콘텐츠를 백분 활용하여 뮤지컬을 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인 <라이온 킹>을 올릴 때, 디즈니는 극장을 사들였다. 이로써 콘텐츠와 극장, 즉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갖추어 외부의 투자 없이도 작품을 올릴 수 있는 독보적인 제작사가 되었다.


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공연 제작사로는 이전에 리벤트와 다저스가 있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본사를 두고 있었던 리벤트(Livent)는 1993년부터 빠르게 성장하며 <거미여인의 키스>, <쇼 보트>의 리바이벌, <랙타임>(1998) 등을 제작했다. 토론토의 팬티지스 극장과 시카고의 오리엔탈 극장, 뉴욕의 포드공연예술센터 등 몇몇 극장을 짓거나 재단장했다. 하지만 이내 사세가 기울고 파산과 오너 교체 등을 겪으며 결국 사업을 접고 말았다. 이후 포드공연예술센터는 2005년 힐튼 시어터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고, 2010년부터는 콘서트 프로모션 기획사 라이브 네이션이 운영을 맡아 <스파이더맨>을 올리고 있다. 현재 이름은 팍스우드 시어터이다.


연출가 데스 맥아너프를 포함해 몇몇 주주가 모여 만든 다저스(Dodger Theatricals)는 1982년 <펌프 보이즈>, 1997년 <타이타닉>과 <1776>, 2001년 <유린타운> 등을 제작했다. 작곡가 모리 예스턴과 작가 피터 스톤 등의 인력들을 수급해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곤 했다. 2004년에 다저스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인수해 리노베이션을 거친 후, 오프브로드웨이 멀티플렉스 공연장인 다저스 스테이지스를 열었다. 하지만 2년 후, 다저스는 공연 제작과 극장 운영을 분리했다. 극장 운영을 스테이지 엔터테인먼트에게 맡기고, 다저스 스테이지스는 뉴 월드 스테이지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5개 관을 가진 뉴 월드 스테이지스는 <이블 데드>와 <록 오브 에이지>, <톡식 어벤저(국내 제목은 톡식 히어로)>, <애비뉴 Q>, <렌트> 등을 올리고 있다. 이로써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제작과 극장 운영을 모두 하는 기업은 디즈니가 유일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7호 2012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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