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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ime Travel] 브로드웨이의 혁명 <렌트> [No.108]

글 |배경희 도움 | 조용신 2012-10-04 7,193

“10년에 한 번씩 그 시대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뮤지컬이 등장한다. 1960년의 <헤어>나 1970년대의 <코러스 라인>처럼. 그리고 1996년에는 <렌트>가 등장했다. <렌트>는 다른 장르의 모든 뮤지컬을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USA 투데이-

 

메가 뮤지컬이 주류를 이루는 시장 속에서 1996년에 등장한 <렌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뮤지컬의 인식을 거스르며 브로드웨이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그 시대의 이정표가 됐다. 190석 작은 극장에서 출발해 브로드웨이 역사상 아홉 번째 롱 러닝 쇼라는 흥행을 기록한 ‘뉴 뮤지컬’ <렌트>. 대체 <렌트>의 무엇이 그토록 특별했던 것일까?

 

 

 

 

 

 

 

 

 

 

 

 

 

 

 

 

 

 

 

 

 

 

 

 

위> 뉴욕 시어터 워크숍에서의 최종 드레스 리허설 직후 <뉴욕 타임즈>에서 촬영한 조나단 라슨과 마이클 그리프. 라슨은 이 사진을 찍은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대동맥류로 사망했다.   아래> 조나단 라슨과 그의 멘토 스티븐 손드하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새로운 가능성 <렌트>
1990년대 브로드웨이의 대표작이자 (당시로서는) 가장 젊고 현대적인 뮤지컬. 뮤지컬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렌트>는 분명 전환점이 될 만한 전과 다른 작품이었다. 당시 브로드웨이의 상황을 살펴보면, 시장 침체기였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재나 형식 면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한 뮤지컬―<팔세토>(1992), <거미 여인의 키스>(1993), <토미>(1993)―이 등장하고, 이 작품들은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이끌어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다. 하지만 여전히 브로드웨이 흥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건 정체된 시장에 활기를 불어준 런던발 메가 뮤지컬―<캣츠>(1981), <레 미제라블>(1985), <오페라의 유령>(1986), <미스 사이공>(1989)―과, 가족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디즈니 시어트리컬의 <미녀와 야수>(1994)와 같은 대중적인 작품들이었다. 이 흥행작들은 웅장한 음악과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승부수를 던지는 대형 뮤지컬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렌트>가 여타의 작품들과 다른 위치에서 차별화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출발해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렌트>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는커녕 공연 중 세트 전환이 한번도 이뤄지지 않는 원 세트 무대를 사용한다. 라이브 연주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아닌 밴드가 대신한다. 소재 역시 달랐다. 앞선 작품들이 현실과 거리가 먼 동화 속 판타지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린다면, <렌트>의 주인공은 뉴욕 변두리에 사는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다. 게다가 이들은 동성애자이거나 에이즈 양성 환자이며, 또 약물 중독자다. 뮤지컬에서 동성애와 마약, 홈리스 같은 낯선 소재를 다뤘다는 것부터 충격적이지만, <렌트>의 파격성은 동시대 사회 문제였던 ‘에이즈’를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1980년대 중반 에이즈가 미국 사회를 강타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 이 불치병에 대한 공포가 진정되면서 이를 소재로 한 연극이나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지만, 뮤지컬만은 예외였다. 해피엔딩을 지향하는 뮤지컬에서 어두운 주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렌트>는 에이즈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첫 번째 뮤지컬이었다. 다시 말해, <렌트>는 뮤지컬이 외면했던 현실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작품이다.

 

 

 

위> 뉴욕 시어터 워크숍 리허설공연이 끝나고 관객 전원이 기립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다. 아래> 러시 티켓을 사기 위해 밤새 줄을 서고 있는 `렌트 헤즈`

 


이렇듯 <렌트>는 현재의 미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다분히 미국적인 뮤지컬이었고(극 중에는 “I`m a New Yorker! 전 뉴요커예요. Fear is my life! 두려움이 내 삶이라고요!” 같은 대사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관광객’이 아닌 ‘미국인’이 관객의 다수를 차지하는 각별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렌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브로드웨이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뮤지컬을 즐기지 않았던 MTV 세대를 극장으로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다. <렌트>의 상업 프로덕션은 브로드웨이 공연 개막 전, MTV 세대를 타깃으로 한 뮤직 비디오를 제작해 방영하는 마케팅을 펼쳤는데, 이러한 이례적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이는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 쓴 음악이 젊은 세대들이 즐겨 듣는 록 음악을 그대로 뮤지컬 넘버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싱글 곡으로 발매해도 좋을 만큼 완성도 높은 뮤지컬 넘버는 뮤지컬 관객이 아닌 음악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또한 <렌트>의 인기는 <헤어>와 마찬가지로 기성세대와 선을 긋고 또래끼리의 소속감을 확인하게 해준 것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공연이 젊은이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창구가 된 것이다. “어차피 세상 모든 건 다 빌려 쓰는 것이니 집세를 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주제곡 ‘렌트’만 봐도 이 작품이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세대가 <렌트>에 보인 반응은 열광적이었는데, 당시 학생들은 당일에 선착순으로 파는 20달러짜리 할인 티켓, 일명 ‘러시 티켓’을 사기 위해 밤새 줄을 서는 일도 허다했다.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되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프로덕션에서 로터리 티켓(추첨 방식) 제도를 만들었을 정도다.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 MTV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록 오페라’를 만들고자 했던 시도가 성공하면서,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콤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1) 이후 주춤했던 록 오페라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위> 뉴욕 시어터 워크숍에서 리허설 중인 아담 파스칼 아래> 뉴욕 시어터 워크숍에서의 최종 리허설을 앞두고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단체 사진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 훌륭한 캐스팅과 팀워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로저 역의 오리지널 캐스트 아담 파스칼은 “<렌트>는 15명의 등장인물이 끈끈한 사이가 아니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뮤지컬”이라고 말한다.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보여야지 여러 명의 개인이 모여 있는 것처럼 연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렌트>는 스타 배우 없이 무명에 가까운 15명의 배우들이 잘 어우러져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조나단 라슨과 함께 워크숍부터 함께해 온 주연 배우들이 정식 공연에 참여했기 때문에 더없이 잘 짜인 팀워크를 보여줄 수 있었다. 두 주인공 아담 파스칼과 앤서니 랩은 물론이고 미미 역의 다프네 루빈 베가, 모린 역의 이디나 멘젤은 <렌트>로 스타덤에 올랐다. 한명의 스타 배우를 캐스팅한다고 해서 공연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명제를 확인시켜줬다.


<렌트>의 인기는 200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1996년 4월 29일 네덜란더 씨어터에서 개막해 2008년 9월 7일에 막을 내리기까지 12년간 오픈런으로 공연되며(총 5,124회 공연), 브로드웨이 역사상 아홉 번째 롱 러닝 쇼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 기간에 브로드웨이에서 거둬들인 수익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 약 280만 불(31억 원). 미국 내 투어 공연으로도 약 330만 불(37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이뿐만 아니라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출발한 이 작은 뮤지컬이 전 세계 25개국에서 15개 언어로 공연됐으며,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됐으니 <렌트>는 아메리칸 뮤지컬의 자존심을 세워준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기류 ‘New Musical’
‘뉴 뮤지컬’로 지칭된 <렌트>는 말 그대로 ‘새로운’ 뮤지컬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내용, 음악, 형식, 모든 면에서 현대적이었으며, 동시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확실히 구분됐다. 조나단 라슨뿐 아니라 1980년대 후반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포스트 손드하임(Post Sondheim ― 브로드웨이의 살아있는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의 후예를 뜻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나단 라슨, 윌리엄 핀, 마이클 존 라키우사,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 아담 구틀 등이 있다) 계열로 불리는 작곡가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는 뉴 뮤지컬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포스트 손드하임 작가들의 작품은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지적인 음악과 비극을 선호하는 성향을 띈다. 이들은 드라마틱한 서사의 비극이 아닌 현실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뉴 뮤지컬은 그동안 뮤지컬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 데도 서슴없었다. 현대인들의 고민이라는 현실적인 주제와, 주류보다는 비주류적인 소재, 밝고 경쾌한 주인공이 아닌 고민하는 캐릭터. 한 마디로 메가 뮤지컬이 쇼적인 쇼를 지향했다면, 뉴 뮤지컬은 보다 현실 세계에 맞닿아 있다.


포스트 손드하임 계열 작곡가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작곡가는 아담 구틀이다. 그는 브로드웨이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의 외손자로, 클래식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선율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아담 구틀의 데뷔작 <플로이드 콜린스>(1996)는 1925년 켄터키 주의 한 동굴 속에 갇혀 죽어간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동굴 안에서 죽어가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뮤지컬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작품인 것이다. 1996년 오프브로드웨이의 비영리 공연 단체 플레이라이트 호라이즌 극장에서 공연됐으며, 동굴 안이라는 설정 상 최소한의 빛과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미니멀한 여백의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위> 아담 구틀,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 아래> 윌리엄 핀

 


윌리엄 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팔세토>(1992) 역시 플레이라이트 호라이즌의 지원으로 공연이 올라간 작품이다. 1971년에 개관한 이 극장은 신예 창작자들을 발굴해 신작 발표를 중점에 두고 작가 중심의 공연을 올리는 데 힘써왔다. 윌리엄 핀 역시 어두운 이야기를 다룬다. 동성애가 금기시되던 시대에 이를 다루었을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거칠지만 유쾌하게 다룬다.


뉴 뮤지컬의 대표작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의 <퍼레이드>(1998) 역시 1913년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살인 사건의 억울한 누명을 쓴 유대인 레오 프랭크를 주인공으로, 인종차별과 대중매체, 정치적인 세력에 의해 희생된 한 남자와 그 아내의 이야기를 그리며 1998년 링컨센터 제작으로 브로드웨이에 올라갔다.


창작자가 중심이 되어 출발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마이너적인 작품의 특성상 상업 프로덕션이 아닌 비영리 공연 단체의 지원을 받아 작품이 개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포스트 손드하임 세대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아담 구틀의 <라이트 인 더 피아자> 역시 비영리 단체 링컨 센터의 지원을 받아 시작됐다. 대표 비영리 공연 단체로는 브로드웨이 극장 규모(500석 이상)의 링컨 센터 시어터를 포함해, 맨해튼 시어터 클럽, 라운드 어바웃 시어터 컴퍼니가 있으며, 오프브로드웨이에는 <렌트>를 탄생시킨 뉴욕 시어터 워크숍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비영리 공연 단체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비영리 극장들은 신진 창작자들을 발굴해 낭독 공연이나 워크숍의 기회를 주고 작품 개발을 돕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아티스트가 개발 중인 작품 가운데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선별해 제작을 지원한다. 비영리 극장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로 시작한 작품들 중 관객들의 호응이 좋으면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기도 한다. 비냐드 씨어터의 <애비뉴 Q>나, 아틀란틱 씨어터의 <스프링 어웨이크닝>, 세컨드 스테이지의 <넥스트 투 노멀> 등이 비영리 단체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로 공연을 올렸다가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뉴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를 움직이는 또 다른 작은 거인으로 주목 받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8호 2012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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