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그동안 문화를 이식받았던 한국인에게 아시아 전역뿐만 아니라 서구에 우리의 문화를 전파한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한류 드라마가 아시아 지역은 물론 선진 문화국인 일본까지 전파됐고, K-POP은 아시아를 뛰어넘어 유럽을 점령했다. ‘한류’는 세계에 대한민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북돋워 주었다.
K-POP 한류에 이어 뮤지컬 한류에 대한 기사가 작년 말부터 조금씩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뮤지컬 한류는 K-POP 한류의 지류로서의 역할만 할 뿐 그 자체가 새로운 한류 붐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아시아, 특히 일본과 중국에서 한국 뮤지컬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특히 올해 많은 한국 뮤지컬이 일본 무대에 오르고, 많은 해외 공연 팬들이 국내로 원정 오고 있다. 이제, 한류 뮤지컬 바람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한류 뮤지컬의 현 단계를 점검해보고 그 실체를 파악해본다.
한국 뮤지컬은 한류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처음 ‘한류’라는 말이 통용된 것은 1998년 대만에서부터였다. 클론과 H.O.T의 음악이 타이베이의 클럽을 휩쓸었고 수준 낮은 댄스곡을 립싱크 하는 반쪽 가수로 비하되었던 그들은 자랑스러운 문화 사절단으로 격상되었다. 반만년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내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는데도 바다를 건널 때마다 조국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미미한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의기소침했던 공동체는 ‘한류’라는 새로운 물결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어 외부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중년여성의 감성을 건드린 한류 드라마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된 한류 붐이 제대로 탄력을 받고 국가적인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은 2000년대 초중반 1차 한류가 일본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그 물결은 두 가지 흐름을 가지고 시작되었는데 첫째는 드라마 <겨울연가>이고 둘째는 가수 보아였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성공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과였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기념하여 양국 간의 문화 교류가 유례없이 활발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영 방송사인 NHK가 별 기대 없이 위성 채널에 틀었던 KBS의 <겨울연가>가 중년 여성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공중파 채널로 옮겨와 수차례 재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겨울연가>에 이어 일본이 잃어버린 ‘순애’를 담은 복고풍 드라마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 절정에서 <대장금>이 거둔 성공은 한중일 삼국을 아우르는 문화 현상이었다.
<겨울연가>와 <대장금>은 모두 일본 시장을 최종 목표로 하는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2006년 임태경과 고영빈이 준상 역에 더블 캐스팅 된 뮤지컬 <겨울연가>는 윤석호 PD가 직접 제작에 뛰어든 작품으로 도쿄와 삿포로에서 투어 공연을 했다. 한류 팬을 자처하는 일본의 퍼스트레이디까지 극장을 찾았지만 <겨울연가 더 뮤지컬>은 일본에서 장기 레퍼토리가 되지는 못했다. <겨울연가>는 애니메이션, 포토북, 만화, 소설 등 온갖 종류의 부가 상품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뮤지컬의 경우 지속적으로 신규 관객이 유입되지 않으면 쇼가 계속될 수 없다는 분명한 숙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해서, 독자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갖춘다면 원작의 생명력을 뛰어넘어서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K-POP 중심의 2차 한류 붐
문화적으로 소외된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뜬금포를 터뜨렸던 <겨울연가>와 달리 가수 보아의 성공은 SM엔터테인먼트가 일본 시장을 철저하게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한 성과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걸 그룹 S.E.S가 가시적인 소득 없이 일본 시장을 포기한 후, SM은 보아를 3개 국어에 능통한 코스모폴리탄 천재 소녀의 이미지로 일본 대중 앞에 세웠다. 보아는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등 대형 솔로 여가수를 키워낸 에이벡스를 통해 연결된 J-POP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에게 받은 곡을 불렀고, 해외 아티스트가 아닌 J-POP 가수로 분류되었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통해 단일 앨범으로 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보아의 뒤를 이어 일본 시장에 발을 내딛은 것이 동방신기이다.
이미 자니스 프로덕션이 장악하고 있는 남자 아이돌 시장에 발을 붙이기 위해 동방신기는 밑바닥부터 올라가는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 동방신기 역시 J-POP 카테고리에 들어갔지만 무국적의 이미지였던 보아와 달리 이들은 한국에서 온 다섯 명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최소 규모인 홀 투어부터 시작해서 도쿄돔에 입성하기까지 3년이 걸렸고, 바닥부터 훑어 올라가면서 쌓은 팬덤은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되었다. 절정의 순간에 분열된 동방신기가 활동을 멈춘 사이, 빅뱅, 슈퍼 주니어, 2PM, 샤이니,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2NE1 등 수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가요계를 점령했다. 아이돌의 득세는 뮤지컬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빅뱅의 승리를 시작으로 인기 절정의 현역 아이돌들이 차례로 뮤지컬 무대에 섰다. 이들을 보려는 관객들이 아시아 각국에서 몰려들었고, 로비에서 일본어와 중국어가 들리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해외 관광객들이 즐겨 보던 넌버벌 공연의 경우 한국에 온 김에 하는 문화체험이었다면, 한류 콘텐츠와 연계된 뮤지컬은 그 작품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관객들을 유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분명했다. 티켓파워가 있는 스타캐스팅을 원하는 제작자와 그룹 밖에서의 개별 활동으로 커리어를 쌓고 싶은 아이돌 측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한류 드라마의 시청률이 점차 떨어지면서 위기론이 불거지던 2010년, 카라와 소녀시대, 그리고 장근석이 역전홈런 같은 큰 성공을 거두면서 한류는 특정 연령대가 아니라 일반 대중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가 되었다. 1차 한류를 상징하는 드라마가 <겨울연가>였다면 K-POP이 중심이 된 2차 한류의 대표작은 <미남이시네요>이다. <겨울연가>와 <미남이시네요>의 차이는 한류 소비층의 성향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직은 팬 장사 수준
버블 붕괴 이후에도 활발하던 일본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노쇠해진 것은 세계 2위 규모의 자국시장을 두고 굳이 저작권 개념이 약한 아시아 주변국이나,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구미 시장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리 식’ 상품으로 고객을 상대하다가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수시장마저 위협받는 갈라파고스 현상은 일본의 IT산업만이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서도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 연예계가 한류를 견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은 핵심 콘텐츠가 한국산이라고 해도 유통을 담당하는 것만으로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카라의 경우 수익의 92%가 일본으로, 8%만이 한국 기획사와 카라에게로 돌아오는 구조이다. 일본 연예계의 입장에서는 곡을 쓰고 무대에 서는 사람의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위축된 소비를 촉진할 수 있는 스타, 즉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극단 시키와 토호가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 뮤지컬계를 벗어나 한국 뮤지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관객들과, 그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 뮤지컬을 유치하려고 하는 일본 공연계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를 수입한 쇼치쿠좌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부키 극장이고, 내년 1월 <광화문 연가>를 공연하는 메이지좌는 130년의 역사를 가진 극장이다. ‘이 극장의 프로그램이라면 믿고 본다’는 고정 관객층이 거느린 전통 있는 극장이지만, 젊은 관객의 유입이 줄어들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 K-POP 향유층은 적극적인 소비를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타깃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본의 공연 관계자들이 한국 뮤지컬을 진지하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 크게 흥행을 한 작품은 드물지만 그 수준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 영화에 대한 반응과 분명히 다르다. 일본에서 한류 뮤지컬을 공연했던 한 관계자는 ‘냉정하게 말해서 아직은 팬 장사’라고 지적했다. 현재 시점에서의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1회성 ‘팬 장사’를 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스타를 보겠다’는 목표가 분명한 이들에게 그 이상의 만족을 안겨주어서 충성심 있는 관객으로 끌어들이고, ‘한국 뮤지컬’이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형성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2012년, 동방신기가 3개월간의 일본 투어로 벌어들인 매출이 1,000억 원가량이다. 그런데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뮤지컬 시장의 2011년 전체 매출을 2,000억 원 수준으로 어림잡는다. 일본에서도 뮤지컬 산업의 규모는 대중음악계에 비해서는 협소하다. 하지만 K-POP의 득세는 한국 뮤지컬계에도 거대한 시장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수 있다. 일본에서 한류 뮤지컬을 중심 콘텐츠로 하는 잡지의 창간을 준비 중인 출판사 신서관의 관계자는 자신들이 만드는 매체의 목표를 ‘K-POP 스타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 뮤지컬을 보기 시작한 팬들이 한국 뮤지컬 자체의 매력에 눈뜰 수 있게 이끄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내부에서는 적어도 그 이상의 고민과 목표 의식이 필요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5호 2012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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