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문화산업의 각 분야에서
보편적인 서사 구조로 활용되고 있다.
이 서사는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체험하며 목표를
이루어내기까지의 과정을 극적으로 담아내 감동을
이끌어낸다. 현재 공연 중인 <요셉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와 <영웅>도 그런 영웅의 면모를 그린다.
전자가 영웅 서사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다면,
후자는 ‘그는 왜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나’에
치중하며 시대의 아픔을 전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영웅의 다양한 속성 중 일부에
불과하다. 영웅이 반드시 승리자나 구원자인 것은 아니다. 실패자이거나 악당, 또는 미치광이이거나
괴물일 수도 있다. 이때 ‘영웅’은 스스로의 의지로
한계를 극복해, 쉽지 않은 일을 해내는 이들을 총칭한다.
루저에서 영웅으로
문화 콘텐츠 속에 등장하는 영웅은 당대의 대중이 원하는 리더십을 형상화한 존재였다. ‘조로’가 그렇고, ‘홈즈’나 ‘루팡’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민한 두뇌를 바탕으로 신출귀몰한 행적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웅의 특성은 이런 초인적 캐릭터뿐만 아니라 평범한 인물에서도 발견된다. <맨 오브 라만차>의 알론조 기하나는 주변인들에겐 그냥 노망이 든 영감이다. 오래전에 사라진 기사도를 추구하면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이상을 좇는 삶’의 의미를 설파한 그의 행동에 사람들은 마침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비범함보다는 초라함과 안쓰러움에 가까웠던 소시민의 영웅담은, 이로써 뭉클한 감동과 함께 새로운 영웅상을 알리게 된다.
오직 프롤로의 명령에만 복종하며 사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는 영웅의 전형과는 거리가 먼 추물이다. 왜 이런 괴물이어야 했을까. 당시 사회에서 하층민은 멸시의 대상이었고,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콰지모도였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에는 이들 하층민의 불결한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위고는 이 가난하고 더러운 하층민들에게서 오히려 희망의 가능성을 읽었다. 고착된 채 썩어가던 시대를 닫고 르네상스 시대를 열 원동력으로 민중의 힘을 주목한 것이다. 괴물의 형상으로 태어나 온갖 핍박과 괄시를 받던 콰지모도는 이 하층민 계층을 대변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에스메랄다를 피신시키면서 다른 집시들까지 함께 구출하는 것은 민중의 자기 해방과 구원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를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종말로 해석할 때, 콰지모도의 행위는 그런 구시대의 질서에 맞서 자유의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한 개인의 영웅적 행위로 볼 수 있다.
한편 <두 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칼튼은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개인주의자이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은 변호사의 신분이지만, 술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알코올 중독자처럼 살아간다. 아무런 삶의 의욕이나 열정을 찾을 수 없는 그의 인생에서 영웅적 면모를 찾기란 어렵다. 그런 그가 루시 마네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던 그는, 사랑하는 이의 행복과 사회적 안녕을 명분으로 기꺼이 이런 결단을 내린다. 이런 선택은 극단적 이타주의에 바탕을 두는 행동이다. 자신의 생명과 주변인들의 평화를 맞바꾸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어떤 잘못도 없이 단두대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모습은 마치 순교자처럼 숭고해 보인다.
자신과 싸우는 여성 영웅
대부분의 영웅 서사에서 나타나는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남성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 특성을 지닌 캐릭터들은 어떤 하나의 목표에 완전히 매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과정을 따라간다. 거기에는 어떤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다. 일단 뭔가에 ‘꽂히게’ 되면 거기에 확신을 갖고 때로는 자신까지 희생해가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때 그가 맞서 싸우는 대상은 주로 타인이자 사회와 같은 외부 세계다.
반면 영웅적 특성을 지닌 여성 캐릭터들은 외부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과도 끊임없이 투쟁하고 흔들린다. 부당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남성 영웅의 것과 비슷하지만, 눈앞에 닥친 시련 앞에 절망에 빠지거나 혼란스러워하는 점은 다르다. 특히 여성 영웅에게 사랑의 완성은 자신의 사명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다. 남성 영웅의 사랑이 상대방과의 교감과는 별개로 일방적일 때가 많다면, 여성 영웅의 사랑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이들의 결말은 양자택일이 아닌 제3의 대안으로 향하게 된다.
이런 점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작품이 <아이다>다. 누비아의 공주였던 아이다가 이집트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고난의 여정이 시작되고, 이를 극복해가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과정은 기존 영웅 서사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이다가 겪는 가장 큰 갈등과 혼란은 정치적 신념과 개인의 사랑의 충돌에 따른 것이다. 공주의 신분에서 노예가 된 아이다는 개인적인 좌절에 빠졌지만, 곧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깨닫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연인인 라다메스와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대신 아버지인 누비아의 왕을 탈출시키는 선택을 함으로써 조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서 아이다가 기존 영웅들과 다른 점은 결국 사랑이라는 개인적 욕망까지 함께 이뤄낸다는 것이다. 누비아 민족에게는 숭고한 영웅으로 남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죽음으로써 영원히 함께한다는 결말은 기존 영웅 서사의 양자택일을 초월한다.
이런 점은 엘파바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위키드>는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됐던 동화의 설정을 전복해, 악으로 치부됐던 엘파바가 사실은 독재자에 맞선 영웅이었다는 역발상에서 출발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의 엘파바가 주류 사회가 만들어놓은 선악 기준에 저항하며 자신의 길을 확립해가는 과정은 영웅의 성장담과 일맥상통한다. 동물 교수가 쫓겨나고 언어를 잃게 된 배후에 학장과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엘파바에게도 선택의 순간은 다가온다. 또 ‘절친’이 된 글린다의 남자 친구 피예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죄책감과 달콤함의 양가적인 혼란에도 빠지게 된다. 이 시점에서 엘파바는 고난의 길이 펼쳐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1막 마지막의 ‘디파잉 그래비티(Defying Gravity)’는 그런 엘파바의 영웅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엘파바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고 연인인 피예로도 허수아비로 남게 됐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함께한다는 결말을 맞으며 여성 영웅 서사의 다양성을 입증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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