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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억척가> 억척어멈, 반성적 인식과 따스한 연민의 절묘한 절충 [No.94]

글 |이영미(대중문화 평론가) 사진제공 |LG아트센터 2011-07-12 4,722

소리꾼 이자람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2007년 <사천가>는, 1985년 임진택의 <똥바다> 이래 다시 한번 본격적인 장편 창작판소리의 새로운 성공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후 뮤지컬 <서편제>를 거쳐 뮤지컬 팬들에게 알려졌고 이번에는 다시,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하 <억척어멈>)을 저본으로 한 신작 판소리 <억척가>로 객석을 꽉 채웠다.

 


그러나 매사에 걱정이 많은 나는 이번 신작이 <억척가>라는 점에서 다소 우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과 인물에 섣부른 연민이나 감동을 하지 말라고 얼음을 뿌려대는 ‘얼음대마왕’ 브레히트의 냉철함과,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끈끈하고 정감 있는 해석이 충돌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끈끈하고 감정적 페이소스의 세계최강자인 판소리라니 더욱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원작 <억척어멈>은 수십 년 계속되는 전쟁의 상황에서,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다친 발을 절룩이며 달구지 장사로 먹고사는 성품 모진 욕쟁이 아줌마의 이야기이다. 한국인이라면 이런 소재를 어떻게 다루고 싶겠는가. 한국인은, 바로 우리들의 가난하고 불쌍한 어머니를 오버랩 하게 된다. 험악한 세상을 버텨오며 자식들을 먹여 살린 어머니, 그러느라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이고 욕지거리와 속물스러움이 덕지덕지 묻어있으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어머니 말이다.


여태까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을 적극적으로 한국화한 몇 가지 대표적 사례들이 다 이랬다. 1983년 이근삼 작 <게사니>에서는, 주인공을 역사를 버티는 민초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83년에는 사회주의권 인물인 브레히트의 작품은 공연은커녕 번역되기조차 힘들었던 때여서, <게사니>는 분명 <억척어멈>의 모작인데도, 신작 창작극만 참가할 수 있는 대한민국연극제에서 공연되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게사니>에서는 게사니(거위의 평안도 방언)처럼 웩웩 대는 거친 중년 여자의 이야기를 한 축에 놓고, 일본의 침략에 평안도까지 쫓겨 가는 무능하고 비겁한 조정의 이야기를 다른 한 축에 놓았다. 역사와 나라를 움직이고 버텨 나가는 것이 왕과 양반네들인 듯 보이나, 사실은 게사니처럼 웩웩 대며 자기 식구 건사하기에 바쁜 민초들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 게사니는 표면적으로는 모질고 이기적인 듯하나,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버팀목이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몇 년 전에 공연된 이윤택 연출의 <억척어멈>은 좀 더 가까운 6·25 전쟁 때로 이 이야기를 가져왔다. 이 작품은, 원작의 인물과 사건을 거의 그대로 살렸으나 억척어멈은 험한 역사를 온몸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한국적 어머니로 재해석되었다. 속물스럽고 어리석기도 하지만, 그 억척이 선함과 저항성으로까지 느껴지도록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 둘 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의미 부여가 훨씬 적극적이니 그에 대한 연민도 크다.

 


이자람의 판소리 <억척가>도 억척네에 대한 연민이 크기는 마찬가지이다. 원작의 억척어멈 안나와 비교해보자면 이자람이 만든 억척네 김안나는 너무도 착한 인물이다. 물론 억척네 역시 독하고 때때로 비인간적이다. 전쟁터를 휘저으며 세 아이들과 함께 시체 더미를 뒤져 투구, 장화, 혁대 등을 주워다가 몇 배를 불려서 파는, 인정 따위는 없는 비정한 장사치, 돈의 노예이다. 심지어 그는 소가죽 혁대를 흥정하느라 눈이 팔려, 열다섯 큰아들이 군인으로 징집되어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돈 몇 푼에 정신이 팔린 어머니 덕분에 얼떨결에 군인이 된 아들은, 군대에서 백성들 재물을 노략질하는 일을 억척스럽게 해내어 상관에게 인정을 받는데, 결국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처형당한다. 결국 큰아들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어머니 억척네의 책임이 큰 것이다. 억척네는 작은아들조차 지키지 못한다. 군대의 회계 책임자인 작은아들이 적군에게 잡혀 목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지만, 그 목의 대가로 요구한 재물이 아까워 시간을 낭비하느라 결국 아들은 목이 잘린다.


하지만 <억척가>의 억척네가 원작처럼 두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비정한 어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로 그려진다. 원작의 억척어멈은, 두 아들과 돈이 얽힌 그 에피소드에서도 억척어멈을 훨씬 속물스럽고 비정하게 그린다. 심지어 처녀로 성장한 벙어리 막내딸이 강간을 당하고 들어와도 막내딸이 평소에 갖고 싶어 했던 야한 빨간 구두를 쥐어주며 위로할 정도로 이미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해진 인물이다. 그에 비해 <억척가>의 억척네는 그렇게까지 그악스럽지는 않다. 이 작품은 막내딸의 강간 에피소드 같은 내용은 <억척가>에서는 아예 제거되어 있고, 억척네는 자식의 죽음에 오장육부를 뒤집듯 통곡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억척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억척네를 반성적으로 사유하기 힘들게 한다. 그러기에는 억척네는 너무도 불쌍한 여인네이며,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자람의 선택은 브레히트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브레히트 역시 억척어멈이 자신들 독일인의 모습이라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선택은 그런 억척어멈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속에서 자잘한 이익을 얻으며 살아가는 자신들, 그러나 결국은 자식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는 어리석고 속악한 자신들의 모습을 연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너무도 뼈아프게 자성하도록 만드는 길을 선택한 것이 바로 원작 <억척어멈>이다. 그러나 <억척가>의 선택은 그렇게까지 독하지 못했고, 그래서 억척네에 대한 관객의 연민 덕분에 억척네의 그 억척스러움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억척네가 자식 잃은 피해자인 척하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해자이며 자식들조차 지키지 못하는 비정하고 어리석은 어미이기도 하다는 점을 냉철하게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척가>는 앞의 두 번안 사례에 비해 크게 진전했다. 그것은 억척네에 연민과 동일시의 태도를 갖는 김에, 그 삶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이렇게 비인간적인 억척네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착하고 순종적인 새댁 ‘김순종’으로 살다가 바람기가 있다는 모함을 받고 쫓겨나, 팔난봉 둘째 남편과 폭력적인 셋째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모두 실패하고, 결국 아이 셋만 데리고 행상을 시작한 여자, 작은아들의 시신 앞에서도 죽음이 두려워 아들임을 부인한 후, 본격적으로 비정한 억척네로 변신하는 이야기 등이 꽤나 설득적이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이러한 억척네의 성품과 행동이 비인간적인 환경이 만들어낸 것임을 확연히 드러낸다.


이는 앞선 남성 작가들이 만든 억척네가, 처음부터 그렇게 거친 중년 여인네로 태어난 것처럼 고정화되어 있는 것과 매우 다른 설정이다. 마치 대개의 남성 작가들이,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였던 것처럼 그리는 것과 엇비슷한 태도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다면적인 모습이 그려지지 못하고 비교적 ‘끈질긴 민초의 힘’, 또는 ‘만민을 먹여 살리는 억척스러운 모성’으로 관념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에 비해 <억척가>의 억척네는 애초부터 이런 인간이 아니었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사는 것이 민초답고 어머니다운 삶이라고도 생각지 않게 한다. 마지막에서 억척네는,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억척네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관객에게 던지는 작가의 최종적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브레히트가 요구했던 자성과 깨달음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는다. 브레히트처럼 냉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브레히트 선택이, 폼 나는 원작에 기대보려는 속셈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의 소산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의 시선이 너무 한국적으로 따뜻하여 그 각성의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결함을 용서하게 만드는 것은 이자람의 소리와 괄목상대할 만한 연기력이다. <사천가>에서 흉내 내기에 치중했던 연기가, <억척가>에서는 일관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내는 본격적인 연기로 발전했고, 큰 호흡을 몰고 가는 것도 매우 여유로워졌다. 그런 점에서 <억척가>는 매우 맛깔나고 재미있는 모노드라마이자 일인 음악극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혼자서 두 시간 반 동안 이렇게 다채로운 표현으로 관객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지금의 어떤 광대도 하기 힘든 성취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4호 2011년 7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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