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창작뮤지컬의 흐름
최근의 소극장 창작뮤지컬은 주목할 만하다. 그 안에서 작지만 분명한 어떤 흐름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극장 뮤지컬이 조용히 쌓아올린 성과이기도 하다.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의 공로가 뮤지컬을 고급스러운 대중예술의 장르로 자리매김한 데 있다면,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미덕은 소극장이라는 공간의 논리를 이리저리 활용하면서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그 새로운 흐름은 우선 완성도 있는 이야기에서 감지된다. 특히나 일상의 리얼리티에 토대를 둔 이야기의 진솔함은 소극장 창작뮤지컬이 일궈낸 오롯한 성과이다. <막돼먹은 영애씨>나 <식구를 찾아서>, <6시 퇴근> 등의 주인공을 보라. 찌질하고 비루한 이들의 나아질 것 없는 일상의 모습이 뮤지컬에 넉넉히 담겨있다. 뮤지컬이 본질적으로 리얼리티를 외면하는 장르가 아님을 지금의 소극장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새로운 흐름은 형식의 실험이다. <모비딕>이 대표적이다. 배우가 직접 연주자가 되는 놀라운 형식의 작품인 <모비딕>은 문학 텍스트의 분위기를 음악의 현장성이라는 문법으로 번역해냈다. 이러한 형식적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적잖다. 대중적 장르인 추리극을 뮤지컬 장르의 형식에 맞게 덧입힌 <셜록홈즈>의 솜씨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뮤지컬다운’ 형식이 드라마와 영화를 재료로 삼은 대형 뮤지컬의 완성도보다 훨씬 뛰어났음은 이미 확인된 바다.
이런 작품에서 새로이 반갑게 발견되는 것이 또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배우이다. 노래하는 사람 이전에 연기하는 이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배우. 그래서 이런 작품은 배우의 역량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거나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올해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던 배우들을 떠올려보시라. 그들은 모두 소극장 창작뮤지컬 ‘출신’이다.
불과 이삼년 전만 해도 한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던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작품 목록에 이제는 완성도를 갖춘 작품의 제목이 하나둘씩 쌓이고 있다. 앞으로 뭔가 놀라운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그 공간은 소극장이 아닐까, 기대하게 되는 이유이다.
<블랙메리포핀스>의 미덕
<블랙메리포핀스>도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일상의 리얼리티는 다루지 않지만 추리라는 형식을 빌려 촘촘한 이야기를 구사하고, 그 안에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지한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며, 공간의 언어를 세련되게 구현하는 시청각적 감성이 표현의 좋은 도구가 되고 있다. <블랙메리포핀스>는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자기언어 찾기라는 또 하나의 흐름을 대변하는 작품인 셈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짜임에서나 극 형식의 매무새에서 꽤 안정적인 완성도를 보이는데, 따뜻한 가족극인 <메리포핀스>를 잔혹극으로 뒤집는 이야기의 상상력은 익숙한 콘텐츠를 작가답게 다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동화의 문법을 홀랑 뒤집어버리니 상상력은 잔혹해진다. 배경이 영국에서 독일로 바뀌면서 아이들의 아버지는 나치당의 당원, 보모인 메리는 그 아버지의 조교, 아이들은 실험 대상으로 선택된 네 명의 고아로 설정된다. 사랑받는 아이들? 그런 건 없다. 단지 사랑받고 있다고 속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뿐.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이란 최면을 통해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기억을 조작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일 터. 여기에서 추리극의 틀거지는 상처와 기억이라는 주제로 넘어간다. 기억하지 않음이 삶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출구가 될 수 있을까. 이 극의 주제는 제법 묵직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블랙메리포핀스>의 공간은 여러 면에서 세련되면서도 간결하다. 여러 겹의 격자를 겹친 액자 같은 무대의 틀이 이야기가 파고 들어갈 진실의 겹을 상징하는 시각적 장치라면, 마름모꼴의 회전무대와 조명의 효과적인 개입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출적 장치로 충분히 기능한다. 각각 등장인물의 고유 공간을 설정하는 것이라든지, 마리오네트를 연상시키는 그림자극, 과거와 현재의 전환을 설정하는 방식 등을 보자면 이 작품의 공간 문법은 연극의 그것에 가깝다. 뮤지컬이 발산하는 장르라면 연극은 압축하는 장르일 터. 이 작품의 전개가 다소 무겁게 느껴졌던 것은 이야기 자체의 분위기 때문이거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의 톤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의 연극적인 공간 운용은 극의 정적인 분위기를 부추긴다.
발산하지 않음은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의 음악은 피아노 한 대로 진행된다. 가장 간단한 구성인 셈이다. 선율의 구성도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극적이다. 극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 음악은 오히려 기억에 도드라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중간에 관객의 박수가 끼어들 틈조차 없을 정도로 극이 중심을 이루는 뮤지컬에서 귀에 꽂히는 음악이 나오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작품에서 음악의 역할은 관객의 기억에 자리 잡기보다는 이야기를 좇아가느라 바쁜 관객을 잘 거들어주는 데 있다. 배우들의 집중력 있는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블랙메리포핀스>는 꽤나 괜찮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질적인 성장 계보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 만하다.
엮는 솜씨와 푸는 솜씨
그래도 아직 성근 부분은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와 나치가 시행한 일종의 의학 실험이라는 설정이 추리극의 틀로는 제법 극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 생경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까닭은 주제의식과 극적 설정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을 향해 극이 달려가는 주제는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 기꺼이 동행하겠다’는 것인데, 극적 상황으로만 보자면 불행의 원인은 잔인한 권력이고 기억을 찾을수록 발견하는 것은 나치의 만행 아니던가. 그렇다면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 아이들은 모두 레지스탕스가 됐어야 하는데. 어쨌든 간에 기억을 지키겠다는 아이들의 고백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내면적인 것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대중적인 감성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초반의 설정에 비해 좀, 뻔한 교과서 같다.
결국 실타래를 엮는 솜씨는 꼼꼼한데 그것을 풀어내는 솜씨는 아직 엮는 솜씨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듯하다. 일례로 추리의 단서나 각각의 인물에게 깔린 복선의 분량은 적지 않은데, 이걸 잘 들리지 않는 디테일까지 따라가려니 어느 순간 아차, 정신줄을 놓치면 집중력을 확 잃게 되는 거다. 요나스가 기억을 찾는 계기도 그렇고, 메리가 아이들에게 실험을 한 동기나 그것을 후회하는 과정도 너무 기계적이다. 그러다보니 왜 아이들이 막판에 기억을 붙잡으려고 했는지 모호하다. 마지막 결론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군데 놓여 있는 셈이다.
이뿐 아니라 사실 이 작품에는 <쓰릴 미>등 다른 작품을 연상케 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이 작품이 새로우면서도 익숙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메리포핀스>는 소극장 창작뮤지컬이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완성도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창작의 역량이 다음 작품에서도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소극장 창작뮤지컬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진다.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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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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