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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조로> 쾌걸, 드라마와 쇼 사이에서 길을 잃다 [No.99]

글 |정수연(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쇼팩 2011-12-12 5,236

때로는 공연의 내용 자체보다 공연이 회자되는 방식을 통해 그 공연의 정체성이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다. 뮤지컬 <조로>도 그런 경우인데, 뮤지컬 배우가 배우 개인의 존재감 자체로 이미 내용이 되어버린 경우라고나 할까. <조로>가 하반기 최대의 화제작으로 이야기됐던 까닭을 되짚어 봐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새로운 뮤지컬의 제작이 많지 않은 시기에 국내에서 공연된 적이 없었던 작품을 작지 않은 규모로 제작한다는 소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작품이 관객의 시선을 끈 가장 큰 이유는 ‘조승우가 선택한 작품’이라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단정적이기는 해도, 이 작품의 성공 열쇠는 바로 ‘조승우’에게 있는 셈. 이때 중요한 것은 ‘조승우’가 얼마나 잘하느냐의 여부와 함께 그가 얼마나 멋지게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게다. 어쩌면 고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연기하는 배우가 돋보이려면 드라마의 길을 가야 할 것이고, 배우의 개인적 매력이 돋보이려면 쇼의 길로 가는 게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갈래로 볼 때 <조로>의 정체성은 애매모호하다. 언뜻 이 작품은 드라마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영웅 스토리의 틀거지에 충실하니, 철없는 듯하지만 밝고 경쾌한 정의로운 청년이 자신의 정체를 복면과 망토에 가린 채 권력에 눈이 먼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 그 사이에 달달한 로맨스는 기본 옵션이다. 이런 이야기는 장르의 공식에 충실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것만 잘 따라간다 해도 영웅 스토리로서의 이야기가 부실해질 염려는 없다. <몬테크리스토>를 비롯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라. 평범한 주인공이 원치 않게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성과 악당을 물리치는 통쾌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사랑, 이런 조건을 그럴듯하게 이어주고 채워내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드라마의 밑그림은 웬만큼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로>가 그 밑그림을 잘 그려냈다고 선뜻 말하기는 어렵다. 사건의 중요한 축으로서 갈등의 계기는 설명되는 바 없고(주인어른의 오른팔이었던 라몬이 왜 갑작스레 악당으로 돌변하는지 별것도 아닌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세 시간을 기다릴 것!), 장면의 분위기는 일관성 없이 갑작스레 뒤섞이며(민중이 봉기하는 심각한 장면에서 가르시아와 디에고가 연애 상담을 하는 뜬금없음이란!), 1막과 2막 사이에 갑자기 인생관이 달라져버린 캐릭터의 설득력 없는 변화와(우스운 감초에서 갑자기 사랑의 전령, 혁명의 투사로 거듭난 우리의 가르시아!), 중심 이야기와 부수적 이야기 사이의 불균형한 배치(조로와 루이자의 사랑보다 가르시아와 집시여인의 사랑이 더 비극적이다!) 등등, 전형적인 영웅 이야기의 최대 장점인 판타지를 이 작품에서 즐기기란 생각 외로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이 작품의 이야기와 장면 구성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억지스럽다. 조로의 등장 한 방에 갑자기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 봉기의 횃불을 든 군중이라는 설정도 그렇지만, 그 앞에서 곱게 드레스 차려 입은 루이자가 독재자를 훈계하는 그림도 자연스럽지 않은 식이다. 2막이 시작될 때 사람들이 부르는 처절한 선율이 이야기 속의 압제와 맞닿지 않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일 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인 디에고, 곧 조로의 캐릭터가 그다지 멋지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비극성이 장르의 공식에 맞도록 개연성 있게 제시되지 못할 때 그 비극을 떨치고 일어나는 영웅의 색깔이 바래는 것은 당연한 귀결 아니겠나. 집시의 흥취와 복면의 어두움이 공존하는 쾌걸 조로의 진가가 발휘되려면 행복에서 불행으로,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드러냄에서 감춤으로 이행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잘 연결되도록 극의 이음새가 더욱 꼼꼼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의 <조로>는 드라마 중심의 공연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조로>는 쇼 뮤지컬에 더 가까운 걸까? <조로>에서 쇼의 정체성을 찾자면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춤일 게다. 화려한 플라멩코의 군무는 극 전반에 걸쳐 가장 자주 나오는 에너지 넘치는 장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배우들의 생기가 흘러넘치는 무대를 보는 흥겨움이란. 하지만 <조로>의 쇼를 이끄는 주력 부대가 플라멩코 군무라면 이 무대는 좀 더 치밀해질 필요가 있다. 배우들의 에너지는 분명 감동적인 것이었지만 그 에너지의 과잉이 가끔은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함으로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배우들의 소리와 몸짓은 종종 장면의 감정을 넘어섰다.


쇼가 되기 위해 치밀해져야 하기는 액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부적으로 액션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는 무술에 일자무식인지라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로의 신출귀몰이 볼만한 ‘쇼’가 되어야 함은 관객으로서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바이다. 하지만 조로가 보여준 가장 큰 ‘쇼’인 밧줄 타기 인심은 너무 야박했으니, 무대를 가로지르는 통 큰 횡단 한 번에 객석 2층에서 무대로 뛰어내리는 빨랫줄 타기 신공 한 번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적어도 쇼 뮤지컬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조로는 물론이요 조로를 잡으러 다니는 악당의 부하들도 무대 위에서 한참 더 붕붕 날아다녀야 할 터.

 


무엇보다 이 작품이 쇼 뮤지컬로서 정체성을 부여받기 어려운 이유는 음악의 개입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장면을 선도하는 음악이라기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고, 장면을 구성하는 음악이라기엔 그 분량이 많지도 않다. 쇼 뮤지컬이라고 보기에 <조로>는 애매하다.


드라마와 쇼 사이에서 작품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배우들의 연기 또한 애매해져 버리고 말았다. 드라마 위주의 극이라면 배우는 극 속의 캐릭터로 몰입해 들어가야 할 테지만, 쇼가 중심이 되는 극이라면 배우는 관객을 직접 마주대하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기를 맘껏 발휘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보니 배우들의 연기는 조화를 이룬다기보다는 각자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례로 라몬 역의 문종원은 역할에 지나칠 정도로 몰입하는 반면, 조로 역의 조승우는 디에고와 조로라는 역할의 사이보다는 무대와 객석 사이를 더 재미나게 넘나든다. 이런 자질들은 모두 배우에게 좋은 덕목이지만 작품 안에서의 조화를 획득하지 못할 때 진지함은 과도함으로 부자연스러워지기 십상이고 재기발랄함은 극의 진지함을 방해하는 산만함과 구별되지 않게 마련이다. 비장한데도 약간은 우습고, 발랄한데도 마음은 확 끌리지 않는다고나 할까.


무대도 이런 애매모호함을 넘어서진 못했다. 수직적인 동선을 확보하려는 듯 높이감을 강조한 무대는 드라마를 위한 무대로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으니, 너무 높은 라몬의 방 앞에서 배우들은 너나없이 작아질 뿐이고, 상자곽처럼 생긴 루이자의 방에 병사들이 들이닥칠 때 숨이 막혔던 것은 극의 긴장감 때문이 아니라 무대의 턱없이 작은 사이즈 때문이었으며, 조로의 상징인 ‘Z’를 불쇼로 승화시킨 네모난 프레임은 그 직설적인 무대 화법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조율자로서의 연출은 어디에 있나. 작품을 보고 난 후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세 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에 비하면 <조로>의 이야기나 볼거리는 아쉽다. 반짝반짝 빛나는 배우들이 모여서 이렇게 평범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더 아쉽다. ‘레전드 오브 조로’를 외치지만, 이번의 <조로>는 레전드가 될 수 없음을 더더욱 아쉽게 가슴에 담아두련다. ‘레전드’라고, ‘저길 봐!’라고 소리 높여 말하지 말고 이야기로, 장면으로 차분히 보여주시길. <조로>가 진짜 레전드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9호 2011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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