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비교적 안정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중 회전무대를 활용한 역동적인 동선과 유럽 건축의 고전미를 그려낸 무대와 영상의 조화, 엘리자베트 형상의 전환 막과 무대를 가르며 침입하는 ‘죽음의 길’까지. 공간 연출을 다채롭게 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엿보였다. 오리지널 비엔나 버전의 무대보다는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배경 설명을 위한 긍정적인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화려한 의상이나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더욱 부각시켰다. 19세기 말이란 시대와 중부 유럽권이라는 지역 특색 때문인지 복식사적으로 지역과 시대가 혼재하지만 유럽의 동경을 끌어내는 데 무리는 없었다. 게다가 배우들의 탁월한 기량까지 가세하며 뮤지컬 <엘리자벳>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사적인 영역에 머문 드라마
이런 든든한 안전장치에도 작품은 후반으로 갈수록 계속 늘어져갔다. 작품상 가장 큰 주제는 ‘자유’다. 자유 대 통제라는 갈등은 엘리자베트와 대공비 소피의 갈등으로 대표되어 ‘시골 소녀 궁중 격돌기’를 충분히 그려냈다. 또한 궁중 드라마의 내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들의 굶주림, 헝가리의 독립과 저항 등이 단순한 배경을 넘어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역사 드라마가 목표는 아니었는지 헝가리의 자유 독립을 지지하는 듯한 엘리자베트의 행보는 특별한 갈등 없이 헝가리의 통치자로 임명되면서 사라진다. 황태자 루돌프에 의해 다시 한번 헝가리 독립이 다루어지긴 하지만, 부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들의 개인적 충동으로 끝나고 만다.
역사 드라마로서의 진행을 멈추자, 합창 등으로 거대해진 음악의 뿌리가 부실해졌다. 귀족들이나 민중들의 외침이 배경으로만 그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리자베트가 그토록 반복하는 ‘자유’가 지극히 개인적인 낭만이 되어 버린다. 대공비 소피와의 갈등마저 단순한 궁중의 고부갈등이 된 것도 아쉽다.
큰 얼개로서의 문제는 엘리자베트를 암살한 이태리 무정부주의자 ‘루케니’의 설정에도 드러난다. 자신이 암살한 게 아니라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루케니를 엘리자베트의 생애에 깊이 관련된 인물로 이해하게 한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루케니는 그저 우연한 암살자일 뿐이다. 엘리자베트와 대립하고 갈등하거나 신뢰와 배신으로 얽히는 등의 드라마는 애초부터 없다. 그저 주변부일 뿐이기에 굳이 ‘엘리자베트가 죽음을 사랑했노라’며 당당하게 주장하는 진술이 허황되게 들린다. 목을 매는 죽음에도 극적인 힘이 적다.
이 같은 문제들은 2막에서 주로 드러난다. 1막이 자유를 갈망하던 소녀가 궁중에서 격돌하며 자유를 선언하는 데 집중한다면, 2막은 그 양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갈등이 발전해야 했다. 하지만 2막의 모든 인물들은 극적 행동을 미루고 지속시키질 못한다.
엘리자베트에게 밀린 대공비 소피의 새로운 계략으로 엘리자베트가 스스로 궁을 떠나게 되지만, 더 이상의 전개는 없다. 대공비 소피의 천하 제패도 아니고 그저 황제 요제프의 푸념만 듣고 극 행동을 끝내버린다. 궁을 떠나 여행하는 엘리자베트 또한 뚜렷한 목표도 없고 드라마적인 진전 없이 자유만 노래할 뿐이다. 물론 장성한 황태자 루돌프가 2막에서 핵심 인물로 부각되지만, 황제와의 일시적인 갈등만 만들 뿐 엘리자베트와의 적극적인 갈등은 만들지 못한다. 결국 루돌프는 드라마를 더 키우지 못하고 자살로 끝맺는다. 시종일관 낭만적 사랑만 부르짖는 황제 요제프에다, 루케니의 우연한 암살까지 합세하자, 2막은 드라마로서 완결이 안 된다. 1막이 궁 밖에서 궁 안으로 들어와 좌충우돌하는 극적 흥미가 많은 것에 비해, 엘리자베트가 궁 안에서 궁 밖으로 향한 후 뚜렷한 갈등이 없다. 2막이 극적 흥미가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물은 목표를 지향하며 행동하고, 그 행동이 사건을 만들고 다른 인물들의 행동을 자극하는’ 기본적인 드라마 공식에서 2막은 많이 비껴 서 있다.
허구(Fiction)보다 어느 정도의 사실(Fact)에 기대야 하는 태생적인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자유’에 역사적 정의를 부여하기엔, 그녀는 민중들의 굶주림에도 우유 목욕으로 치장하는 어쩔 수 없는 왕비 신분이다. 또한 다른 인물들과 접촉을 끊고 여행만 하는 엘리자베트, 우연히 암살되어 버린 엘리자베트란 역사적 사실에 기댄 채 극적 행동을 끌어낸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자, 그 이후로는 상복만 입었다는 사실에서 아들과의 관계를 좀 더 허구화한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허구로 ‘죽음’을 설정하듯.
작품에서 가장 부각된 ‘죽음’이란 설정은 실은 다소 전형적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흑조처럼 인물들을 맴돌고,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인처럼 운명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죽음이 상징하는 파괴적 충동이나 성적 욕망, 심지어 작품이 목표하는 ‘영원한 자유’로 구체화하기엔 부족하다. 게다가 ‘죽음’과 엘리자베트의 갈등 또한 부족해서 그저 첫사랑의 순애보만 계속될 뿐이다. 갈등 없이 ‘지극히 그리워하다 사랑을 이뤘다’로는 드라마가 너무 단순해진다.
다채로운 음악 구성에 비해 반복되는 노래들
씨줄인 드라마에 이어지는 날줄인 음악에도 호불호가 나뉜다. 우선 쉽고 대중적인 선율.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낯선 드라마에 진입하는 좋은 여건이 되어주었다. 또한 인물 성격만큼 다양한 음악 색채. 엘리자베트에 대비되는 대공비 소피, 삼각축(요제프와 죽음, 루케니)이 각자의 색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또한 드라마적인 뿌리는 적지만 다이내믹을 안배한 합창-중창-독창의 배열 또한 다채롭다. 또한 록 스타일까지 편성을 확대한 시도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반복적인 음악은 문제다. ‘인물은 두 번 다시 같은 상황과 같은 심정을 갖지 않으므로 음악적인 리프라이즈(반복)는 있을 수 없다’는 뮤지컬 아티스트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 작품은 끝없는 반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음악적 구조를 위해선 모티브의 반복과 변주는 그 얼개로서 당연히 필요하다. 다만 <엘리자벳>은 대사를 줄이고 노래로 드라마를 끌고 가려다보니, 같은 인물이 비슷한 상황만 만나면 무조건 멜로디를 반복시킨다. 특히 2막에선 1막의 멜로디들이 계속 되풀이되어 극 전개도 느린 상황에서 음악마저 맴도는 듯 느껴진다.
한편, 한글 가사상의 문제도 보인다. 흔히 독일어 뮤지컬 가사에서는 und(and) 등의 접속사, der/die(the) 등의 정관사, aus(from) 등의 전치사가 약박음으로 악절의 시작에서 다음 말을 강조한다. 그런데 한글 가사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음절로 단어를 시작하면, 강약이 뒤바뀌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Alle Fragen Sind Gestellt (모든 질문은 던져졌다)’에서 ‘모든’, ‘아무’, ‘출구’, ‘마지막’, ‘도덕’, ‘저주’ 등(인터넷상 가사 참조) 악절의 시작 가사들은, 전부 두 번째 음절만 강조되고 있다. 더불어 가사가 시적 은유와 압축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직설적인 산문 문장으로 그치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원작상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열연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배우들의 탁월한 기량으로도 무대는 가득 찼다. 특히 엘리자베트는 자유를 주장하고 슬픔을 노래하는 미모의 황후라는 하나의 이상을 그려냈다. 특히 다소 남자 스타에 종속적인 뮤지컬 여성 관객들에게 황후 엘리자베트(김선영, 옥주현)는 충분히 동경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뮤지컬 지형에 자그마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귀결이 어떻든 긍정적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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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2호 2012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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