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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뮤지컬 인사이드] <왕세자 실종사건> 아쉬움으로 다음이 기대되는 도전 [No.87]

글 |박병성 사진제공 |극단 죽도록달린다 2010-12-07 5,124

극단 ‘죽도록 달린다’는 무대 위를 말 그대로 죽도록 달리는 배우들의 에너지로 극장을 가득 채우는 독특한 스타일을 통해 자신만의 양식을 개발 중인 젊은 극단이다. 서재형 연출, 한아름 작가 콤비(둘은 부부이다)를 중심으로 매해 흥미로운 작품을 올리고 있는데, 이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왕세자 실종사건>을 뮤지컬로 각색하여 선보였다. 궁궐에서 왕세자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 왕과 왕비 그리고 궁녀인 자숙과 내관인 구동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밝혀진다. 혼란 속에서 왕세자를 찾으려는 노력은 실종되고 자숙과 구동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서재형 연출에게 작품에 관해 들어보았다.

 


댄스컬이나 오페라 작업을 했지만, 이번 작품같이 정통 뮤지컬은 처음 신고식을 치렀어요. 뮤지컬을 작업한 소감은?
뮤지컬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인 거 같아요. 이런 이야기 많이 했는데 뮤지컬은 연극에 음악을 입힌 것이라고 봤어요. 그 반대가 오페라이고. 이번 작품은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서 음악적인 배려를 좀 더 많이 한 정도에요. 뮤지컬을 한다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단지 스태프가 많아지고 제작 규모가 커졌다는 측면은 있지만.

 

극단 ‘죽도록 달린다’의 작품에서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죽도록 달립니다.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번 뮤지컬에서도 여전해요. 그러한 양식은 어떻게 개발된 것인가요?
제가 배우들이 쉬는 것을 못 봐요. 배우들을 쉴 수 없게 하기 위해 그런 방식이 생겼다는 말이 아니에요. <죽도록 달린다>, <왕세자 습격사건>, <릴레이>, <호야>까지가 우리 초기 작품이에요. 그때는 우리 극단의 철학이 땀의 미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때였어요. 관객이 공연장에 와서 공연을 보는 이유는 스토리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행위 하는 자들이 얼마만큼 진정성 있게 하느냐에요. 이게 우리 집단을 차별화할 수 있는 무기였어요. 그러면 배우들이 쉬고 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 그래서 배우들을 강제로 무대에 등장시키면서 발견해낸 양식이죠. 우리 공연을 본 분들이 ‘최선을 다한다, 힘들겠다, 열심히 한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내게는 최고의 상찬으로 들려요. 우리가 많은 비용을 들여 작품을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땀을 통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게 우리 단체만이 줄 수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철학이 스타일을 만들어낸 셈이군요. 배우들이 무대 위를 뛰면서 발산하는 에너지 때문에 관객들도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왕세자 실종사건>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배우들의 양식적인 등퇴장이나 무대 위에서 움직임이 마치 체스판 위의 말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발견됐어요. 체스의 개념을 두고 한 것은 아니에요.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답사를 가보면 대리석처럼 깨끗한 평면은 아니지만 궁궐 바닥이 네모반듯해요. 그것을 무대 위로 옮기면서 정형화시킨 것이죠. 궁궐도 위에서 보면 네모가 아닐까요. 큰 틀에서 보면 건물이라는 게 거의 네모이고 그런 이미지를 압축시키다 보니까 체스판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반대로 ‘왕세자가 사라졌다’를 부르는 장면은 굉장히 많이 움직이면서 노래를 해서 너무 복잡했는데, 체스판처럼 미리 배우들의 움직임을 만들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어요. 동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무 같은 것이죠. 나머지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했어요.

 

직각으로 꺾으면서 걷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고 양식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도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었군요.
정말 그렇게 되요. 배우들과 궁궐에 답사 가면 그때 확실히 이해를 해요. 마루를 따라 걷다 보면 직각으로밖에 못 걸어요. 대비는 있어요. 궁 사람들이 직각으로 움직이는 반면 구동이와 자숙이는 될 수 있으면 직각을 피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했어요. 다 답사와 공부의 결과물이에요. 시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역사 공부를 안 한 건 아니에요. 역사책을 수백 권 구해 봐야 했어요. 왜냐하면 조선 시대의 공통적인 모습을 만들어야 하니까 거꾸로 공부 양이 더 필요했던 거죠. 통사를 읽고 왕이나 후궁의 이야기들, 족보도 다 봤어요. 공부해서 얻었던 것들의 이미지들을 함축해서 보여준 거예요.

 

무대에서 잘 활용하지 않은 플래쉬백이나 재현 장면 등을 적극 활용했는데 영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아름 작가의 극본에 들어있어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되게 써줘요.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죠. 배우들과는 논리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디렉션을 줄 때 왕왕 영화 장면을 예로 든다거나 할 때가 있어요. 한 작가가 주는 상상력과 저의 연출력이 만나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죠. 근데 만들 때는 그게 영화적인지 어떤지 잘 몰라요. 

 

 

반복되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추리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어요.
이 극의 주인공은 아닌데 최상궁이란 인물이 굉장히 중요해요. <왕세자 실종사건>이 80점을 맞았다 그러면 최상궁이 한 연기가 80점인 거예요. 추리극의 요소가 최상궁의 엉뚱한 상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최상궁을 맡은 배우가 이해를 못하거나 잘못 전달하면 기본 구조가 무너져서 관객들이 따라오기 힘들게 돼요. 조역이긴 한데 구동, 자숙으로 포커스가 옮겨 가는 마지막 장면 전까지 그녀가 공헌하는 바가 아주아주 커요. 최상궁은 극을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그 역을 맡는 배우들이 ‘중전이 있는데 상궁인 내가 이렇게 주도적으로 해도 되나’ 확신을 잘 못해요. 맞다고 계속 확신을 줘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대부분 공연을 하다보면 확신이 생겨서 굉장히 좋아져요.

 

보통의 추리극은 ‘누가 범인일까?’ 혐의의 대상이 옮겨지면서 긴장감을 주는데, 이 작품은 ‘누가 왕세자를 유괴했는가’에서 ‘자숙을 누가 임신시켰는가’로 질문 자체가 옮겨 가요. 그런 점이 재밌었어요. 연극에서는 왕세자가 유괴되었다는 것을 잊고 지내는, 즉 본질을 잊고 산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부각되었다면 뮤지컬에서는 자숙과 구동의 러브 스토리가 강조되면서 그러한 것들이 약화된 것 같아요.
제목이 제일 큰 주제죠. 촌스러워도 ‘살구 사랑’ 이래야 맞는 거죠. 사실 살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엉뚱한 일만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소소한 것부터 원래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않고 사는 것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자는 의미에서 제목도 ‘왕세자 실종사건’으로 정해서 관객들을 속인 거죠. ‘왕세자 살종사건’인데 관객들이 본 것은 구동과 자숙의 사랑 이야기잖아요. 작품 속 인물들이 왕세자 실종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관객들도 본질을 까먹고 있었던 거죠. 어! 우리도 속은 거 아니야?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어요. 우리가 잊고 지낸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순수한 사랑 같은 게 아닐까. 뮤지컬에서는 우리가 잊고 사는 ‘순수한 사랑’을 강조한 것이죠. 연극에 비해 뮤지컬에서 사랑 이야기에 중심을 둔 것이 가장 큰 변화에요. 그런데 그러고 났더니 오히려 본질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더 잘 보이더라고요.  구동과 자숙의 사랑도 더 잘 보이고, 잊고 있다는 사실도 잘 드러나고. 연출가로서는 만족스러웠어요.

 

관객들은 자숙과 구동의 사랑이 부각되어서 자신들이 본질을 잃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하지 않을까요.
자신들이 본질을 잊고 있다는 것까지 모를 수 있지만 적어도 ‘왕이나 왕비가 왕세자를 잃어버린 걸 잊고 있었구나’라는 걸 확실하게 인식하죠.

 

 

 

 

 

 

 

 

 

 

 

 

 

 

 

 

 

 

 

 

 

 

 

 

 

 

 

구동과 자숙의 사랑이 잘 표현됐어요. 구동이 살구를 따기 위해 애를 쓰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처음에는 한두 번 (나무를) 차고 마는 식으로 연출을 했더니 한작가가 자신이 생각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한 8분 정도는 따려고 애쓰는 장면을 생각했대요. 그걸 얼마나 따주고 싶었겠냐고. 그래서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싶었어요. 연습 때 그 장면을 마음껏 해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애를 써서 따려고 하는 배우가 있었어요.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그 장면은 제가 만들었다기보다는 한 작가와 그 배우가 준 이미지를 수정 가공해서 만든 거예요.

 

본질을 잃고 사는 이야기, 순수한 사랑, 그러한 이야기를 궁궐을 배경으로 한 이유가 뭔가요?
저희 작품들이 궁이나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많아요. 궁이라는 곳이 계급이 명확하니까. 지금의 이야기를 하기가 좋아요. 강변 아파트 32평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이 인생의 절정기이고, 또 어떤 사람은 거기가 출발선일 수 있어요.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동등해 보이지만 거기에도 계급이 있거든요. 현대 사회는 계급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데 궁은 그런 것들이 명확하니까 궁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지금의 이야기를 조선 언제가 아니라 조선이란 껍데기를 씌워서 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니까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요.
작품을 만들 때 피맛골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피맛골은 서민들이 사대부들이 지나가는 큰 길을 피해서 뒷길을 오가면서 주막에서 술 한잔하고 그러던 곳이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없어지고 우리가 좋아하는 낙지 집이 빌딩 안에 들어가 있잖아요. 난 이런 것이 슬퍼요. 지금도 그 낙지 집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야 된다고 믿어요.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고 500년 동안 지켜온 것이잖아요. 이것이 구동, 자숙이의 이야기라고 믿는 거예요. 우리가 잃어버린 피맛골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순수한 사랑, 구동이와 자숙이가 나누는 순수하고 순박한 모습이 남아있길 바라는 거죠.

 

이 작품을 왕이 구동과 자숙에게 행하는 폭력의 관점에서 본 리뷰를 봤는데,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생각이 좀 달라요. 왕비나 왕 역시도 각각의 위치 때문에 생기는 아픔이 분명 드러나거든요. 궁궐이라는 체계에서 오는 시스템적인 문제라고 보는데 어떠세요.
두 가지 문제를 다 가지고 있죠. 배우들하고 각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계급적인 것을 당연히 얘기 안 할 수는 없죠. 연극할 때 그런 고민을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런 고민은 이미 우리 몸속에 체화되어 있다고 봐요. 그래서 한 작가가 왕을 희화화하는 걸 싫어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왕도 웃길 수 있다, 왕이니까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 수 있는 거다, 손만 내밀면 다 잡을 수 있는데 오죽 좋으면 그러겠냐고. 지금은 한 작가도 좋아하는 거 같아요.


임신 그리고 정표로 살구가 큰 역할을 해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노랫말이 있잖아요. 예전에는 살구가 지천으로 있었대요. 살구 때문에 논란이 많아요. 살구나무는 원래 가늘다. 그렇게 큰 살구나무가 어딨냐. 지적해주신 어른들이 많았어요. 별 이야기가 다 있었어요. (다른 것은 어떤 게 있나요?) 궁에서는 개를 안 기른다. 사적을 찾아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궁궐에서 모자를 안 쓰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냐? 왕이 상스럽게 ‘더위 먹었소’라는 말을 하느냐 등등 욕을 많이 먹었죠. 그런데 그렇게 글자 안에 갇혀서는 극을 만들 수가 없어요. 정해진 논리 안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안에서 맞는 걸 찾아 만드는 것이 극이잖아요. 시간이 지나니까 다 이해가 됐어요. 시작할 때는 ‘퓨전 사극’이란 말을 잘 안 썼죠. 극 제목에도 ‘사건’이란 말을 잘 안 쓰고요. 남들이 안 할 때 이상한 짓을 많이 했던 거죠. 그래서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작품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죠. 지금쯤 되니까 이런 건 노멀한 게 되어 버렸잖아요.

 

다른 작품들도 있었는데 왜 <왕세자 실종사건>을 뮤지컬로 만들 생각을 했나요?
뮤지컬로 만들기 제일 어려운 작품이니까. 도전 의식이 발휘된 것이죠. 한 작가도 괜찮겠다고 추천해줬지만 연출가 입장에서 도전 의식이 생겼어요. 그냥 뮤지컬로 만들기는 <호야>나 <청춘 18대1>이 쉽죠. 구조 자체가 순환 구조가 아니라 단선 구조이기 때문에 노래를 넣기도 쉽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대중적이고. 쉽게 가고 싶지 않았어요. 3~4년 전부터 저나 한 작가나 뮤지컬 위주로 공연을 봤는데 그대로 답습하기 싫은 연출가의 고집이 있었어요. 처음 시작인데 조금은 뿔난 애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싶었죠. 뿔은 나중에 잘라낼 수 있으니까.

 

‘뮤지컬적이지 않다’, ‘음악극인지 뮤지컬인지 모르겠다’ 음악에 대한 지적이 많았어요.
연출가로서 황호준 작곡가의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어요. 처음에는 작품 전체를 음악으로 꾸미는 것을 꿈꿨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희곡이 지닌 구조적인 어려움이 있었어요. 대사로는 전할 수 있는데 음악으로 전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지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거죠. 그래서 작업 전환을 했죠. 극의 마지막 15분은 브릿지 대사 한두 개만 빼면 거의 성스루(sung-though)거든요. 음악으로 풀어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음악은 너무 캐주얼하거나 귀에 남는 음악보다는 드라마에 방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작곡을 했어요. 중요한 것은 구동과 자숙이의 사랑인데 음악 때문에 드라마를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음악이 들어와서 드라마의 흐름이 끊기거나, 반복되는 느낌을 준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추구하는 방향과 반대잖아요.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것이죠. 세 가지 꿈이 있었어요. 하나는 먼저 말한 소극장에서 성스루로 만들겠다였고. 뮤지컬을 보면서 뮤지컬 배우들이 노래를 90으로 생각하고 연기는 10 정도로만 여기는구나 싶었어요. 노래를 잘하는 배우들이 연기도 잘하는 작품을 만들겠다가 또 하나의 꿈이었어요. 나머지 하나는 뮤지컬 제작이 과포장이 되어 있잖아요. 어렵겠지만 적은 자금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중의 두 개는 어느 정도 실현된 거 같아요. 좀 더 음악적으로 좋게 들릴 수 있었는데 노래가 조금 부서져도 연기 안에 노래를 넣도록 했어요. 노래 연습은 거의 안 시켰어요. 플랫, 음이 안 맞아도 된다고 했어요. 노래에 빠져 있기보다 정서를 강조했거든요. 작곡가님이 유별나게 좋으신 거 같아요. 어느 순간 인정해주시고 제 의도에 맞게 곡을 바꿔주셨어요. 지금 아무 문제없이 만들었으면 저희가 또 할 일이 없겠죠. 한 작가와 이야기했어요. 런던이나 뉴욕 뮤지컬하고는 다르겠지만 우리들의 뮤지컬을 만들 수 있겠다. 이렇게 가면 또 무슨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작업자들끼리 공유되는 것이 있어 행복하다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7호 2010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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