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지방 도시에서 다섯 명의 창녀가 살해되었던 연쇄 살인 사건을 뮤지컬로 구성한 <런던 로드>가 지난 4월 14일 영국국립극장 Royal National Theatre 의 코테슬로 소극장에서 개막했다. 실제 사건과 주민 인터뷰에 기반을 둔 일종의 ‘다큐멘터리 뮤지컬’로, 공연 내내 특이한 형식의 노래들이 이어지는 <런던 로드>는 6개 주요 일간지에서 모두 최고 평점인 별 다섯 개를 받으며, 6월 말까지 전 공연 매진의 신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참혹한 연쇄 살인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런던 로드’는 런던에서 몇 시간 떨어진 소도시 입스위치에 있는 거리로, 젊은 여자 다섯 명이 차례로 살해되었던 연쇄 살인 사건의 현장이다. 낮에는 조용한 일상이 되풀이되는 여느 곳과 다름없는 조용한 주택가였지만, 밤이면 젊은 여자들이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승용차를 대상으로 호객 행위를 하던 홍등가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대부분 마약중독자들로 약값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영국의 어린 백인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이 한 명씩 변사체로, 그것도 나체로 마을 외곽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2006년 12월 초의 일이었다. 열흘 사이에 며칠 간격을 두고 한 명씩 차례로 죽음을 당하자, 인근 주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이는 일명 ‘입스위치 연쇄 살인 사건’으로 곧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다. 더구나 희생자들이 불법 영업을 하던 창녀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현대판 ‘잭 더 리퍼’의 출현에 언론이 들썩였다.
가장 타격을 받은 이는 동네 주민들이었다. 원래 우범지대로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홍등가이자 연쇄 살인 현장으로 떠오르면서 동네는 마약과 매춘의 소굴 즉, 현대사회의 악의 상징이 되었다. 더구나 살해 현장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경찰들이 북적거리고,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러 몰려들었다. 이렇게 전국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범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주는 보상금은 6억 원(30만 파운드)까지 올라갔고, 무려 650명의 경찰이 수사에 투입되었다. 마지막 피해자의 사체가 발견된 지 일주일 만에, 그곳에 이사 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중년의 트럭운전사 스티븐 라이트가 범인으로 체포되었고, 이틀 후 종신형을 선고 받으며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렇게 불과 20일 만에 런던 로드는 전국적으로 악명 높은 거리가 되었고 그 상처는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다. 2010년 BBC에서는 <다섯 명의 딸들> Five Daughters이라는 제목으로 런던 로드 살인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드라마로 방송하기도 했다.
이렇게 암울한 살인 사건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면서, 작가 알렉키 블라이스 Alecky Blythe 와 작곡가 아담 콜크 Adam Cork 는 몇 가지 이색적인 방식을 택했다. 첫째, 작품의 주인공은 살인범 스티브 라이트도, 희생된 다섯 명의 여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는 <런던 로드>의 주인공으로 동네 주민들을 택했다. 특별한 대표 인물 없이 하나의 그룹으로서 주민 전체가 함께 내레이터이고, 스토리텔러이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차례로 나와 사건의 전말과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면서, 살인사건을 통해 겪게 된 여정을 한 편의 뮤지컬로 구성했다. 먼저 한 명이 나와 노래를 시작하면, 다음 사람이 이어받거나, 합세를 하면서 듀엣이 되고, 한 사람이 더 나와 삼중창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합창곡이 된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거의 모든 곡이 솔로 부분으로 시작하지만 완전한 솔로곡은 단 한 곡도 없다. 결국에는 모두 컴퍼니 넘버, 즉 전 출연진이 함께 부르는 합창곡으로 발전한다. 물론, 동네 사람들이 뮤지컬에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뮤지컬 <유린타운>에서는 공중 화장실의 유료화 문제를 놓고 데모를 하는 미국의 한 마을 주민들이 대거 등장하고, <베이커의 아내> The Baker’s Wife 에서도 신선한 빵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네 사람들이 다른 동네에서 제빵사를 데려오고, 그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도망가고 나서, 실의에 빠진 제빵사가 빵을 굽지 않자 동네 사람들이 수색대를 조직해 그녀를 잡아오는 등 주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유린타운>에는 분명, 내레이터 록스톡과 리틀 샐리가 불의에 맞서 싸우는 군중들을 리드하는 해설자 역할을 했고, 또한 공중 화장실을 운영하는 회사의 CEO, 클래드웰이 사악한 자본가로서 악당의 역할을 했다. <베이커의 아내>는 사실, 동네 사람들이 거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제목부터 그러하듯 스토리의 초점은 제빵사와 그의 아내이다. 물론 그러한 등장인물의 비중상의 불균형 때문에 작품에 구조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서 <런던 로드>는 11명의 마을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 런던 로드의 ‘이웃 지키기’ 모임의 회장을 맡은 론과 그의 아내 로즈메리, 그리고 행사 담당인 줄리, 사무국장 헬렌과 그의 남편 고든, 이사를 맡고 있는 젠과 팀 부부, 회원인 도지, 그리고 그 동네 토박이들인 테리와 준 부부, 마지막으로 정원을 가꾸는 데 재주가 많은 원주민 알피까지, 모두 11명이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맡은 11명의 배우들이 비중이 적은 나머지 주민들과 경찰들, 기자들까지 총 55명의 추가 역할을 나누어 일인 다역으로 연기한다.
<런던 로드>를 이색적인 뮤지컬로 만드는 또 한 가지는 음악적 스타일이다. 매우 연극적인 현대음악으로, 재즈 스타일과 록 스타일을 곁들여 가며 목관악기 위주의 6인조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 자체는 크게 별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가 매우 심상치 않다. 런던 로드 ‘이웃 지키기’ 모임의 회장이, ‘안녕하세요, (한 박자 쉬고),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순간부터 거의 모든 대사는 미묘한 리듬감을 가지고 전달된다. 말을 하는 듯하다가 중간에 한두 음절만 살짝 노래처럼 톤을 올렸다 내린다. 일종의 랩 같기도 하지만, 랩이라고 하기에는 대사에 너무 가깝다. 그리고 중간에 ‘음…’, ‘저…’ 하고 말문이 막힌 것을 표시하는 ‘에-저-또’류의 휴지 Pause 가 너무 많다.
그런데 같은 문장을 다른 배우들이 똑같이 따라하면서, 거의 9번 정도가 반복되면, 이 모든 반복구가 철저히 계산되어 악보화된 것이 분명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 반복구는 말을 하듯 매우 자연스러운 대사이면서도 특유의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과정으로 동시대적인 레치타티보가 탄생한다. 한국으로 치면, 인디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에 가까운 ‘대사형 랩’인 셈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말투의 랩은 때로 제대로 된 선율로 자연스럽게 발전하기도 하고, 중간 중간, ‘어…’ ‘저…’하는 말문 막힌 탄성들에 의해 방해받기도 한다. 더불어 옆 사람들이 ‘맞아’, ‘그래’ 하는 추임새에 가까운 동조가 곁들이면서 참신한 형식의 노래로 완성된다. 이렇게 특이한 형식의 랩이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작품의 거의 모든 대사가 실제 인터뷰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녹음한 인터뷰를 계속 들으면서 인터뷰이의 말투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리듬을 확장시키고, 과장해서 그것을 음악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현실성에서 뮤지컬의 리듬감으로
이렇게 실제 인터뷰에 근거했기 때문에, <런던 로드>는 내용과 구성 면에서도 색다른 뮤지컬이 된다. 논픽션에 근거한 ‘다큐멘터리 뮤지컬’이 되는 것이다. 대본과 작사를 맡은 알렉키 블라이스는 이 작품을 위해 실제 살인 사건 후, 런던 로드를 수차례 방문하여 여러 번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에 기초하여 만든 이 공연의 등장인물은 모두 입스위치의 런던 로드 주변에 살고 있는 실제 인물들이며, 공연 대사는 거의가 인터뷰에서 그대로 발췌한 내용이다. 영국 연극계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10여 년 전부터 유행해 왔다. 일명 `버배팀 연극` Verbatim Theatre 이라고 불리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공연 대사를 실제 인터뷰나 방송된 영상에서 그대로 따서, 발췌하여 구성한 작품들을 말한다. 주로 현대 정치극에서 많이 활용된 이 기법은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장점이 있고, 아직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최근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을 위주로 작품을 구성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데이비드 헤어가 쓴, 영국 정부의 이라크 분쟁 참여를 비판한 정치극 <스터프 해픈즈> Stuff Happens,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에 방문했다가 의문사를 당한 미국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정치극 <내 이름은 레이첼 코리> 등이 버배팀 연극의 대표작들이다. <런던 로드>의 경우는 이러한 ‘발췌’ 형식에서,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말을 더듬는 부분까지 다 포함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공연 시작 부분을 비롯하여, 실제로 녹음한 내용을 그대로 틀어주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접근은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서, 상당히 과장된 방법을 통해, 묘하게 등장인물의 성격과,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적확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즉, 입에 담기 어려운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주인공이 되는 동네 주민들은 복잡한 심경으로 사건에 대해 진술하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기도 어렵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기에, 인터뷰에 응하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주저함이 <런던 로드>의 대사와 음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원래 우범 지역이었던 런던 로드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이 저소득층의 노동자 계층이다. 그 사람들이 가진 특유의 솔직함, 때로 의도치 않게 드러나는 공격성이, 리듬감을 살려 과장된 말투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래서 뮤지컬 <런던 로드>에는 진솔한 삶이 보여주는 잔잔한 감동이 있다. 극장에 오는 관객들이 현실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등장인물로 나온다. 그들의 말투도 특이하고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겪었던 충격적인 연쇄 살인 사건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인생관까지 드러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동네 사람들이 보여주는 군중심리이다.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불안 속에 떨며 딸을 단속하던 부모들과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가야 했던 여자아이들의 증언은, 뮤지컬 넘버 `모두들 굉장히 불안했어요` Everyone is Very Very Nervous 에서 `저 사람 일 수도 있어` It Could Be Him 로 이어지면서, 수상한 동네 남자들을 모두 살인범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는 군중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다가도 뉴스에 자기들이 인터뷰한 모습이 보도되면,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우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나쁜 기억을 씻고 싶은 듯, 서둘러 동네 가든 페스티벌을 열고 분위기를 쇄신해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군중의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줘 인간 내면을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기승전결이 있기보다는 이러한 주민들의 반응을 살인 사건의 경과에 따라 삽화처럼 보여주는 구성을 가진 <런던 로드>는 떠오르는 연출가 루푸스 노리스가 선사하는 몇 가지 명장면이 있다. 살인 사건의 수사가 한창인 동네에 경찰들이 안전선을 긋는 장면은, 무대 전체에 지그재그로 안전선 테이프가 촘촘히 설치되면, 그 한 칸 한 칸 안에, 동네 사람들이 소파에 앉은 채로 갇히게 된다. 그 정중앙에는 뉴스가 보도되는 TV 수상기가 켜있다. 무서워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뉴스만 보고 있는 상황을 훌륭하게 시각화한 장면이다. 또한 이웃 모임에서 살벌해진 동네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정원 꾸미기 경연 대회를 열자는 제안이 나오자, 모임을 위해 준비했던 대형 온수통이 열리면서 갑자기 꽃바구니가 하늘로 치솟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천장에서 수십 개의 꽃바구니들이 내려오면서 무대는 온통 꽃밭으로 돌변한다.
<런던 로드>는 신예 작가 알렉키 블라이스의 생생한 현장성을 담은 대본과 구성, 그리고 최근 정치 뮤지컬 <엔론> Enron 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작곡가 아담 콜크의 실험적인 음악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주인공도 없고, 유명배우도 없지만 총 66명의 역할을 일인 다역으로 열심히 소화하는 11명의 배우들은 마치 실제 입스위치의 주민들처럼 생동감 있는 사투리와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연습했을, 숨소리까지 계산된 대사형 랩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어 많은 박수를 받고 있다. 런던 국립극장에서 6월 18일까지 공연한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3호 2011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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