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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로저스·해머스타인의 <신데렐라> VS 디즈니의 <신데렐라> CINDERELLA [No.114]

글 |정예경(뉴욕 통신원) 사진 |Carol Rosegg 2013-03-26 5,761

`신데렐라’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의 비슷할 것이다. 금발과 백색 티아라, 하늘색 드레스, 호박마차. 디즈니가 만든 신데렐라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사실 신데렐라는 디즈니가 탄생시킨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프랑스 작가가 쓴 『신데렐라』의 원제는 ‘상드리옹(Cendrillon)’으로 1697년 처음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후 로저스·해머스타인이 <신데렐라>를 TV 시리즈로 만들었고, 줄리 앤드루스가 신데렐라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50년, 지금 우리에게 각인된 신데렐라 캐릭터가 디즈니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신데렐라>는 오페라, 발레, 아이스쇼, 팬터마임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변용되었다. 한때는 진부한 스토리를 바꿔보기 위해 폭력과 섹스를 가미한 엽기적인 버전들이 유행했다. 뮤지컬 <신데렐라>는 로저스·해머스타인의 TV 시리즈를 각색하여 브로드웨이에 도전장을 낸 작품이다.

 

 

 

 

색다른 신데렐라 이야기                                                                                                  
순진하고 마음 약한 첫째 언니는 동네의 장 미셸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장 미셸은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로맨틱한 청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지식인이다. 둘째 언니는 뚱뚱하고 주제를 모르지만 왠지 미워할 수는 없는 캐릭터. 왕궁에서는 국무총리 세바스찬이 왕자의 반지를 빌려 집권하고 있는데, 자꾸 세금을 올리는 바람에 정세가 어려워지자, 사람들의 원성을 잠재우고자 무도회를 연다.


무도회에 간 신데렐라는 12시가 되자 갑자기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데, ‘일부러’ 신발 한쪽을 계단에 놓고 간다. 신발을 떨어뜨린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남겨두고 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여전히 들떠있는 신데렐라를 보고 첫째 언니가 알아차린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우정을 나눈다. 신데렐라는 왕자가 신발을 이용해 자기를 찾아내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봐도 사랑해줄 수 있길 바란다. 


왕자는 신데렐라를 찾고자 두 번째 무도회를 연다. 첫째 언니는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여 신데렐라를 자기 대신 무도회에 보내고, 그 사이 장 미셸과 밀회를 즐길 계획을 짠다. 무도회에서 신발 한쪽의 주인이 신데렐라임이 곧 밝혀지고, 왕자는 장 미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민심을 듣는다. 왕자는 장 미셸과 세바스찬 중 투표에서 이기는 사람에게 국무총리 자리를 주겠노라 선언하고, 선거는 장 미셸의 승리로 끝난다. 신데렐라는 왕자와, 첫째 언니는 장 미셸과 결혼식을 올리고 나라를 잘 통치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신여성 미스신                                                                                                                                  
<신데렐라>의 극장 밖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 블록을 빙 돌아 줄을 선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의 절대 다수가 신데렐라 코스튬플레이를 하고 온 어린 여자아이들과 그의 부모님들이었다. ‘딸 바보’ 아빠들이 어찌나 많던지 흡사 놀이동산 회전목마 앞에서 줄을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신데렐라>는 열 살 이하의 여자 아이들, 정확히 말해서, 티켓을 구매하는 그 여자 아이들의 부모들을 타깃으로 한 작품이다. 요즘 젊은 엄마 아빠들은 자신의 아이가 참한 공주보다는 강하고 독립적인, 쉽게 말해 힐러리 클린턴 같은 원더우먼이 되길 바란다. <신데렐라>는 아마도 그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캐릭터와 이야기에 수정을 가한 듯하다.


이 신데렐라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일부러 신발을 흘린 다음, “나를 찾아내. 내 진짜 모습을 알아도 날 사랑할 수 있을지 시험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당돌함을 지녔으며, 밀당 실력을  갖추었다. 또 이상만 있고 실천력이 부족한 소심한 장 미셸을 궁으로 데려가, 왕자에게 정치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대담성까지 갖췄다. 그런데 예쁘고 상냥하다는 게 함정! 이런 지점에서 이 이야기가 동화라는 한계점을 갖는 것이다. 이런 동화들이 완벽한 여자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심어줘서 현대 여성들의 삶을 더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신데렐라를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은 남자다. 하지만 <신데렐라> 속 왕자는 능력 있고 완벽한 남자가 아닌, 왕자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다. 이유는 부모를 잘 만나서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의욕도 있고 본성이 수더분해 좋아하는 여자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 극에 나오는 모든 남자는 모두가 뭔가 하나씩은 부족해서, 약간 덜떨어진 듯 보인다(심지어 앙상블 백댄서 두 명이 이 팀에서 키가 제일 크고 잘생겼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깐깐하게 자기 것만 챙기기에 바쁜 초식남들이나, “오빠 믿지? 따라와”라고 말하는 강렬한 마초 캐릭터는 이 극장의 관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원더우먼에게 필요한 건, 다소 좀 모자라더라도 계획을 잘 듣고 따라주는 남자니까. 왕자가 직접 투표제를 도입한다거나, 몸소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신분과 상관없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 것은, 왕정제가 없는 미국에서 왕자라는 환상의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프렌들리함’이다.


<신데렐라>엔 약간의 통쾌함이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이렇게 대놓고 여자를 위해 만드는 작품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2013년판 <신데렐라>는 서서히 모계사회로 바뀌어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바람이 철저히 투사된 작품이다.

 

 

 

 

기발하고 훌륭한 의상, 그리고 로저스·해머스타인 고전             
<신데렐라>의 최고 스트라이커는 ‘화려하고 영리하며, 기발한’ 무대 의상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장을 나서며 “난 분명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었는데 믿을 수 없어!” 또는 “조명이 바뀐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옷이 바뀔 수 있지?”라는 말을 한다.


신데렐라의 의상을 순식간에 바꿔야 하는 과제는 아마 연출가와 의상디자이너에게 주어진 큰 도전 과제였을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장면에서, 빠르고 유려하게 진행되는 배우의 셀프 의상 체인지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레이저와 반짝이 조명을 사용한 눈속임수를 쓰지 않고 전통적인 연출 방식으로만 이런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 놀라웠다. 한 바퀴 돌면서 단추를 뜯어내면 옷이 뒤집히면서 넝마에서 드레스가 되고, 추격자들을 피해 망토로 몸을 숨기며 ‘짜잔!’ 하고 원래 옷으로 바뀌고, 무대 끝으로 가서 딱 3초 기대있을 동안 스태프가 전해주는 페티코트를 받아들고 관객에겐 안 보이게 옆쪽으로 착용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특별한 연출 기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무대는 이러한 기법과 무척 잘 맞는 무대였다. 넝마에서 풍성한 드레스로, 컬러풀한 드레스에서 무릎 원피스로, 변신이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의상들이 마법처럼 바뀌며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아마 신데렐라가 전 연령층에서 환영받는 작품이 된다면, 토니 의상 디자인상 정도는 노려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기술적인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가 하늘색 톤의 드레스 대신, 순백의 반짝이 드레스, 금색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에서 예기치 못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디즈니가 만든 신데렐라의 드레스가 하늘색이었다고 해도, 같은 색을 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었을 텐데, 디자이너는 굳이 하얀색을 택했다. 광고 속 이미지도 미스터리한 보라색과 하얀색뿐이다. ‘신데렐라’ 하면 떠오르는 하늘색을 작품 전체에서 완전 배제한 것이다. 아마도 디즈니와 차별성을 두겠다는 야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반 관객들에겐 별로 통하지 않는 욕심이었던 듯하다. 디즈니 스토어에서 산 신데렐라 옷을 입고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왜 신데렐라가 나처럼 입고 있지 않은 거야 엄마? 왜 드레스가 하얀색이야? 금색 드레스는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벨이 입는 건데….”라며 투덜투덜 대는 여자아이들, 그리고 그 불평을 듣고 표 값을 아까워하며 다소 분노하는 부모들에게 디즈니의 아성을 넘겠다는 제작사의 의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실재하지도 않는 캐릭터가 불세출의 뮤지컬 스타 줄리 앤드루스를 이기고 살아남았을까? 세월이 흐르면 스타와 유행도 바뀌지만, 캐릭터는 나이가 들지 않는다. 신데렐라는 무려 6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남아 예나 지금이나 여자아이들의 꿈과 환상을 지배한다. 지금 우리 머릿속에는 디즈니가 만들어놓은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디즈니의 터치가 들어가지 않은 다른 버전의 <신데렐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새삼 ‘가족적’, ‘친절함’, ‘따뜻함’ 등의 좋은 가치들을 내세워 전 세계를 지배한 디즈니의 위력 앞에서 거대한 매스 미디어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디즈니는 <신데렐라>를 만들 당시에, 이미 히트를 기록한 로저스·해머스타인의 TV 버전 인기 곡들을 얼마나 쓰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 당시에도 판권 문제에 영악했던 디즈니는 자신들이 콘텐츠를 직접 소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디즈니는 실력 있는 작곡가들을 고용하여, 안정된 직장과 높은 월급을 보장해주는 대신, 음악에 대한 모든 저작권을 소유했다. 생각해보면, <피노키오>나 <백설공주> 등에 사용돼 인기를 얻으면서 재즈의 스탠다드가 되어버린 곡들도 많은데, 우리는 작곡가의 이름조차 모르지 않은가. 많은 실력 있는 작곡가들이 고연봉의 회사원 같은 생활 방식을 택해 살았던 것이다. 요즘은 뉴욕의 영화음악 학계에서 이들에 대해 다시 집중 조명하는 워크숍을 여는 등 활발한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는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놀라운 음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작곡가들이 이름을 떨치지 않고 소시민으로서 행복하게 살다갔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아쉬움이 남는 무대 세트와 캐릭터                                                                                                             
<신데렐라>의 무대 세트는 전반적으로 휑하단 느낌이 들어 아쉽다. 백스테이지가 심하게 노출된다는 점도 이 작품의 결점이다. 필자가 사이드 좌석에 앉은 것도 아닌데, 무대 뒤에서 스태프들이 왔다 갔다 하거나 배우와 스태프가 수다 떨면서 웃는 것까지 다 보였다. 무대 뒤로 들어가는 곳에 불을 너무 환하게 켜놓아서 배우들이 넘어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공연 진행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민망하기도 하고,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올지 다 아니까 긴장감이 떨어진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아시아인 배우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도 캐릭터가 불만이다. <애비뉴 Q>에서 ‘크리스마스이브’로 나왔던 ‘앤 하라다’라는 일본계 배우가 뚱뚱하고 주제 모르는 둘째 언니로 출연한 것이다. 무대 위의 그녀는 재미있긴 했지만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인은 언제까지 해학적인 캐릭터여야만 할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앤 하라다는 꾸준히 브로드웨이 쇼에 출연하며 꽤 인정을 받는데도 맡을 수 있는 캐릭터는 딱 이 정도라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했다. 중요하지 않은 배역은 없다고 하지만 아시아인에게 다양한 배역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안타깝다.

 

시니컬한 마무리

공주 드레스를 입고, 공주님 대접을 받으며 <신데렐라>를 보러 와서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이 1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 성장하여, 원더우먼의 가면을 쓰고 하루하루 힘겨운 사투에서 이겨가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아찔한 현실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며 호박마차 대신 BMW를 모는 남자가 걸리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조금은 슬픈 현실. 며칠 전 19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잘 일어서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리무진에 오르는 걸 본 나로서는 물질 만능주의의 이곳에서 하는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아무튼 브로드웨이는 현실을 각인시키기보단 꿈을 심어줘야만 하는, 그래서 그 꿈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니 그 목적을 충분히 이행하는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가 아닐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4호 2013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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