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킬리안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한 수식어는 무엇일까. 현대 무용의 왕,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가장 모범적인 안무가, 천재… 하지만 역시 ‘세계 현대 무용의 나침반’이라는 표현이 그의 현재 위치를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듯하다.
체코 출신의 안무가 이리 킬리안은 스물여덟 살에 이미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받았고, 그 믿음에 상응하는 작품들로 NDT의 위상을 무용계의 가장 높은 층에 올려놓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상의 무용 부문 공로상과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상을 일찌감치 거머쥐었고,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나초 두아토 등 걸출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1999년과 2002년 NDT와 함께 두 차례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던 그가 한동안 격조했던 것이 섭섭했던 무용 팬이라면, 유니버설 발레단의 두 번째 모던발레 프로젝트 ‘디스 이즈 모던 2’에 눈을 돌려보길 권한다. 킬리안의 가장 강렬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티 모르(Petite Mort)>와 국내 초연작 <세츠 탄츠(Sechs Tanze)>가 허용순 안무가의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This is Your Life)>와 함께 무대에 올려진다.
<프티 모르>는 프랑스어로 직역하면 ‘작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성적 쾌락의 절정을 은유하는 표현이다. 킬리안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91년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을 맞아 만들어졌다. 여섯 명의 남자가 든 칼과 여섯 명의 여자들이 붙들고 있는 거대한 드레스 모형은 때로는 신체의 연장 같고, 때로는 감당하기 곤란한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면서 모차르트 협주곡의 선율에 밀도를 더하는 효율적인 오브제가 된다. 이어지는 <세츠 탄츠>와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는 상대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재치있는, 또다른 춤 어휘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 공연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를 유니버설 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이 답했다.
<프티 모르>와 <세츠 탄츠>, 두 작품을 함께 공연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실 킬리안이 두 작품을 연관 지어서 안무를 한 건 아니에요. 킬리안 재단에서 권한 것도 아니고요. 내년 예정인 유니버설 발레단의 러시아 공연 때문에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을 방문했다가 컨템퍼러리 작품 네 편을 엮은 공연을 봤는데, 그때 이 두 작품을 연이어서 하더라고요. <세츠 탄츠>는 벌레스크 식으로 코믹하고 <프티 모르>는 진지하고 세련됐는데도 상반된 두 작품 사이에 어떤 흐름이 보여서 이걸 이어서 하는 게 의외로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킬리안의 작품을 우리가 공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의 다양한 면을 한번에 보여드릴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지금까지 유니버설 발레단이 해왔던 것과는 좀 색다른 작품이라서 무용수들에게도 도전이고,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될 거라고 기대해요. 사실 한국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저도 그게 제일 궁금해요. <세츠 탄츠>는 영상으로만 봤으면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모스크바에서 직접 봤을 때 무대와 객석의 느낌과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어요. 러시아 관객과 한국 관객의 정서나 배경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제 입장에서는 약간의 모험이기도 하죠. 하지만 댄서들이 얼마만큼 해내느냐에 따라서 관객의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대를 하고 있어요.
<디스 이즈 모던 1>에서 포사이드의 <인 더 미들>이 특히 반응이 좋았는데, 그때 만족한 관객들이 <프티 모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사이드의 <인 더 미들>에서 느꼈던 파격을 기대하시면 안 돼요. 이건 완전히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작년의 그 작품은 잊고 백지상태로 오셔서 보시면 좋을 거 같네요. 그 백지 위에 무용수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말이죠. 허용순 선생님의 작품은 저희가 재작년에 발레 협회에서 하는 행사에서 딱 한 번 공연을 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보지 못했어요. 이번에 더 많은 관객들이 허용순 선생님의 작품을 볼 수 있게 올려보자는 마음에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됐어요.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는 굉장히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해설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심각하고 때로는 다이내믹한 순간들을 잘 풀어낸 작품이에요. 앞서 보시게 될 킬리안의 작품들보다는, 무용을 잘 모르는 분들도 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이고요. 세 편이니까 마지막에는 이렇게 어렵지 않은 작품을 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래식 작품을 하다가 컨템퍼러리 작품을 하는 댄서들에게 특히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까?
몸을 완전히 다르게 써야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몸의 언어가 바뀌는 건데,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 갑자기 불어를 써야 하는 것처럼 어려워요. 물론 현대무용은 고전발레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요. 하지만 킬리안의 <프티 모르> 같은 경우에, 저도 그분과 직접 작업을 한 적은 없지만 연출자가 와서 지도를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정확한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표현, 어떤 분위기, 어떤 몸의 형태를 굉장히 정밀하게 절제해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작품이에요. 자유로워 보이는 현대무용에도 절제된 움직임이 필요해요. 자유롭지만 그 자유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해요. 다시 말하자면, 댄서가 스스로에 대해 엄청난 컨트롤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 보일 수가 있어요. <프티 모르>는 특히 모차르트 음악을 사용한 작품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 국내에 소개할 예정인 현대무용 안무가와 작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현재로는 다음 작품을 뭐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는데. 현대무용 레퍼토리를 선정할 때 제 머릿속을 채우는 목적은 늘 같아요. 첫 번째는 우리 무용수들이 어떤 안무가의 어떤 작품을 통해서 좀 더 성숙할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째는 우리 관객이 성숙한 시선을 갖는 데 도움이 될 작품이 무엇일까, 세 번째는 안무가의 발굴이에요. 왜 우리나라에는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훌륭한 안무가가 적은가를 생각해볼 때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발레 역사를 떠올려요. 사실 우리나라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적인 무용수들도 없었거든요. 지금은 젊은 댄서들이 국제콩쿠르에서 입상을 하고 해외 무대에서 활동도 많이 하죠. 그건 좋은 안무가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거라고 봐요. 안무가들은 대부분 은퇴한 댄서들인데, 현역 시절, 많은 안무가들의 작품을 직접 추면서 그 경험을 통해 몸의 언어가 풍부해진 댄서들입니다. 좋은 안무가가 나오는 법이죠. 그래서 크랑코, 포사이드, 그리고 이번에는 킬리안까지, 정말 이 시대의 거장들의 작품을 우리 무용수들에게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요. 나초 두아토, 킬리안, 크로스토퍼 윌든, 오하드 나하린 같은, 우리 무용수들이 봤을 때 저 동작을 내가 어떻게 할까 싶게 하는, 그들의 마인드를 자극하면서 창의성을 넓혀갈 수 있게 하는 작품인가를 고민하면서 작품을 선정했고, 앞으로도 이 기준에 적합한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하게 될 겁니다.
6월 9일 ~ 12일 / 유니버설 아트센터 / 1544-1555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3호 2011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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