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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실패를 위한 실험실 -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의 김아라 예술감독 [No.79]

글 |김소연(연극평론가) 사진 |김호근 2010-04-20 4,898


대학로가 끝나는 혜화동 로터리. 주유소와 파출소 사이 좁은 도로를 따라 왼편의 건물들을 찬찬히 살피며 오르다 보면 갑자기 극장 하나가 나타난다. 평범한 작은 빌딩 입구와 다를 바가 없지만 건물 앞 한편에 포스터가 걸리고 책상을 내놓아 만든 매표소가 차려지면 이곳이 극장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게다가 공연이 끝난 늦은 밤이면 이곳은 그대로 극장 로비(?)가 된다. 극장을 빠져나온 관객들이 좁은 객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펼쳐지던 연극의 여운에 얼얼한 얼굴을 식힌다. 그러다 보면 연출자, 스태프, 때로는 미처 분장을 다 지우지 못한 배우들도 건물 앞에 나온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관객들과 배우들이 뒤섞여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은, 그 이름도 당당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이하 혜화동1번지)이다. 계단을 중앙에 놓고 빙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구조 때문에 이 극장의 무대는 기상천외하게도 ㄱ자 모양이다. ㄱ자 무대에 분장실이 꺾여 이어지고 분장실의 문은 계단 공간을 사이에 두고 극장 문과 마주보고 있다. 혜화동1번지의 비좁은 ㄱ자 무대는 한국연극의 ‘가난’의 상징이자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가난이 곧 자존심이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연극에서 유일무이한 연출가 동인 극장인 혜화동1번지는 이 극장을 거쳐 간 연출가들의 면면이 말해주듯이 2000년대 한국연극의 한 동력이다. 2000년대 최고의 작품이라 할 박근형의 <청춘예찬>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김아라, 이윤택, 채승훈, 이병훈, 박찬빈, 기국서, 류근혜, 황동근(이상 1기) 등 이 공간을 처음 만든 선배 그룹이 이제는 가장 튼튼한 중견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박근형, 최용훈, 이성렬, 김광보, 손정우(이상 2기) 등은 이즈음의 중대형 공연들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는 가장 바쁜 연출가들이다. 양정웅, 박장렬, 김낙형, 송형종, 오유경, 이해제(이상 3기) 그리고 지금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재엽, 박정석, 김한길, 김혜영(이상 4기)도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들로 그 활동이 왕성하다. (새로운 그룹이 결성되고 운영을 이어 받아오면서 각각의 그룹들을 자연스레 1기, 2기, 3기, 4기로 부른다.)
지난 3월 4일 이윤택 연출의 <수업>으로 막을 올린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은 지난 16년 동안 혜화동1번지 동인으로 활동한 17명의 연출가들의 작품이 장장 10개월에 걸쳐 공연되는 페스티벌이다. 연출가 동인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다른 색깔을 띤 연출가들의 공동작업장으로 운영되어 왔던 만큼 16년이라는 시간은, 이 극장을 거쳐 간 연출자들의 세대와 스타일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이번 페스티벌이 각자의 대표작을 보여주는 회고전도 아니다. 이번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작품들은 각 연출가들의 현재진행형의 작업들이라 할 만하다. 현재 운영을 맡고 있는 4기 동인의 작품은 모두 신작이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페스티벌이 진행될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극장의 탄생에 산파역이었고 이번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김아라 연출을 만나 극장 혜화동1번지와 축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극장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안다.
처음에는 극단 무천 연습실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공간을 찾고, 단원들과 함께 사포질 하면서 공간을 만들었다. 요즘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그때는 연극하느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는데, 86년 데뷔하고 계속 작업을 하면서 주목도 받고 학교나 상업적 프로덕션 등에서 이런 저런 제의도 받고 했지만, 더 연극에 몰두하고 싶었고 그래서 연습실도 꾸렸다.


그럼 극단 연습실을 포기하고 연출가 동인 극장을 꾸린 것인가.
연습실을 운영하다보니 연습실보다는 개방적이면서도 당시의 연극 환경에서 독립적인, 말 그대로 랩, 실험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대학로 상업주의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그때도 스타 시스템이 있었다.(당시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이 출연하는 여성연극에 많은 관객들이 몰렸다.) 그런 분위기에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주변 연출가들과 뜻을 모아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을 1차 목표로 갖지 마라, 실패를 감당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대가 강요하는 속도라든가 경제성에서 자유로워져라, 그리고 치열해야 한다 등등. 또 이 작은 공간이나마 후배들과 나누고자 젊은 연출가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1기 동인들을 보면 40대 전후라는 세대적 공통점 말고는 연출 스타일 등에서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연극미학이 우선이 아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접근 방법도 다 다르다. 우리는 각자의 독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작품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다. (첫 번째 동인 페스티벌의 제목 ‘관점 94 세가비백황파展’은 6명의 연출자가 연출한 작품 제목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서로 이야기는 참 많이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랄했다. 좋은 작업을 하려면 대못을 박아주는 동료가 필요하다. 자신의 연극관을 걸고 부딪치고 싸우는 힘이 필요하다. 비록 이곳이 실패를 위한 ‘실험실’이라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인 그런 동료들이었다.

 

혜화동1번지에 처음 들어서면 무대가 ㄱ자라는 것이 생소하다. 연습실로도 악조건이랄 수 있는데 어떻게 이 공간을 선택하게 되었나. 때로는 말 그대로 ‘가난한’ 연극의 상징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장소를 물색하고 다니다가 이 공간을 발견했을 때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계단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재미있지 않나? 나는 연극을 만들 수 없는 공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 야외극을 할 때도 공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뼈대가 보이고 놀 공간이 보인다. (김아라 연출은 1997년 죽산에 야외극장을 열고 10여 년간 꾸준히 야외극 작업을 해왔다.) 모든 공간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이야기를 잘 듣고 그것을 풀어내면 네모반듯한 극장보다 훨씬 흥미 있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공간에는 긴밀한 속삭임이 있다.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그것이 극장주의 연극이다.

 

공간에는 긴밀한 속삭임이 있다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간>을 개관 기념 공연으로 연출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궁금하다.
관객에게 보이는 무대는 ㄱ자이지만 분장실과 입구가 이어지면서 계단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 이 공간을 모두 사용했다. 침묵극인데 15명의 배우가 350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관객들이 보는 것은 무대지만 배우들은 분장실을 돌아 새로운 인물로 분하고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우들의 동선은 계속 빙빙 돌게 된다. 무대에서 보이는 것은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분장실은 정말 말도 아니게 바빴다. 350벌의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으니.(웃음)

 

극장을 상상하면서 들으니 그림이 그려진다. 때때로 ㄱ자 무대이기 때문에 다양한 공간 연출을 보게 되기도 한다. ‘어, 이 극장이 그 극장이었어?’ 싶게 작품에 따라 공간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이 극장에서 만든 작품을 다른 극장에서 공연할 때면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당시 공연들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관객을 50명으로 제한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지금보다는 연극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되돌아보면 이윤택, 이병훈, 채승훈 등 1기 동인들은 연출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서 그런지 공간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실험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최근의 젊은 연출가들의 경우 자작 연출이 많아지면서 연극미학적인 ‘파격’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 같다. 때로는 혜화동1번지 등 소극장 연극이 연극을 왜소하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연극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보는 정직하고 적극적인 눈을 갖는 것이다. 연극을 왜 하는가에 대한 철저함,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눈으로 세상을 강타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한 평론가는 혜화동1번지에 대해 우연으로 시작했지만 역사가 되었다고 한다. 지난 16년간의 활동을 망라하는 페스티벌을 여는 감회가 어떤가.
후배들이 열심히 작업해서 선배들에게 영광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사실 첫 시작은 정말 소박한 것이었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그때는 연극 만드느라 밥 먹는 것도 잊고 살았다. 내가 소식가라서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이 아니라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린다. 정말 열심히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든 공간인데 이렇게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소박한 정신이 가치 있는 것이구나, 약간의 배려하는 마음이 사회를 이끄는 큰 힘의 원동력이구나, 새삼 일깨워준다. 3기 후배들이 감사패를 주었는데 다른 어느 것보다 내가 가장 아끼는 상패이다.

 

장장 10개월의 페스티벌이다. 기간도 그렇고 참여 작가들이나 작품 수도 그렇고 만만찮은 규모이다. 게다가 각양각색의 작가들 작품들이 모여 있다. 예술감독으로서 이 페스티벌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나.
이번 페스티벌은 현재 운영을 맡고 있는 후배들이 열심히 뛰어준 덕분에 성사됐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후배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게 없을까 해서 이야기 상대라도 해주려고 덜컥 직함을 맡았다. 어떻게 보면 나를 비롯해 내 동료들은 80년대에 연극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번 페스티벌은 80년대에서 2000년대를 망라하는 지난 20여 년간의 연출가들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연출가들만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 스타일이라든가 세상을 보는 관점, 또 함께 작업하는 작가, 배우들을, 세대를 망라해서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겹겹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소협찬 | 느리게걷기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9호 201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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