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끝까지 하고 싶어요”
이십 대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십 대 소년으로 무대에 오르는 게 싫지 않냐는 질문에, 려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저 없이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마흔이 돼서도 십 대 역할을 맡고 싶다면서.
꿈꿀 줄 아는 현실주의자, 려욱. 지금껏 그를 해사하게 웃는 꽃다운 소년으로만 알았다면, 그 생각은 지금부터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단단해서 더 아름다운 청춘
며칠 전에 <아가사> 연습실에서 런스루하는 걸 보면서 려욱의 첫 뮤지컬 <늑대의 유혹>이 새삼 떠올랐어요. 지난 4년 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죠.
으흐흐. 아닙니다. 아마 지금은 지난주보다 좀 더 발전했을 겁니다. 으흐흐흐.
처음 뮤지컬 했을 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기억나요?
사실 영화 속 키 큰 훈남 정태성은 슈퍼주니어의 려욱이 보여주기 힘든 비주얼의 캐릭터잖아요. 그런데 뮤지컬은 초연이고 제가 처음 하는 거였으니까, 내 식대로 잘하면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연기도 잘 몰랐고, 연습도 많이 못 했는데.
원래 뭘 잘 모를 때 더 용감해진다고 하잖아요.
네. 지금 생각해 보면 뮤지컬 배우가 갖춰야 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동료 배우나 스태프에게도 잘 못 다가갔고요. 그땐 연습하고 공연하는 하루가 그냥 흘러갔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아까워요. 이 시간들이 소중하다는 걸 아니까. 공연 끝나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매일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아쉽고.
뮤지컬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해도 새로운 걸 도전할 땐 기대한 게 있었을 거예요.
저랑 동갑인 멤버 규현이가 저보다 1년 빨리 뮤지컬을 시작했는데, 규현이라는 자기 이름 하나 내걸고 활동하다가 다시 슈퍼주니어의 규현으로 돌아왔을 때 많이 성장해 있더라고요. 같은 멤버로서 뿌듯할 정도로. 저도 멤버들에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뮤지컬을 하면 좀 더 기대할 수 있는 연예인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우리 슈퍼주니어 형들이 진짜 냉정하거든요. 아니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 줘요. 그런 형들이 “려욱아, 너 뮤지컬 하고 나서 활동할 때 여유가 많이 느껴진다” 그래요. 내가 뮤지컬을 하면서 얻는 게 분명히 있구나 싶죠.
처음에 걱정했던 건 뭐예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하는 거요. 관객들이 아이돌에 대해 지닌 선입견을 같이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도 똑같이 가지면 어떡하지. 나를 챙겨주는 스태프들까지도 그러면 어떡하지. 그런 부담이 있었죠. 그리고 평가가 겁났죠. 처음에는 사실 좀 무서웠어요.
아이돌에 대한 가장 큰 편견은 뭔데요?
으음, 가식적일 거다?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는 직업이니까, 그런 오해는 어딜 가나 사기 쉬운 것 같아요. 서로 마음을 열기 전에는. 아! 어제 <아가사> 김지호 연출님이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려욱 씨는 진짜 마음씨가 좋은 것 같아요, 라고. 별거 아닌데, 나라는 사람이 한 꺼풀 벗겨졌구나 하는 생각에 진짜 기뻤어요. 감사했고. 그리고 연습에 많이 안 나올 거라는 편견도 좀 있고. 사실 편견이라기엔 실제로 처음에 많이 못 나갔지만…. 흐흐. 그런데 슈퍼주니어는 일반 아이돌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에요. ‘얘네가 아이돌이지, 근데 아이돌인가?’ 이런 느낌? 하하. 아이돌이라는 이름 아래 얻는 것과 잃는 게 있겠지만, 전 아이돌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진 않아요. 솔직히 누리는 게 더 많으니까. 언젠가 바다 누나나 옥주현 누나 이름 뒤에 려욱 하나 더 붙일 수 있는 대표적인 아이돌 출신의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고 그래요.
뮤지컬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도 있어요?
저는 제 발음이 되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앨범 녹음할 때도 딕션이 좋다는 얘기 많이 들었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뮤지컬 처음에는 딕션 때문에 혼나기도 많이 혼났는데, 같이하는 배우들이 많이 가르쳐줬어요. 얼마 전엔 지금 <아가사> 아치볼드 (황)성현이 형이 정확한 발음을 위해 신문 사설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음, “형은 읽으세요?” 제가 그랬죠. 으하하. 형 누나들이 제가 잘 못하는 걸 세세하게 알려줄 때마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많이 해요.
누군가에게 지적받는 건 그 자체로 신선한 자극 아니에요? 슈퍼주니어 활동 어느 시점부터는 그런 얘기를 많이 못 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어떤 땐 너무 신인 취급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안 해요?
아뇨. 누군가가 저에 관해 이렇게 꼬집어주는 게 오랜만이긴 하죠. 매니저들도 저한테 아쉬운 얘기 잘 못하거든요. 제가 너무 예민해질까봐. 그런데 뮤지컬 현장에서는 부족한 점에 대해 서로 스스럼없이 얘기해 주니까 오히려 고마워요. 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어떤 때는 공짜로 학원 다니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래서 스케줄 중간에 시간이 생길 때마다 연습실에 가려고 했어요. 잠깐 들러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얻는 느낌이 드니까. 그럴 때 되게 행복해요, 진짜.
지난 출연작을 보면 작품을 선택하는 일관된 기준이 느껴져요. <늑대의 유혹>의 싸움 짱 정태성으로 시작해서 <하이스쿨뮤지컬>의 농구부 주장 트로이,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북한군 순호, <아가사>의 작가 레이몬드, 모두 귀여운 10대 소년이잖아요? 이미지에 어울리는 역할을 고른다는 느낌이죠.
아무래도 제 장점을 부각할 수 있는 역할을 하려고 했죠. 그래야 뮤지컬 배우로 자존감이 생기니까. <하이스쿨뮤지컬> 때 김규종 연출님이 “려욱아, 너는 화려하고 큰 작품도 좋지만 소극장 공연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아”라고 해주셨는데, 마침 다음 작품으로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들어왔어요. 순호는 하길 진짜 잘한 것 같아요. 규모나 개런티, 이런 걸 다 떠나서 작품이 진짜 중요하구나, 그때 배웠어요.
그러고 보니 개런티가 처음과 비교해 진짜 줄었겠는데요? 게다가 거의 중소 규모 창작뮤지컬을 했으니까, 높은 개런티하고는 거리가 좀 있을 테고.
처음하고 비교해 보면 좀…. 하하. 그런데 첫 작품에서 슈퍼주니어의 네임 밸류로 개런티를 받았다면, 지금은 려욱으로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물론 큰 작품도 하고 돈도 더 많이 받으면 좋겠죠. 하지만 지금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실 팀 전체로 따져보면 지금도 제 개런티가 적은 게 아니잖아요? 다른 배우들한테도 개런티가 공유될 텐데, 미안하죠. 형 누나들이 그게 네가 받아야 하는 몫이라고 얘기해 줄 때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진행 중인 라디오나 SNS를 통해서 매번 열심히 작품 홍보를 하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어쩌면 그 몫을 다하기 위해서일지 모르겠네요.
당연하죠. 처음에는 트위터에 재미로 올렸던 건데, 이게 홍보가 될 수 있겠다는 걸 알고 나선 점점 책임감이 생겼어요. 제작사에서 저를 캐스팅한 이유에는 분명히 홍보의 목적이 있을 테니까. 나로 인해 관객이 한 명, 두 명 늘 때마다 우리 배우들이 행복한 거지, 저랑 떠든다고 행복한 건…,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관객이 많아야 더 좋은 거잖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홍보는 다 하려고 해요. 힘든 거 아니니까.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꽤 현실적인 이야기네요. 이럴 줄 몰랐는데. <여신님이 보고 계셔> 얘기를 하자면, 스태프들이 처음에 연습실 청소 팀을 짤 때, 려욱을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는 일화가 생각나요. 하지만 상견례 하고 나서 모바일 단체 채팅방에 초대돼서 막내 청소 팀이 됐다면서요.
맞아요. 그때 청소 인증샷도 찍었거든요? 근데 트위터에 올리진 않았어요. 욕 먹을까봐. 청소 한 번 하고서 저러는 거 아냐? 이럴까봐. 흐흐. 그런데 ‘청소를 했어?’ 하고 칭찬받는 것도 아이돌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인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라면 다 하는 건데. <여신님이 보고 계셔> 연습할 때, 양주인 음악감독님이 제가 감독님이 생각했던 순호처럼 노래했다고 칭찬해 주신 적이 있는데, 저는 그게 기억에 남아요. 그 칭찬을 듣고 나서 저를 믿게 됐거든요. 연기 테크닉이 부족하더라도 좀 더 자신 있게 해도 되겠다, 하고.
다 같이 연습하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으면 진짜 뿌듯했겠는데요?
네, 되게 좋았어요. 그때가 뮤지컬 하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에요.
또 희열을 느꼈던 순간을 꼽아보자면?
공연했던 매 순간. 왜냐면 관객들이 가만히 집중해서 저하고 같이 울고 웃고 호흡하는 게 굉장히 새로웠어요. 콘서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니까. 또 커튼콜 때 배우끼리 서로 안고 그러잖아요. 수고했다고. 그때 좋아요.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스태프들이 수고했다고 해주면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무사히 마무리했구나 하는 생각에 기쁘고. 동료들한테 “려욱아, 잘했다”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그럴 때도 좋죠.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예요?
갑자기 대사나 가사가 생각 안 날 때. <늑대의 유혹> 때는 코러스 부분 전까지 노래를 못한 적도 있어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이었는데, 말없이 기다리는 척했죠. 혼자 감정 연기를 막 하면서. 흐흐. <여신님이 보고 계셔> 때도 한번은 ‘악몽에게 빌어’ 신에서 가사 생각이 안 나서, 아, 정말. 그때 박소영 연출님이 그러셨어요. (연출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그래, 기억 안 날 수도 있지, 네가 뭐, 로봇도 아니고, 잘했어. 하하.
가사나 대사를 틀리면 아찔할 것 같아요. 뭐야, 못하네, 이런 이야기가 쉽게 나올 수 있잖아요.
그렇죠. 다른 배우들이 대사를 씹는 거랑 제가 대사를 씹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대사를 틀리면 ‘역량이 저 정도인데 주인공을 해?’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연습 부족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고. 그런데 뭐, 제가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
작품 편수가 늘어날수록 관객들이 나를 뮤지컬 배우 려욱으로 봐주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우선 인터넷에 욕이 많이 줄었어요. 으하하. 저는 저에 대해 좋은 글만 보고선 ‘칭찬이 많구나’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여신님이 보고 계셔> 할 때 (이)재균이였나, (전)성우였나, 같이 술 먹고 있는데, “인터넷에 네 욕이 많아”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봤어요. 그런데, 재균이 욕도 많더라고요. 하하하하. 사실 악플도 관심이잖아요. 그리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거나 친구하고 얘기하고 인터넷에 글을 안 남기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크게 신경 안 쓰려고 해요.
아쉬운 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엔 의기소침해져요?
시간대별로 달라요. 악플도 밤에 자기 전에 보면 생각이 정리되거든요. 이렇게 고쳐가면 되겠구나, 하고. 그런데 아침에 보면 짜증 나서 종일 기분이…. 하하. 아침엔 인터넷 절대 안 봐요!
스스로는 어떤 때 달라졌다고 느껴요?
첫 작품은 두세 시간 동안 나 혼자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어렵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공연은 같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예요. 그리고 처음엔 대사나 동선 같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게 100점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은 좀 달라요. 대사가 좀 틀리더라도, 나와 다른 배우 간의 호흡이 맞으면, 또 관객과의 호흡이 맞으면, 그게 더 좋은 연기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뮤지컬이 점점 재미있어요.
네 번째 작품인 <아가사>는 어때요? 레이몬드는 주인공 아가사의 실종 사건을 파헤쳐 가는 중요한 역할이니까 좀 더 연기하는 재미가 있나요?
레이몬드는 지금까지 제가 했던 역할 중에 대사가 제일 많아요. 그리고 소년에서 어른으로, 또 어른에서 소년으로 변해 배역의 폭이 넓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처음엔 거절했어요. 소화를 못할 것 같아서.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까, 이거 못하면 다른 작품은 어떻게 해,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작품이 들어올 때 하자는 마음으로. 으흐흐. 저는 저한테 들어오는 작품은 하자는 주의예요. 저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아, 제가 <아가사> 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찾아봤거든요? 사랑 많이 받았더라고요. 이거 잘못하면 안 되겠구나, 약간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초연을 봤던 분들이 제가 하는 레이몬드도 한번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아가사>가 끝나면 려욱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이번에 레이몬드 캐릭터를 잡을 때,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테이블 작업을 다 마치고서도 여기선 왜 이러는 거지, 이건 뭐지, 의문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다 궁금해서 못 참겠으면, 같이 레이몬드 하는 (박)한근이 형, (정)원영이 형한테 “형, 자요? 나 대사 바꿨는데 한번 볼래요?” 새벽에도 문자 보내고. <아가사> 바로 전에 <여신님이 보고 계셔> 할 때도 이 정도까진 고민 안 했거든요. 이번 작품을 계기로 캐릭터를 분석하는 방식이 달라졌죠. 이번 작품 끝내고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다시 할 건데, 그땐 순호한테 가는 길이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다시 하기로 한 거예요?
아뇨, 아직 제작사하고 얘기를 주고받은 건 아닌데, 올해 다시 공연된다니까, 전 할 거예요. 무조건! 으하하.
재밌네요. 만약에 제작사에서 개런티를 더 낮춰야 할 것 같다고 하면요? 그래도 할 거예요?
우선 5월까지는 <아가사>의 레이몬드에 푹 빠져서 살고, 그다음에 생각해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으흐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8호 2015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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