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뮤지컬은 춤, 노래, 연기의 세 요소가 어우러진 장르라고 정의되지만, 국내 뮤지컬에서 춤의 중요도는 상대적으로 뒷순위로 밀려난 상태다.
최근 몇몇 프랑스 뮤지컬의 인기와 특색 있는 안무가 돋보인 창작뮤지컬의 등장으로 춤은 다시 관객의 시야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노래와 연기가 득세하는 뮤지컬 시대에서 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무대 위의 춤과 안무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뮤지컬 안무의 현황을 알아본다.
춤이 곧 뮤지컬이다
올해 초부터 잇따라 무대에 오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안무는 뮤지컬에서 춤의 존재감을 새삼 다시 느끼게 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때론 과격하고 때론 앙증맞은 군무 신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번 공연은 대본과 음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국내 버전으로 재창작돼 안무 역시 양국의 색깔을 감안한 컨셉으로 진행됐다. 이 중책을 맡은 이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서병구 안무가. 그의 안무는 빠르고 경쾌하며 금방 눈에 들어오는 심플한 동작들이 특징이다. 프랑스 뮤지컬 특유의 감각적 색채에 그의 대중적인 안무가 묻어나는 움직임들은 이번 작품의 또 다른 재미가 됐다.
반면 서정적인 음악과 세련된 무대와 안무의 조화로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노트르담 드 파리>는 이번에도 특유의 고난도 안무로 명불허전의 감동을 선사했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프랑스 뮤지컬 <태양왕>이 투명 공 안에 댄서가 들어가 춤을 추는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했다면, <노트르담 드 파리>는 애크러배틱과 텀블링 등 아날로그 안무만으로 절묘하게 극의 정서를 전달한다. 특히 거대한 H빔을 탄 집시 우두머리 클로팽의 등장 신에서 댄서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면 관객의 기대감은 고조된다. 이후 스무 명에 가까운 댄서들이 총출동해 약 8분 동안 환상적인 군무 신을 펼치기 때문이다. 비보잉을 하는 브레이커, 텀블링 등의 춤을 추는 댄서, 종을 비롯한 각종 곡예를 보여주는 애크러배트 등 안무 분야를 세분화한 것도 이 작품에서 춤의 높은 비중을 말해준다.
대형작이 없었던 연초에는 오히려 국내 창작뮤지컬에서 인상적인 안무 신이 있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곤, 더 버스커>는 버스커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 만큼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하는 음악과 안무로 가득 차 있다. ‘버스킹’이라고 하면 대개 음악만 떠올리지만, 사실은 춤과 연기, 각종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길거리 문화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인 청각 장애를 지닌 댄서 버스커가 등장해 인상적인 춤과 함께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한다. 최인숙 안무가는 탭댄스와 마임 등의 퍼포먼스를 통해 인물과 극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설명해낸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주목받은 김준태 안무가는 <런웨이 비트>에서 10대 감성이 물씬 풍기는 캐릭터들을 안무에 그대로 반영했다.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는, 귀엽고 순수한 캐릭터들의 향연에서 각자의 개성을 담은 춤은 그 자체로 작품의 정서를 대변하는 기능을 했다.
<로기수>는 아예 탭댄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뮤지컬로 옮겨지며 탭댄스라는 매개를 통해 휴머니즘과 시대적 상황을 적절하게 버무린다. <그날들>의 신선호 안무가는 탭댄서인 박용갑 안무가와 호흡을 맞춰 춤이 소재이자 주인공인 작품을 완성시켰다. 한편 <환상동화>와 <정글라이프> 등 작은 규모의 작품에서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매력을 춤으로 살리는 데 일가견이 있던 송희진 안무가는 패러디와 유머 코드가 중요한 <난쟁이들>에서도 어김없이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춤이 장면 전환이나 배경 역할만 하는 대다수의 작품들과 달리, 극 전개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 부각됐다는 것이다.
뮤지컬 안무가가 보는 좋은 안무
좋은 안무가 단지 화려한 무대와 현란한 테크닉의 협연을 가리키던 시절은 지났다. 이른바 ‘이것이 나의 안무다’라는 일방 과시형 퍼포먼스는 더 이상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재 한국 뮤지컬을 주름 잡는 안무가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좋은 안무의 조건은 의외로 테크닉이나 구성 능력이 아닌, 경청과 소통 같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관객뿐만 아니라 작품을 함께 만드는 동료 스태프나 배우들을 포함한다. 물론 이런 깨달음이 처음부터 가능한 건 아니다. 특히 무용을 전공한 안무가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개성을 과시할 수 있는 강렬한 스타일의 안무를 고집하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출과 음악, 무대와 조명 등 여러 가지 영역과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 주력하며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공통적인 성장의 흔적은 안무에서 ‘춤을 빼는 것’이다. 최인숙 안무가는 “안무에서 춤을 뺀다는 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작위적인 춤 대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작들이 좋은 안무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각 분야의 전문 스태프와 조율하고 다듬어가면서 하나의 좋은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종종 무대나 의상 등 특정 영역은 좋은 반응을 얻지만 전체 작품은 혹평을 받는 경우가 이처럼 스태프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군무 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퍼포먼스이지만 요즘에는 장면 전환을 위한 세련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지킬 앤 하이드>에서 루시의 ‘Someone Like You’ 장면이나 <고스트>에서 샘의 집이 거리로 바뀌는 장면은 앙상블들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환을 이뤄낸다. 군무가 암전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좋은 아이디어였다. 국내 작품 중에서는 얼마 전 막을 내린 <사춘기>가 초재연 때와 달리 모든 걸 움직임으로 구성하면서 실험적인 시도를 한 작품으로 꼽힌다.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공연을 계획 중인 <프랑켄슈타인>은 이 점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낸 작품이다. 예의 시체 실험실 장면에서 쓰인 안무는 기존 뮤지컬에서는 잘 쓰지 않던 팝핀 동작을 활용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서병구 안무가의 조안무이자 배우로도 참여한 문성우는 스트리트 댄서 출신인 자신의 경험을 끄집어내 활용했는데 다행히 결과가 좋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지난해 <뱀파이어> 일본 공연에서는 그림자처럼 앞 사람의 뒤를 바짝 따라가는 캐논 형식으로 한 신 전체를 꾸미는가 하면, 이번 <로빈훗>에서 길버트 장면도 비슷한 형식을 일부 차용하는 등 의미 있는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 안무가들은 지금의 뮤지컬 안무에서 여전히 눈에 띄는 혁신이나 큰 변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다른 작품들을 꼼꼼히 챙겨본다는 최인숙 안무가는 “최근 관객들의 춤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안무는 변화도 없이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질타한다. 작품이 많아지면서 스태프가 부족해지고, 친분이나 유명세로 참여하는 사례도 많아 협업에서 시너지 효과가 나오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안무가가 사는 법
이런 안무가의 창의성 개선이나 젊은 피의 수혈이 원활하지 않은 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서병구, 이란영, 강옥순, 최인숙 등 현재 국내 뮤지컬계를 이끌고 있는 안무가들은 대개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뒤 뮤지컬로 진출한 사람들이다. 최근에도 현대무용이나 재즈 댄스 안무가들의 뮤지컬 참여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반면 무용 전공생들의 관심은 아직은 안무가보다는 배우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배우 관심 일변도는 졸업 후 진로에 관한 인턴십 수업 현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성대 무용과에 출강하고 있는 최인숙 안무가는 “60명 정도가 신청하는 무용 수업에서 뮤지컬 안무가를 지망하는 학생은 두 명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배우가 되고 싶어했다”며 이런 현실을 씁쓸해 한다. 뮤지컬 안무가 교육에 관련된 전문 시스템도 미미한 상황에서 지원자마저 적은 실정은 필연적으로 뮤지컬계에 대한 안무가 공급을 더디게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향은 현장에서 뮤지컬 안무가에 대한 처우 문제와도 연결된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는 안무가가 다른 디자이너들은 물론 연출가와도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스태프 중에서도 뒤처지는 대우를 받는다. 가령 이번 작품이 입봉작인 ‘초짜’ 음악감독이어도 그 직함 덕분에 프로그램북에서 관행적으로 안무가의 앞쪽에 배치되는 식이다. 이 때문에 뮤지컬에서 모든 움직임을 관장하는 중요한 보직임에도 불구하고 안무가에 대한 합당한 처우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성토의 목소리가 많다.
저작권 문제도 이와 연결된다. 월드스타가 된 싸이가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시건방 춤’을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용한 것이 당시 큰 화제가 됐을 정도로 이 문제는 안무가들에게 민감한 문제다. 특히 초연과 재연의 스태프 교체가 비일비재한 뮤지컬에서 안무는 종종 ‘강제 카피레프트’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이에 대처할 뚜렷한 저작권 기준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안무가들은 여전히 뮤지컬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마약 같은’ 매력이 있어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열악한 환경에서 좌절하지 않고 아티스트로서의 독창성을 위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감각을 연마한다. 최인숙 안무가의 경우 작품을 많이 보고 음악을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제작 기간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오래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영화, 광고,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찾는 유연함도 있어야 한다. 문성우 안무가는 매일 연습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두 시간 동안 촬영해 집에서 그것을 돌려보기를 2년간 반복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남의 동작을 따라하지 않고 자신만의 몸짓을 안무 스타일로 정립하려는 시도였다.
좋은 뮤지컬 안무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안무만 잘해서는 부족하다. 작품 분석과 안무 구성은 물론, 관련 스태프와의 협의, 배우에 대한 심신의 관찰과 긴밀한 소통까지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무가는 또 한 명의 연출가이자 교사이자 심리학자까지 되어야 한다. 현재 차세대 안무가로 꼽히고 있는 신선호, 김준태, 정도영 등도 이런 복합적인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 외에도 많은 유망 안무가들이 있지만, 불운 또는 약간의 안주만으로도 금세 도태되는 곳이 또한 안무가의 세계다. 그래서 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오늘도 연습실로 향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8호 2015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