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첫 작품 <사춘기>로 단번에 뮤지컬계에 이름을 알린 박정아. 이후 <마마, 돈 크라이>, <트레이스 유> 등 중독성 있는 록 뮤지컬로 마니아들의 호응을 얻은 그녀는 각각 팝 음악과 현대 음악을 기반으로 한 최근작 <더 넥스트 페이지>와 <주홍글씨>를 통해 더욱 자신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다. 변화를 꿈꾸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박정아 작곡가의 음악. 그 다채로운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늦게, 하지만 명확히
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 지금의 박정아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 다섯 살 때 소곡을 작곡했던 천재적인 작곡가 모차르트. 그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십 대 전후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작곡을 시작한다. 반면 박정아는 이십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도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있던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의 과감한 전향에 힘을 실어 준 것은 대학 시절, 기타 동아리 활동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절대음감이었고,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선배 한 명이 작곡을 권유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스물넷이란 나이에 다시 입시 준비를 하며, 초등학생 시절 겨우 몇 번 쳐봤던 피아노 앞에 다시 앉게 됐다. 그리고 다니던 대학을 졸업 후 바로 한예종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예상과 달리 처음 그녀의 전공은 클래식 음악. 이런 그녀가 클래식 음악에만 머무르지 않고, 뮤지컬 장르로 옮겨 온 과정에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그녀의 성향이 한몫했다. 기존의 음악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싶던 작곡가의 눈에 뮤지컬만큼 매력적인 장르는 없었으니까.
“음악 장르 하나만으로는 흥미를 못 느꼈어요. 영화, 애니메이션, 뮤지컬처럼 다른 장르와 협업하는 작업이 재밌었어요. 그중 가장 익사이팅한 게 뮤지컬이었고요.”
청춘의 인상적인 이미지, <사춘기>
박정아 작곡가의 뮤지컬 데뷔는 2008년 <사춘기>. 한예종 재학 시절 이희준 작가의 수업을 들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희준 작가와 김운기 연출 콤비가 만든 <사춘기>는 베데킨트의 희곡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개막 당시에는 신인 배우들이 캐스팅된 까닭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곧 인상적인 무대는 입소문을 타고 매진 행렬을 이끌었고,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 소극장 창작뮤지컬 작품상을 받는 성과를 이뤄냈다. 청춘들의 흔들리는 영혼을 파격적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강한 연극성이 돋보였는데, 이미지즘적이었던 박정아의 음악이 이러한 특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사춘기>의 음악은 작품의 상징적인 의미들을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풀어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박정아는 ‘발푸르기스의 밤’, ‘메피스토의 계약’, ‘그레첸’, ‘나는 문을 닫는다’, ‘나랑 춤추러 갈래’ 등 작품의 중심이 되는 곡들에 개성 있는 피아노 모티프를 삽입, 각 장면의 은유적인 이미지를 그와 어울리는 독특한 분위기의 멜로디로 연결시켰다. 때문에 이 작품은 유독 노래마다 특정 느낌을 자아내는 멜로디나 음정이 하나하나 절묘하게 매칭되어 있다. 예를 들어 ‘메피스토의 계약’의 경우 오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4도나 5도 병행의 구성을 진행시켰다. 이렇듯 각 노래에 장면의 상징성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를 담겨 있어, 청춘의 잔인한 순간이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목표는 두 가지였어요. 가사가 정말 잘 들릴 수 있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발푸르기스의 밤’, ‘그레첸’ 등 가사 자체에서부터 풍기는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 모티프를 쓰는 것. 대본을 받고 매일 24시간 그 생각만 했어요.”
클래식과 록의 조화, <마마, 돈 크라이>
박정아 작곡가와 이희준 작가·김운기 연출의 협업은 <사춘기> 이후에도 이어졌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미스터리 멜로물 <달콤한 인생>, 그리고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가 그것. 2010년 초연한 <마마, 돈 크라이>는 뱀파이어란 매혹적인 소재와 록음악을 기반으로 한 콘서트 형식이 기존 작품들과 차별화를 이루었다. 작품의 독특한 개성이 마니아들의 지지를 이끌었는데, 여기에는 박정아의 중독성 강한 음악이 큰 몫을 했다. 형식의 특성상 음악의 존재감이 클 수밖에 없었고, 박정아의 음악은 그 역할을 잘 이끌었다. 그녀는 <마마, 돈 크라이>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냈다. 다양한 장르의 혼종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아는 자신의 전공인 클래식 음악과 어린 시절부터 관심사였던 록 음악을 접목해, 작품의 독특한 개성을 살렸다. 마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하나의 곡에서 다채로운 느낌이 표현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하프 맨, 하프 몬스터’, ‘달의 사생아’ 등 폭발적인 록 사운드가 인상적인 곡에서도 어김없이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장르의 혼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인공 프로페서V의 심리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며, 드라마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이희준 작가님의 특징이 노래 하나에 가사의 상황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음악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이 변화를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먼저 멜로디가 떠오르면, 그 이후부턴 디테일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로 씨름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면 음악이 계속 꿈틀꿈틀 진화를 해요. A란 음악에서 출발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변화하다가 끝은 B라는 음악으로 바뀌어 있는 거죠.”
록의 카타르시스, <트레이스 유>
<마마, 돈 크라이>가 록과 클래식의 접목이었다면, <트레이스 유>는 본격적인 록의 향연이었다. 2012년 초연한 <트레이스 유>는 홍대 록 클럽 ‘드바이’를 배경으로 보컬 본하와 클럽을 운영하는 우빈의 숨겨진 드라마를 그린 작품이다. 홍대 클럽이 배경인 만큼 공연은 록 콘서트 형식을 지향했고, 그에 따라 음악도 철저히 하드 록에 기반했다. 청소년 시절 신해철을 좋아해 프로그레시브 록을 비롯한 다양한 록을 즐겨 들었다는 박정아는 그때의 감성을 이 작품에 투입했다. 물론 각 노래마다 주어진 드라마를 전하는 것이 첫 목적이지만, 콘서트 형식이란 특성상 이 작품의 곡들은 클럽의 분위기를 물씬 내는 역할도 맡았다. 특히 극의 초반 이런 기능의 곡들이 순차적으로 배치됐는데, ‘Trace U’, ‘또라이’, ‘나를 부숴봐’ 등이 그것. 박정아는 이 곡들에 록킹한 멜로디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을 의도적으로 사용해, 록 특유의 중독성을 입혔다. 흥미로운 점은 기타를 통해 드라마의 배경을 구분했다는 것. 공연에는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두 대가 사용되었는데, 의도적으로 록 공연을 하는 밴드 장면에서는 일렉트릭 기타, 본하와 우빈의 대화가 중심이 되는 장면에서는 어쿠스틱 기타가 연주됐다. 어쿠스틱의 진솔함과 일렉트릭 기타의 화려함, 상반된 매력을 지닌 두 기타의 활용은 보다 풍성한 사운드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드라마의 명확한 구분을 청각화하는 일석이조의 기능을 했다.
“고등학교 때 프로그레시브 록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모던 록이 대세잖아요. 둘 중 어떤 장르를 선택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근데 모던 록은 한 뮤지컬의 드라마를 표현하기엔 제한적인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즐겨들었던, 보다 파쇼적이고 드라마틱한 느낌의 록들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했어요.”
순수한 동심의 세계 <더 넥스트 페이지>
박정아 작곡가는 <마마, 돈 크라이>, <트레이스 유> 등 어둡고 에너지 강한 작품을 연이어 작업한 뒤 그 반동으로 자연스레 밝고 따뜻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14년 초연하게 된 <더 넥스트 페이지>는 한지안 작가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작품. 2013년 <반짝, 내 맘!>이란 제목으로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에 선정된 후 개발 과정을 거쳐 공연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열두 살 소녀 별이를 주인공으로, 그녀가 꿈속에서 동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며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동심을 그리고 있는 만큼, 음악 또한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진 순수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바보 똥개 말미잘’이란 귀여운 가사로 어린이의 진솔한 마음을 표현한 ‘내 맘속의 비밀’이나 말장난 같은 재밌는 가사를 경쾌한 비트와 신나는 선율로 풀어낸 ‘끝말잇기’ 등 전반적인 노래들이 누구나 쉽게 듣고 즐길 수 있는 친근한 음악이다. 이는 R&B, 팝 발라드 등 보다 대중적인 장르가 다양하게 사용되었기 때문. 나아가 백설공주의 넘버를 R&B 장르로 쓰는 등 동화 속 캐릭터마다 다른 장르를 연결해 동심의 세계를 풍성하게 표현해냈다.
“이 작품은 진짜 아이들의 시각에 맞춰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 작업하고 난 뒤 실제로 제 아이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반응을 확인했어요. 제 노래를 듣고 아이들이 바로 따라 부르는 걸 보면서 울컥하기도 했죠. 특히 이 작품을 만드는 순간이 참 행복했어요.”
다양한 세계, 다양한 음악
뮤지컬 작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마 표현. 그런 만큼 박정아는 주어진 대본에 의견을 더하는 것보다 그것을 백 퍼센트 재현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춘다.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살리고 난 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플러스 알파 하는 거다. 그에 따라 박정아의 작업 스타일은 가사를 입에 붙을 정도로 읽은 다음 그 운율에 따라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또한 작품과 관련된 키워드를 찾아 그에 해당하는 영화나 책, 음악 등의 자료를 참고하며, 보다 뚜렷한 느낌을 찾아내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매주 가요 차트의 1위부터 100위까지 곡을 찾아 들으며 지금 시대를 끌고 나가는 트렌드를 파악하는 일 또한 그녀가 빼놓지 않은 일이다.
박정아 작곡가는 신작에 대한 욕심이 많은 창작자다. 하지만 어떤 모티프에 끌려 직접 기획하는 방법보다는 작가들의 다양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에 더 강한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작가들의 세계를 향한 박정아의 건강한 호기심. 그것이 이 매력적인 창작자가 매번 다른 색깔의 작품을 우리 앞에 내려놓는 남다른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제가 호기심이 많아요. 음악을 쓸 때도, 좀 더 다른 종류의 음악은 없을까? 한정된 장르에 국한되기보다는 늘 새로운 장르를 고민해요. 그래서 매번 다른 색깔의 작품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있죠. 그동안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내공이 생겼으니, 앞으론 더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9호 2015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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