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창작뮤지컬 <빨래>가 올해 10주년을 맞는다. 이를 위해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6월 10일 공연부터 약 한 달간은 MR 공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첼로, 기타, 드럼 등 라이브 연주가 가미된 공연을 펼친다.
또한 6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6회 공연에는 기존에 <빨래>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블라인드 캐스트로 출연한다.
원래 8명의 배우가 1인 다역으로 출연하던 것이 이때 공연은 13명의 배우가 역할을 나누어서 연기한다.
이외에도 10주년을 기념한 소설 출간과, 10주년 히스토리 북 발간을 기획하고 있다.
<빨래>의 시작은 소박했지만, 지난 10년간 이뤄낸 성과는 결코 소박하지 않다. 상복도 많았다.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사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극본상, 작사작곡상, 최우수창작뮤지컬상을 비롯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대교출판 중학교 국어 교과서와 창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빨래> 대본이 실리는가 하면,
<빨래>를 바탕으로 서울살이를 다룬 추석 특집 뮤지컬 다큐멘터리 <서울의 달밤>이 방영되기도 했다.
<빨래>는 지난 10년 동안 서민들의 편에서 서울살이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했다.
16차 공연까지 2,735회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빨래>를 보며 울며 웃고 위로받은 사람들이 5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 감동의 숫자는 계속 쌓여가고 있다.
소박한 출발
<빨래>의 출발은 2003년 이전으로 올라간다. 추민주 연출이 지하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 때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갔더니, 이웃집 옥상에 방글라데시 청년 세 명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젊은 여자가 올라오자 채 마르지도 않은 옷을 입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그때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던 것이 <빨래>의 시작이다. 이를 2003년 졸업 공연의 토대로 삼았고, 당시 추민주와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민찬홍, 여신동, 김태형, 이재준, 오미영, 민준호, 성기웅이 <빨래> 공연에 참여한다. 지금은 모두들 공연계에서 한자리씩 차지하는 이들이 됐다. <빨래>의 주인공인 서나영이란 이름은 당시 그 역할을 맡았던 배우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2005년 <빨래>가 프로 무대에서 일반 관객들과 만난다. 국립극장의 이성공감 페스티벌에 당선되어 공연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운 좋게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사극본상을 받는다. 작품성과 가능성은 인정받았지만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극단 수박시어터의 생존은 녹록치 않았다. 단원들이 자비를 털어 공연을 올리는 생활을 했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관객들의 반응은 자신감을 주었다. 그것이 2차 상명아트홀 공연에 이어 3차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공연으로 이어지게 했다.
새로운 시작
국립극장 공연 시절 일곱곡으로 구성된 한 시간 25분짜리 공연이 지금은 리프라이즈 포함 18곡의 두 시간 30분짜리 공연으로 거듭났다.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공연이다. 상명아트홀 공연 때는 민찬홍 작곡가가 군대에 있을 때여서,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던 신경미 작곡가가 ‘내 이름은 솔롱고입니다’, ‘그런대로 살자니’, ‘나 괜찮습니다’ 세 곡을 추가했다. 이후 2008년 민찬홍 작곡가가 제대한 후 그의 음악으로 완전히 새로운 <빨래>를 구성했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서울을 보여주는 ‘나 한국 말 다 알아’, ‘자 건배’를 비롯, 서울살이를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비 오는 날이면’이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작품은 하나의 마당을 나눠 쓰는 주인할매, 희정엄마, 나영이 이야기와 솔롱고와 나영이의 사랑 이야기에서 확장돼 서울살이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폭넓게 껴안았 다. 마흔 살 장애아 딸을 키우는 주인할매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담겨 있는 ‘내 딸 둘아’도 이때 만들어졌다. 유료 관객이 2명일 때도 있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관객들이 몰려 매진을 기록했다. 작품이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힘으로 중극장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로 진출했다.
상시 공연으로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공연은 무엇에 홀린 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킬 앤 하이드>로 인기 상승 곡선을 긋고 있던 홍광호가 솔롱고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원더스페이스 공연부터 <빨래>를 보러 왔던 임창정 역시 흔쾌히 참여에 동의했다. 임창정의 출연으로 언론이나 대중들의 관심을 얻게 됐다. 솔롱고의 솔로곡 ‘안녕’이 추가됐다. 솔롱고의 솔로곡이 추가되면 나영의 곡도 한 곡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민찬홍 작곡가의 주장으로 나영이 부르는 ‘한 걸음, 두 걸음’이 만들어졌다. 라이브 공연을 이어가면서 코러스도 보강했다. 이렇게 규모를 키운 작품은 중극장 이상만 대상으로 하는 더 뮤지컬 어워즈에 출품돼 극본상, 작사/작곡상, 최우수뮤지컬상을 받았다. 규모를 키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공연을 올리고 나자 좀 더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측면도 있었지만, 원래 <빨래>의 소박한 정서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빨래>의 정신은 소극장에서 더욱 빛났다. 2009년 그 정신을 살려 상시 공연에 도전했다. 상시 공연을 하면서도 <빨래>는 늘 동시대 관객들과 호흡했다. 월세나 보증금, 최저 임금은 관객들이 체감할 수 있는 금액으로 바꿨다. 강자에게 억눌린 억울함,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연대는 시대나 장소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해외 진출
일본 공연 제작사 퓨어메리 측이 <빨래>를 보고 일본 공연을 제안해 온 것은 2011년이었다. <빨래>의 일본 공연은 다른 한국 뮤지컬의 일본 진출과는 달랐다. 일본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현지화하지 않고 원작 그대로 공연하기로 한 것이다. 제목도 일본어 표기인 ‘洗濯(센타쿠)’ 대신 한국 발음 그대로 ‘パルレ(파루레)’로 표기했다. 무대에 표기된 ‘국제슈퍼’, ‘쌀’ 등도 한글 그대로 사용했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추민주가 일본 공연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빨래>는 한국적인 정서가 강한 작품이다. 작품의 정서를 일본 배우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회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나영이 오열하는 장면에서 희정엄마와 주인할매가 다가가 쓰다듬고 위로하는 것을 일본 배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일본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 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추 연출은 연습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스킨십을 많이 했다. 일본 배우들은 비로소 <빨래>의 위로가 별게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끼리 살 부비고 위하는 마음임을 알았다. 2012년 일본 초연 공연 이후 점점 규모와 기간을 키워 진행됐다. <빨래>는 일본의 공연 잡지에서 선정한 그해의 뮤지컬 베스트6에 오르기도 했다. 동일본 지진 피해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던 일본 관객들은 <빨래>를 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빨래>는 2015년에도 일본 공연을 마쳤다. 일본에 이어 이제는 거대한 대륙의 땅 중국 사람들의 시름을 위로하려 준비 중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1호 2015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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