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당신이 잠든 사이>와 <김종욱 찾기>의 공통점은 10여 년이란 긴 시간 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창작뮤지컬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김혜성 작곡가의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2002년 <송산야화>로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이에 데뷔한 김혜성. 이후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로 연이은 화제를 모은 그녀는 <소리도둑>, <총각네 야채가게>, <심야식당>을 거쳐 최근작 <마이 버킷 리스트>까지 꾸준히 창작 활동을 펼치며 무대 위에 친근하고 다채로운 음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이 이뤄낸 김혜성 작곡가의 음악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호기심이 이룬 시작
김혜성 작곡가의 어린 시절에는 자연스레 음악이 스며있었다. 국악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에는 늘 음악이 흘렀고, 그녀 역시 천성적으로 음악을 좋아해 다양한 음악 경험을 쌓아갔다. 작곡 역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CA 활동으로 작곡반을 선택하며 흥미를 보였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무궁무진했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작곡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런데 이유가 재밌다. 호기심이 많았던 소녀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무거운 악기를 들고 다니며 연습에만 매진하기가 싫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가 ‘넌 작곡밖에 할 게 없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호기심 소녀의 엉뚱한 매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진학한 후에도 계속됐다. 개그맨을 꿈꾸며 방송국에 시험을 보러 갔던 것. 아쉽게도 결과는 낙방이었지만, 그 대신 동아콩쿠르에 입상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그녀의 입상 소식이 교내에 소문이 나면서, 연극원에서 뮤지컬을 만들고 있던 한 학생이 작품을 부탁해온 것. 이것이 바로 <송산야화>,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로 이어진 장유정 연출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렇듯 우연한 계기로 시작하게 된 뮤지컬 작업이었지만, 그녀는 차차 무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왜 하필 뮤지컬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냥 혼연일체였던 것 같아요. 대본을 읽으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상황이 펼쳐져요. 여기 음악이 들어가고, 저기서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회전하다 암전! 작업할 때도 이런 걸 몸으로 다 표현해봐요. 어렸을 때도 혼자 피아노 연주하면서 연기하는 놀이를 많이 했거든요. 저 자체가 굉장히 뮤지컬적이에요. 그러다 보니 제가 재밌게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뮤지컬이었던 거죠.”
전통과 현대의 조화 <송산야화>
김혜성 작곡가의 데뷔작은 2002년 <송산야화>. 한예종에서 인연을 맺게 된 장유정 연출과의 첫 협업으로, 학교 수업에서 만든 작품이 대학로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김현감호’를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호랑이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호녀와 순수한 청년의 사랑을 그린 다. 한국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인 만큼 김혜성 작곡가는 자신의 전공인 전통음악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작품 속 슬픈 전설을 풀어내기 위해 날라리, 장구, 해금 등 전통악기를 사용, 작품 특유의 ‘한국적인’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물론 이 작품에 전통음악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호랑이의 고달픔을 표현한 ‘나는야 호랑이’는 하드록, 해맑은 사랑을 노래한 ‘사랑의 아리아’는 리드미컬하고 경쾌한 팝으로 표현하며 음악적으로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조화는 참신한 소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기능을 했다.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썼던 거라 당시에는 뮤지컬이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못했어요. 이 작품이 대학로에 오르게 될 거란 생각도 못했고요. 지금 돌아보면 더 세련되게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지만…이런 멜로디는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양함으로 전하는 따뜻함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혜성의 두 번째 작품 <오! 당신이 잠든 사이>. 2003년 장유정 연출의 한예종 졸업공연으로 첫선을 보인 뒤 2005년 연우무대 소극장에서 개막하며, 10년 넘게 사랑받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카톨릭 재단의 한 무료 병원에서 반신불수 환자 최병호가 사라지며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를 찾는 과정에서 병원 안 사람들의 숨은 사연이 펼쳐지며 따뜻함을 전해준다. 여기서 김혜성의 음악은 일곱 캐릭터의 사연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 집중하며, 그들의 드라마를 부각시킨다. 길례 할머니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노래한 ‘길례의 사랑’은 5음 음계의 한국적인 선율로, 소녀의 슬픈 가족사를 풀어낸 ‘소녀의 노래’는 R&B로 풀어내며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베드로 신부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베드로의 마음’에는 랩을 곁들여 극적인 재미도 더했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오! 당신이 잠든 사이>는 한 무대 위에 보다 다채로운 음악 장르를 선보이는 김혜성의 장점이 잘 살아난 무대가 되었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는 다른 창작뮤지컬들에 비해 곡 수가 적어요. 노래의 길이가 굉장히 길기 때문이에요. ‘길례의 사랑’, ‘숙자의 아리아’ 등 한 곡 안에 한 인물의 인생이 담겨 있거든요. 이 작품은 드라마가 강해요. 그런 만큼 음악이 튀기보다는, 인물의 드라마와 함께 자연스럽게 펼쳐지길 바랐어요. 그리고 그것이 어쿠스틱 라이브와 어우러져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게요.”
친근하고 재밌게 <김종욱 찾기>
2006년 초연한 <김종욱 찾기>는 소극장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의 붐을 일으킨 화제작이다. 2010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욱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김혜성은 장유정 연출이 건넨 시놉시스를 처음 읽고 단박에 대박을 예감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선율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첫 곡이자 대표곡 ‘Destiny’.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통통 튀는 음악과 함께 ‘오~오~’를 리듬감 있게 반복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Destiny’의 테마는 작품 전반에 걸쳐 사용되어 듣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를 통해 작품에 통일감을 주되, 곡마다 그 표현을 달리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첫사랑 찾기 주식회사’에서는 ‘오~오~’가 그루브로, ‘좋은 사람’에서는 발라드로, ‘러브 테마’에서는 펑키한 리듬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관객들이 작품을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특기할 점은 <김종욱 찾기>의 음악이 하루 만에 완성되었다는 것.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김혜성의 여느 작품들에 비해 더욱 통일성을 지니게 됐다.
“처음에 20만 원으로 이 공연을 준비하다 보니 무대에 아무런 장치도 없었죠. 그래서 노래 한 곡으로 점집이 되고, 비행기를 타고, 인도 여행을 하고, 낙타가 등장하게 만들었어요. 음악으로 그런 상황을 펼치는 게 재밌었어요. 노래 하나로 한 사람의 인생이 3분 안에 바뀐다는 것! 뮤지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잖아요. 무대였기 때문에 매력적인 작업이었죠.”
청춘을 부르는 노래 <총각네 야채가게>
2008년 BMI 뮤지컬 워크숍에 합격해 미국 유학을 떠났던 김혜성은 2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2010년에 <총각네 야채가게>를 선보였다. 이는 2008년 초연했던 작품을 창작자를 전면 교체해 새로운 버전으로 꾸린 것이었다. 제작사의 제안을 받고 고심했던 김혜성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젊음과 열정’을 믿고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총각네 야채가게>는 채소가게를 운영하며 꿈과 사랑을 키우는 총각들의 이야기인 만큼 음악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크다. 김혜성은 청춘을 음악으로 풀어내기 위해 템포에 집중했다. ‘고래의 꿈’, ‘함께 걷는 여행길’ 등 인물들의 드라마가 펼쳐질 때는 템포를 늦추고, ‘총각네 야채가게’ 등 이들이 함께 모여 청춘을 이야기할 땐 빠른 템포로 역동감을 준 것이다. 이러한 템포 조절로 드라마와 음악은 더욱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2012년 김혜성은 이 작품으로 연출에 첫 도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연출하게 된 그녀는 다섯 명의 총각을 네 명으로 줄이고, 각각의 드라마를 명확히 만드는 것에 집중, 음악과 춤을 더한 쇼 장면을 추가하며, ‘청춘’이란 작품 자체의 힘을 더 부각시켰다.
“정말 순수한 작품이에요. ‘젊음’이란 매력 때문에 이 작품에 열정을 바칠 수 있었죠. 당신의 5년 후, 10년 후를 꿈꾸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야채처럼 생생하고 아삭한 공연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소소한 위로 <심야식당>
아베 야로의 유명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2013년 <심야식당>. 이 작품이 초연되기까지, 김혜성은 3여 년간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프로덕션의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닌 창작자들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혜성은 정영 작가와 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며 직접 제작사를 찾아 나섰지만, 어렵게 성사된 공연이 제작사의 사정으로 무산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두산아트센터 아트랩에 지원해 워크숍 공연을 올렸고, 마침내 초연을 성사시켰다. 이는 창작자로서 김혜성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심야식당>의 음악은 무엇보다 원작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 그 ‘심야식당스러움’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첫 곡 ‘심야식당’. 이는 김혜성이 대본을 처음 읽고 가장 먼저 쓴 곡으로, 그녀가 해석한 ‘심야식당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히사이시 조 스타일의 일본 애니메이션 OST를 떠올리게 하는 쉽고 따뜻한 곡이다. 이 작품은 원작의 정서를 담는 데 집중한 만큼, 기존 김혜성의 음악 스타일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 통통 튀며 다채롭게 변화하는 기존의 김혜성 스타일이 조금 절제되어 있기 때문. 대신, ‘인생의 맛’ 등 일본 신주쿠 뒷골목과 어울리는 소박하고 애잔한 음악을 강조함으로써 작품 특유의 분위기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늘 ‘심야식당스러움’을 생각했어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음식으로 위안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식당.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그런 소소함처럼 어떤 곡도 튀지 않고 ‘심야식당스러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어요.”
경험으로 쌓은 다양성
김혜성은 365일 작곡을 위한 준비를 한다. 그렇다고 늘 악보 앞에만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으며, 여러 가지 경험들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대본에 자신이 보고 느낀 생각들을 빼곡히 채워 넣으며, 음악을 완성해 간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일상은 그녀의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거름이다. 그녀의 지론은 한 우물을 깊이 있게 파는 것이 아닌 얕지만 다양한 우물을 파는 것. 그래서 얕게나마 다양한 문화를 접한 것이 그녀의 장점이 되었고, 이를 통해 한 작품 안에 다채로운 장르를 쉽고 재미있게 구현해낼 수 있었다.
김혜성은 다양한 경험만큼이나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한 창작자다. 구미호를 소재로 한 작품, 성인들을 위한 19금 뮤지컬, 트로트로 만든 작품,
“죽을 때까지 작곡할 거예요. 그러면서 이곳저곳 눈을 돌리며 하고 싶은 걸 다 해볼 생각이에요. 대극장 작품도 해보고, 역사물도 써보고, 연출도 하고, 단역 배우도 해보고…. 질그릇처럼 굴러다니며 매일 배우고 깨지는 사람이고 싶어요. 작곡가는 끊임없이 세상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거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1호 2015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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