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 양대령의 딸 셋 중 맏이였던 소녀는, 소녀였던 시절 내내 소년처럼 뛰놀았다. 아들 없는 군인 아버지는 사내애들과 나란히 서서 볼일을 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맏딸을 편들었고, 천생 소녀인 동생을 돌보는 것보다 버찌 따러 나무를 타는 것이 천배백배로 신났던 천둥벌거숭이는 ‘너는 여자애라 1등을 했지만 반장을 시켜줄 수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분해서 엉엉 울었다. 부부금슬 좋고 딸들에게 극진했던 멋쟁이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보고, 서른아홉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그 후로 너는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기타를 잡고 노래하게 될 거라고 누가 말을 해줬대도 믿지 않았을 까마득한 시절의 기억들. 무대에서 40년 간 노래를 했고, 필경 자신의 삶보다 오래도록 살아남을 노래를 지금도 부르고 있는 가수 양희은이 자신의 기억과 노래를 무대에서 함께 펼쳐놓았다.
어제 대본을 읽었습니다. 대본을 직접 쓰셨다고 들었어요.
2004년에 동생하고 제가 한 작업이에요. ‘드라마가 있는 콘서트’를 위한 대본으로 쓴 거예요. 하나는 양희경이가 본 우리 언니, 하나는 우리가 본 우리 아버지, 이렇게 2회에 걸쳐서 했던 공연인데 <여성시대> 작가가 거기다 객관적인 시선을 부여해서 다시 정리를 해준 거죠. 서른아홉이 되고 보니, 아버지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겠더라고, 되어보니 서른아홉은 별 거 아닌 나이더라는 고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품 내내 어떤 사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담담하게 관조하는 시선이 느껴졌어요. 내가 겪은 일들을 다보여줄 수는 없죠.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고요. 그런 걸 싫어해요. 아마 이 나이가 되면 다 싫어할 거예요. 물론 사는 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지만 굳이 그걸 또 극적으로 표현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냥 담담하게, 돌이켜 볼 수 있는 만큼 돌아보는 거죠.
한 평생을 공연장에서, 방송에서 불러왔던 노래를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다시 부르기로 한 계기가 있으세요?
해마다 콘서트 플롯을 짜면서 주변의 친한 사람들에게 여태까지 내가 했던 공연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이 뭐였냐를 물었는데 다들 ‘드라마가 있는 콘서트’를 꼽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이걸 가지고 우리가 무얼할 수 있을까, 그래, 뮤지컬 괜찮겠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거죠. 그동안 불러온 노래를 뮤지컬로 순열 조합을 다시 하면서, ‘이렇게 한 사람의 노래가 일부러 맞춘 것처럼 그 사람 인생에 딱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다’는 이야기를 대본 작업을 마지막으로 해준 박금선 작가와 연출하는 이종일 감독에게 들었어요. 추상적이지 않고 생활 속에서 우러난 노래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가?’ 했는데 어쨌든 내 노래를 어디다 끼워 넣는 건 내가 하는 작업은 아닌 것 같아서 그건 쭉 나와 같이 콘서트를 해왔던 반주 팀의 일원인 신지아 음악감독과 박금선 작가가 함께 해줬어요. 자기 것에는 아무래도 눈이 가려서 잘 못 봐요. 선선한 객관적 거리가 필요하죠.
보통 주크박스 뮤지컬이라고 통칭하는 이 양식으로 <맘마미아>부터 최근의 <광화문 연가>까지 있지만 그 곡을 부른 아티스트가 작품에까지 직접 출연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굉장히 신선한 도전이고, 부담스러운 작업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처음이면 부담 만발 했을지도 모르지만 ‘드라마가 있는 콘서트’로 이미 했던 작업의 뮤지컬화이기 때문에 ‘파이팅!’하면서 도전하는 걸로는 난 이미 이전의 경험이 있는 거죠. 또 그 동안 세월이 더 흘러서 내가 나를 보는 객관적인 느낌? 영화 보듯, 드라마를 보듯이 내 이야기를 이렇게 보는 그 거리도 더 생긴 것 같아요.
‘드라마가 있는 콘서트’를 ‘뮤지컬’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어려웠고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뮤지컬이기 위해서 뭐가 들어가야겠다, 뮤지컬이기 위해서 여기서 겅중겅중 춤을 춰야겠다, 난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구조가 탄탄하면 거기 춤이 들어가든 빠지든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난 전문적인 춤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거든요. 나는 나 생긴 만큼의 분량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연기는 나보다 30년 이상 앞서 있는 내 동생이 있으니까 걔한테 기대서 가고, 또 나보다 한참 젊은 뮤지컬 배우들이 있으니까 그이들에게도 기대하고. 나이가 들면 이렇게 기대고, 적당히 일을 뜯어서 남에게 맡기도 얹혀서도 가는 그 맛이 있어요. 굳이 또 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목숨 걸고 다 한다, 이건 아니고요, 그만큼까지 무리를 하면서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나는 입문이니까, 여기서 모든 걸 다 내가 보여줄 수 없죠. 여기서 시작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내년부터는 여기서 또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죠.
동생 분께 엄격한 연기지도를 받고 계시나요?
제가 12년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남의 사연을 쭉 읽어왔어요. 양희경이가 말하기를 ‘연기에서 리딩 만 한 학습은 없다’, 언니가 남의 사연을 읽으면서 뛰어난 리딩을 할 수 있는 훈련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리딩이 연기에 기본이구나, 난 그것도 처음 알았네. 몰랐어요. 그래서 나 자신도 지금 이렇게 시작을 하면 내년, 또 내후년에는 어떤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굉장히 기대에 차 있어요. 계속 이어나가면서 나도 그 속에서 좀 더 다른 몫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두 분이 함께 작품을 만든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다 싶은 게 저도 어렸을 때 여동생과 함께 뭔가를 만들면서 놀았고, 대부분 그런 경험들이 있지만 조금만 자라도 그런 놀이들은 안 하게 되잖아요.
그래요. 우리는 집에서 노는 게 주로 상황극, 역할극이었어요. 옛날에, 우리 초등학교 때는 티비도 없었으니까 셋이서 연기를 하면서 놀았어요. 뭐든 이렇게 적당히 만들어서 막내 동생까지 셋이 그걸 하면서 많이 놀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 집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도 애들 셋이서 그러고 놀면서 이겨 나갔어요. 끊임없이 재현하고, 그걸 통해서 웃음을 찾고, 언제나 같이 웃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심리 치료극이더라고요. 전문가들이 사이코드라마를 통해서 이렇게 저렇게 정신적인 상처들을 치료 한다는 걸 알고서야 ‘이야, 우린 어렸을 때 그냥 그렇게 놀았던 건데 저런 분야가 아예 따로 있구나’ 하면서 놀랐죠.
어린 시절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정작용처럼 서로 자기 상처를 치유해나간 셈이네요.
그렇죠. 그거라도 안했으면 애들이 얼마나 미쳐버렸겠어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그걸 읽고, 듣는 과정들도 다 그런 심리치료의 과정 같기도 합니다.
맞아요. 정확한 지적이에요. 그게 자기객관화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인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라디오에서 나올 때, 거리를 두고 그 일을 생각해보게 되고, 또 그것보다 더 지독한 상황인데 아무데도 털어놓을 데가 없는 사람이 `어머,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하면서 귀 기울이다가 역시 자기를 객관화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기 안의 상처받은 어린 아이를 드러내고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의 메시지를 보내는 게 인터넷에 아주 짤막한 리플로 모여요. 별 것 아닌 듯한 그런 아주 작은 목소리들이 굉장히 많이 모이는데 어쩔 때는 수천 개씩 모이는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어떤 거대한 연대, 눈에는 안보이지만 큰 어깨동무가 이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원래 뮤지컬은 작품을 계속 공연하고 배우가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 작품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어디만큼 왔니>에도 젊은 시절은 다른 배우가 연기하지만 ‘양희은’이라는 역을 다른 배우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조금 자연스럽지 않을것 같아요. 내가 연기를 좀 못해도 내가 나답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걸 계속 하려면 건강해야겠죠. 몸은 죽을 지경이지만 어쨌든 아침에는 맑은 정신으로 눈을 깨고 그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조건반사처럼 따라붙는 수식들이 있습니다. 청년문화의 상징이라든가, 저항, 시대정신 같은 그런 거대한 말들을 지고 시대를 넘어서 살아간다는 게 쉬울 수 없는 일 같습니다. 너무 순결한 정신들의 상징이 되어버리면 작은 흠도 크게 부각되기 마련이고, 보통 사람의 실제 생활에서 멀어진 채 공허한 이상에만 치우쳐버리는 위험도 있고요.
나는 일하는 사람 없이 살아요. 이를테면 시장도 내가 보고 다듬어서 음식 만들어서 남편 도시락 싸요. 가끔 전철, 택시 타요. 그리고 난 사람들 눈동자에 비친 양희은이, 그걸 보면서 살지 않아요. 뭐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갖든 간에 그건 그 사람의 자유고, 티비에서 플러그가 빠진 뒤에 티비 밖에서, 라디오 밖에서 사는 나는 진짜 양희은이잖아요. 전원이 꺼지면 사라지는 내가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실제의 내가 또 있다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동자에 비친 양희은이에 맞춰서 살지는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이미지에 사람들이 걸고 있는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을 굳이 깨트릴 것도 없지만 굳이 키우지도 않아요. 사실 깨트리는 쪽으로 많이 가기는 하죠. 난 그런 사람 아닌데요? 하면서. 그런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뭐 굳이 내가 시대의 짐을 지고 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얼마 전에 고은 시인을 만났는데 그 시인이 날더러 ‘너는 짐꾼이야, 너는 보부상이야, 너는 짐을 지니까 양희은이지 짐을 안지겠다고 하면 니가 무슨 양희은이야.’ 그러시더군요. ‘짐을 내려놓지 말아라, 자유롭지 말아라’라고 하시던데(웃음) 뭐 그렇게 보시는 분도 계시는 거고요.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양희은 편은 참 멋있어요.
양희은과, 양희은의 비겁할 줄 모르는 통기타, 치사할 줄 모르는 노래와… 이제 시구도 잊어버렸네. <어디만큼 왔니>에도 그 시가 나와요. 여튼 그 분은 또 나를 그렇게 보시지만 나는 매일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직업이 하필이면 노래하거나 라디오 진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일을 하는 사람인거죠. 40년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그 덕분에 나보다 더 키워진 양희은도 있을 수 있겠고요. 그렇지만 또 평범한 주부의 일상을 사는 나한테는 노래하는 일도 일이지만 도시락 반찬 만드는 일도 일이고 그렇죠.
그렇지만 노래하는 일이 훨씬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
노래를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죠. 아주 하기 어려운 숙제처럼. 처음부터 ‘아침이슬’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노래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뛰어넘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뭐, 됐다. 굳이 뛰어넘을 것도 없고 아주 소소한 것들도 노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 어떤 명분이나 명제가 큰 것들만이 노래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그때는 그 노래가 두고두고 오래 살아남아서 생명력을 이어갈지 생각도 못했고요. 생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거고요.
인생보다 긴 노래가 되었어요.
글쎄.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이. 이 노래가 히트 치면 돈을 벌어야지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돈 없는 쪽으로만 돌아가는 분이시고요.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노래에 담겨 있는 맑은 마음이 공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더 부르시기 어려운 노래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뭐 어쨌든 ‘아침이슬’을 세상에서 나만큼 많이 부른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세상에 많이 부른 사람을 따라갈 건 없어요. 제일 무서운 힘이죠.
제일 잘 알게 되나요.
그렇죠. 내가 사랑니를 뽑아서 아플 때도 그 노래를 불렀고, 뭐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아무 느낌이 없을 때조차, 정말 인생의 모든 요철을 같이 통과하면서 부른 노래이기도 했고, 한 때는 안 부르고 싶은 노래이기도 했고.
한 곡을 수십 년 동안 부르다보면, 스무 살 때와 서른 살 때, 또 그 이후에 그 노래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계속 변할 것 같아요.
달라요. 그러니까 그게 힘이라는 거예요. 하여튼 뮤지컬에서도 그 곡이 1막의 끝이에요.
대본의 후반 작업과 선곡과정에서 잘려나간 것 중에 아쉬운 건 없으세요?
아뇨, 그런 건 없어요. 어쩌면 여러분들은 좀 아쉬울 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쉬운 게 없어요.(웃음)
<어디만큼 왔니>라는 뮤지컬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점이 있으세요?
없어요. 두려움 밖에는. 내가 연기를 처음 하니까 전달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죠. 어느 것 하나를 고를 수 없이 다 힘들지만 못 외우는 것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어요. 우린 라디오도 대본을 보고 읽어본 적이 없거든요. 다 그냥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그래서 남이 외우라고 준 것은 정말 못 외어요. 이건 내가 쓴 글이 기본인데도 남의 손을 한 번 거치면서 호흡이 달라지니까 못 외우겠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무서워요. 그래도 이제는 대본을 다 외워서 홀가분하고, 그게 제일 자랑스러워요. 수십 번을 해도 수십 번이 멍하고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는데 다 외우고 나니까 그게 제일 기분이 좋아요. 예, 대본을 완벽하게 외웠다는 게 스스로 대견합니다. 이 60세의 머리로.(웃음)
그래도 이 공연을 통해서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일이 있으세요?
어디만큼 왔는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나도 그렇고. 돌아볼 때 알잖아요. 나 지금 어디 서 있나. 어린 관객들도 마찬가지에요. 돌아봐야 내다보죠. 돌아보는 건 참 좋아요.
“노래라는 게 이렇게 무서워요. 함부로 하면 안돼.” 인터뷰 도중, 그녀는 어제 밴드 멤버를 통해 전해 받았다는 편지 한 통을 보여주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세상 끝으로 가는 길에 당신을 만났다고, 당신의 노래가 곧 당신이니 우리는 이미 만난 것이고, 이제는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에 처음 들은 당신의 노래에 살아도 된다는 위로를 받았다는 고백이었다. 편지지 세장을 빽빽하게 채운 그 애틋한 사연은 다시 양희은이라는 큰 나무가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는 땅의 흙으로 쌓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껏 온 길이 어느 만큼인지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지표들이 있다. 큰 나무와 별, 바위 같은 묵직한 존재들. 그 나무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노래하고 이야기한다면 잠시 등을 대고 앉아서 들어볼 법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5호 2011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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