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미디어 일루저니스트
독보적인 스타일과 기술력으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영상디자이너 정재진. 4월 공연하는 작품만 살펴봐도 뮤지컬 <아랑가>, 전통 창작극 <가온>, 연극 <헨리 4세>, <지구를 지켜라>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이 모든 작품의 영상이 탄생한 곳은 어떤 모습일까? 정재진 디자이너는 올해부터 제작 팀과 함께 사용하던 작업실을 나와, 그의 스승이기도 한 영화·게임 컨셉 디자이너 조민수,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박우현과 공동 작업실을 쓰고 있다. “서로 다른 분야지만 시각적인 영역을 다룬다는 공통점 때문에 좋은 자극을 주고받아요. 조민수 감독님에게는 그림을 다시 배우고 있고, 박우현 스타일리스트에게는 개인 퍼포먼스 때 입을 의상을 부탁드린 상태예요.” 최근에는 전시와 마술쇼까지 섭렵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정재진 디자이너. 그 다양한 관심사와 행보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업실을 찾았다.
영감의 원천, 꿈과 판타지
작업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책장을 가득 메운 아기자기한 소품들. 그중에는 꽤 오래돼 보이는 색연필 세트와 게임기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선물 받은 것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동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부모님이 일반적인 한국 부모님들과는 좀 달랐어요. 두 분 다 미술에 관심이 많으셔서, 생일 때마다 각종 색연필 세트를 선물해 주셨죠. 특히 매해 크리스마스이브 머리맡에 놓여있던 최신 게임기는 제게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w. 게임 속 판타지 세계에 깊이 매료됐고, 현실과 다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매체에 관심이 커졌어요.”
게임 속에서 지도를 펼치고 미션을 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경험은 그가 작업한 작품 속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가무극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연쇄 살인 사건의 장소와 단서를 표시한 지도 영상으로 관객들이 다음 전개를 유추해 볼 수 있도록 했다. 뮤지컬 <루팡>의 인트로 영상에서도 지도 위에 각 장소에서 벌어질 사건을 그림으로 나타내 복선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영상으로 관객에게 직접적인 정보를 주기보다는 이어질 내용에 대한 암시를 주는 걸 선호해요. 이게 다 게임의 미션과 트릭, 힌트 개념과 관련이 있는 거죠.”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그림책 역시 그의 영감의 원천이다. “해외에 나갈 때면 항상 서점에 들러 그림책을 사와요. 흔히들 그림책은 어린아이만 보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어른이 봐도 좋은 스토리텔링과 환상적인 이미지가 가득하거든요. 특히 해외 그림책의 독특하고 풍부한 색채를 보며 많이 배워요.” 그는 자신의 영상에서 색채감이 돋보이는 것은 모두 어릴 적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그림책을 섭렵한 덕분이라며 웃었다.
때로는 꿈을 통해서도 영감을 얻는다. 작업이 안 풀릴 때 꿈에서 해답을 얻은 적이 많다는 그는 영감을 이어가기 위해 매일 꿈 일기를 쓰고 있다. “꿈에서 총천연색 전시를 볼 때가 많거든요. 그걸 잊지 않기 위해 매일 그림으로 기록해 두고 있어요.” 꿈은 그에게 현실과 다른 차원을 탐험할 수 있는 매개체다. “항상 다른 세계나 판타지에 대한 갈망이 컸어요. 결국 지금의 일을 하게 된 것도 영상 매체가 이런 판타지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마술사 이은결과 전시 작업을 함께하면서 미디어 아티스트도 마술사와 같은 ‘일루셔니스트’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미디어 아트 역시 시공간을 다차원적으로 해석하는 ‘마술적 퍼포먼스’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무대 위의 일루션을 다루는 ‘현대판 샤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죠. 망자가 레테의 강을 건너며 이승의 번뇌와 고통을 망각하듯이, 관객들이 제가 만든 일루션을 보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무게를 잊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첨단 영상을 다루는 직업이지만, 꿈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거나 사람들의 영혼과 감성을 어루만지는 아날로그적인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선물해 준 색연필 세트.
정재진 디자이너가 수집한 각종 그림책과 팝업북.
죽음이라는 삶의 이면
정재진 디자이너가 대표로 있는 영상 제작 팀 ‘에피타프(Epitaph)’의 이름은 사전적으로 ‘묘비명’을 뜻한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문장의 묘비명으로 기억되듯,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을 만들자는 의미에서 선택한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이 탄생한 배경에는 ‘죽음’이란 테마에 대한 정재진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관심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 프로젝트로 해외 묘지를 돌아다니며 촬영을 하고 있어요. 그때마다 제가 하는 추모 퍼포먼스가 있는데 최근에 이걸 좀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웰엔딩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에서 릴레이 퍼포먼스를 해나갈 예정이에요.”
정재진 디자이너가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생 무렵 자신을 제외한 친한 친구들이 모두 교회 캠핑에 참여했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부터다. “왜 나만 살아남은 것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일가? 이런 생각들로 점철된 청소년기를 보냈죠.” 그러던 중 가족같이 여기던 고양이까지 죽음을 맞자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가톨릭 성당 장례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시신을 염하는 것을 옆에서 돕고 추모하는 활동이었어요. 이 활동을 통해 수많은 주검을 접했는데,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마지막 표정에 그 사람의 생애가 다 드러나 있더라고요. 그때 든 생각이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니 정말 후회되지 않게 살아야겠단 거였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 작은 재능이 자기만족이 아닌 타인의 삶을 위해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관심을 갖게 된 영역이 바로 ‘웰엔딩(Well-Ending)’이다. 그는 시민단체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에서 활동하며 세계 각국의 장례 문화를 영상에 담았다. “해외의 선진 장례문화를 보면 죽음의 문화 안에 모든 예술이 담겨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묘비만 봐도 그 안에 회화, 조각, 문학의 요소가 모두 들어 있거든요. 그러한 예술적 표현은 죽음조차도 친숙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유연성을 띠고 있죠.” 예술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음을 깨달은 그는 이러한 생각과 경험을 미디어 아트로 표현하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연출해 볼 수 있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오르골을 돌리면 그 사람이 선택한 이미지와 음악이 실시간으로 재생되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치였어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 생각함으로써 오히려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거죠.” 실제 말기 암 환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돕기도 했다. “환자분이 가족에게 남기는 영상을 편집하는 내내 눈물을 쏟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제가 그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슬픔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이별이 된 느낌이었죠.”
죽음에 대한 남다른 관점은 그의 영상 작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저는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아요. 오히려 정화와 재생의 기회로 여기죠. 그런 관점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가무극 <신과 함께-저승편>이었죠. 이 작품의 저승은 마냥 암울하고 두려운 공간이 아니라 주인공의 죄가 정화되고 윤회를 통해 또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지는 공간이기도 해요. 그래서 영상으로 이승을 연상시키는 각종 상호와 간판을 등장시키는 등 친숙하고 코믹한 요소를 활용했어요.” 뮤지컬 <아랑가>에서도 등장인물의 죽음은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된다. “아랑과 도미가 죽을 때는 꽃이 퍼져 나가는 영상을 사용해, 죽음을 통한 두 사람의 재회를 표현했어요. 마지막에 개로왕이 자신의 눈을 찌를 때도 화면을 밝게 퍼져 나가도록 만들었어요. 그의 죽음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에서 벗어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영상이 보는 이에게 색다른 느낌을 준다면, 그건 저 자신의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영상 작업에 사용한 손그림들.
정재진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데이비드 린치, 안토니 타피에스, 로베르 르빠주, 로버트 윌슨에 관한 책.
융복합 시대의 전방위 아티스트
늘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닌다는 정재진 디자이너는 그처럼 다양한 경험이 작품을 해석하고 인물의 심리를 분석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회화를 전공한 그가 무대와 영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연기 경험을 통해서다. 그는 학부 때부터 타 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며 배우나 무용수로 활동했다. “데뷔는 연극 <우리는 나발을 불었다>의 공주리 역할로 했어요. 사회 부조리를 몸짓으로 표현해야 해서 몇 달간 급히 한국무용을 배웠죠.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단역으로 참여한 적도 있어요. 기차에서 장동건이 구해주는 여자 역이었는데, 대사는 겨우 비명 한 마디였죠. 하지만 당시 이명세 감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영상의 미학적 표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자연스레 미디어 아트와 디지털 퍼포먼스로 관심사를 넓히게 됐다. “공연에서 실시간으로 표현되는 영상과 배우의 신체적 언어에 관심이 생겼어요. 처음 영상디자이너로 참여한 공연도 무용이나 신체 퍼포먼스 쪽이었죠. 제가 작업한 영상이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또 하나의 배우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유효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는 영상 디자인뿐 아니라 세트 디자인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2008년 연극 <죽을 수만 있다면>에서는 납골함으로 미래 도시를 표현한 무대를 선보였고, 2009년 연극 <스튜디오 배우열전-통닭>에서는 응모했던 무대 컨셉이 출연 배우들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 당선됐다. 작년 공연한 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과 현재 공연 중인 연극 <헨리 4세>는 아예 그가 세트와 영상을 함께 디자인한 작품이다. 영상디자이너가 영상이 프로젝션 되는 공간을 함께 디자인하는 것이 무대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무대를 세트로만 한정지어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대 안에는 세트와 영상이 포함되어 있어요. <신과 함께-저승편>의 LED 바닥처럼 영상 하드웨어 자체가 세트 역할을 할 때도 있고요. 영상디자이너는 영상 콘텐츠만 제작해서 세트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공간에 영상을 접목시켜 효과를 극대화할지 함께 연구해야 해요.”
최근에는 무대 밖으로도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4월에는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파사주: 장 피에르 브리고디오 전>에 프랑스 현대미술가 장 피에르 브리고디오와 함께 작가로 참여한다. 5월에 열리는 나주 세계친환경디자인박람회에서는 전시감독을 맡았다. 일부 전시 공간을 박동우 무대디자이너와 함께 디자인해, 미디어 아트와 무대적 요소를 맛볼 수 있는 색다른 박람회를 선보일 예정이다. 같은 달, 마술사 이은결의 20주년 기념 공연 〈ILLUSIONIST 이은결>에도 참여한다. “한때는 사람들이 제게 한 우물만 파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대적 트렌드가 융복합이잖아요. 그동안 제가 쌓아온 경험이 빛을 발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나가고 싶어요.”
인형마다 죽음의 사연을 갖고 있는 ‘리빙 데드 돌’ 시리즈. 오른쪽 인형은 쥐에 물려 바이러스로 사망한 소녀의 실화를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죽음의 영역이 친숙해지면 이처럼 괴이한 외모도 공포보다 흥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게 정재진 디자이너의 설명.
문광부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참고한 오르골. 악보에 음계를 펀칭하여 넣고 돌리면 즉석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웃집에 살던 가수 전인권이 흥미를 보여 빌려준 적이 있는데, 답례로 ‘도리(정재진 디자이너의 영어 이름) 도라이’라는 노래를 작곡해 줬다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1호 2016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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