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비슷한 게 너무도 많아
<인터뷰>
익숙함과 똑같음
학위논문을 쓰겠다고 결심한 학생들이 똑같이 늘어놓는 푸념이 있다. 자기가 쓰고 싶은 주제를 찾아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써놨고, 비슷한 주제로 옮겨 타려 해도 그것 역시 온갖 제목으로 벌써 나와 있더라는 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남들이 다 해버렸으니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이런 한탄이 헛된 건 아니다. 내 생각이 그리 독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비슷비슷한 주제 안에서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낼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사람이나 예술 하는 사람에게 독창성은 환상이자 강박이다. 전에 없던 새로움이어야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독창성은 없다. 독창성이란 지금껏 있어 왔던 것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창성은 전에 없던 새로움이라기보다는 약간 다른 생각, 약간 다른 해석, 약간 다른 표현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익숙한 것들의 축적에서 만들어지는 약간의 차이. 이것이 독창성의 토대이다.
창작뮤지컬에 비슷비슷한 공연이 넘쳐나도 새삼스레 작품에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이래서이다. 새로움은 익숙한 것 사이에서 삐져나오게 마련이니까. 비슷한 것의 반복에서만 미세한 차이는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요즘 창작뮤지컬 동네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코드는 뭘까? 그 중심에는 두어 명 남짓한 남자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작품들이 있다. 등장하는 인원이 적은 만큼 사건보다는 심리가 위주를 이루고, 관객이 선뜻 이해하기 힘들도록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에, 밴드나 피아노 한 대로 최소화된 음악과 배우의 역량이 폭발력을 발휘하는, 장르의 스타일을 지향하는 작품들. 일일이 제목을 늘어놓지 않아도 벌써 연상되는 작품이 꽤 있을 거다. 완성도에 비해 관객의 지지가 열성적이기에 흥행을 향한 노림수 기획으로 폄훼되기도 하지만, 설사 흥행을 우위에 놓았다 하더라도 이런 기획의 예술적 가능성을 저평가할 이유는 없다. 조선 시대의 판소리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바탕에 광대와 고수만으로 공연이 완성되는 저비용 고효율의 경제성이 있었음을 기억해 보시라.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면서, 작가의 스타일을 담아낼 수 있고, 배우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이런 공연이 많아지다 보면 그 안에서 독창적인 작품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뮤지컬 <인터뷰>를 보고 나니 그 꿈은 아직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인터뷰>는 두 명의 남자 배우가 등장하는(여배우도 있긴 하지만 존재감은 미미하다) 심리 스릴러로, 건반 하나만으로도 강렬한 음악적 포스를 담아내는, 에너지의 밀도가 높은 공연이라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경향과 같은 맥락에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익숙하다. 하지만 이 익숙함을 지지하기는 어려운 것이, 익숙함의 무게중심이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익숙함은 생산적 반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퇴행의 위험에 가깝다. 형식의 익숙함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내용의 익숙함은 의미 없는 반복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문제는 형식적 익숙함이 아니라 설정의 똑같음에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이 작품의 핵심 소재는 다중인격이다. 다중인격의 소유자가 벌인 범죄의 전모를 밝히는 과정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다중인격의 모양새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거다. 작년에 시청률 고공 행진을 기록했던 드라마 <킬미힐미>가 연상되더라. 물론 이 작품과 드라마의 톤은 완전 다르다. 뮤지컬 <인터뷰>는 연쇄살인, 근친상간, 존속살해 등 자극적인 소재란 소재는 다 모아놓은 만큼 작품의 톤이 어둡다. 하지만 드라마는 상큼 발랄 경쾌한 재미를 잃지 않았으니 단지 다중인격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이 두 작품을 유사품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중인격,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설정의 디테일까지 같다면 이건 얘기가 달라진다. 하나씩 나열해 보자. 일단 등장하는 인격의 구성이 거의 같다. 겁 많고 소심한 중심 인격에 폭력적 인격, 어린 소년의 인격, 그 소년의 쌍둥이 누나, 거기에 이름이 없는(노네임과 엑스!) 인격까지. 특히 이름이 없는 인격이 이 모든 인격의 핵심을 차지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똑같다. 이 인격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실소가 새어 나왔던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이렇게 인격이 해리된 이유가 아동 학대인 것도 똑같다. 친부모의 보살핌에서 방기되어 새아빠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설정이나, 힘이 없는 주인공이 폭력을 당하는 다른 아이 때문에 인격이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도 이미 익숙하다. 자기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한 이름 바꾸기나 기억상실, 분열된 인격이 등장하면서 끔찍했던 공간에 불을 지르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야기의 잔가지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는 한다. 배신당한 사랑 때문에 폭력적인 자아가 등장한다든지, 학대의 기억 때문에 존속살해를 도모한다든지, 이런 어두운 상상력은 분명 드라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이나, 외로운 아이가 엄마를 죽이는 장면 등에서는 문득문득 <블랙메리포핀스>나 <필로우맨>이 떠오르더라. 아마도 극단적인 소재가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소재가 비슷하면 사건이나 표현도 비슷해지게 마련이니까. 에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이런 유사성을 제외했을 때 <인터뷰>라는 제목의 이 작품만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다른 작품과 비슷한 점은 따지지 말고 그냥 이 작품 자체로만 다시 생각해 보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봐도 이 작품은 뭔가 어색하다. 복잡하게 이야기를 꼬아보지만(그래서 싱클레어 고든이 누구라는 거야?) 그 이유는 싱거울 뿐이고, 관객에게 슬쩍슬쩍 단서를 주는데 그 단서의 앞뒤가 설명되지도 연결되지도 않는다(유진 킴은 지미를 어떻게 아는 거야?). 추리가 됐건 스릴러가 됐건 이야기에 짜임새가 생기려면 분명한 사실과 예상 못한 반전이 연속되어야 할 터. 이 과정이 반복될 때 확실한 것일수록 더욱 믿을 수 없는 역설적인 긴장이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긴장은 극이 끝나가도록 도대체 이야기의 앞뒤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원초적 결함에 있으니(이 추리 작가와 다중인격자는 무슨 관계인거야? 서로 아는 사이인 거야?) 장르의 문법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셈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모든 의문이 풀리는 한순간이 있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장면이 그것인데, 지금까지의 억지스러움을 한마디로 설명해주는 거다. 인터뷰인 줄 알았지? 이건 최면이었어. 추리 작가인 줄 알았지? 정신과 의사였어. 처음 만나는 사이인 줄 알았지? 다중인격인 거 다 알고 만나는 거였어. 이럴 수가. 이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다름 아니다. 잔뜩 벌려놓아 수습이 안 되는 이야기의 끝에 신이 등장해서 모든 것을 정리해 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최악의 극작법. 만일 마지막 장면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지 않으려면 극이 진행되는 동안 다중인격자를 상대하는 추리 작가의 정체를 향한 의심(오필리어 살인 사건이라는 멋진 설정이 있으니까!)도 차곡차곡 쌓였어야 했다. 그에 대한 의심과 질문이 쌓여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짜잔, 정체가 밝혀져야 하는 거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애초부터 없다. 그러니 마지막 결론이 싱거울 수밖에. 이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저는 이 사람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박애주의만 빛난다. 의욕은 차고 넘치지만 그 의욕을 담아내기엔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빈틈 많은 작품이다, <인터뷰>는. 그 의욕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중인격의 극적 전환을 설명하느라 격정을 드러내는 음악은 극의 과잉된 에너지와 어우러져 자주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오롯이 표현해 내는 배우 김수용의 집중만큼은 무대에서 빛난다. 그의 성실함에 박수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3호 2016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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