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지키거나 혹은 넘어서거나, <국경의 남쪽>
‘한국적’인 ‘뮤지컬’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예술단의 작업을 보자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매해 신작을 내놓는 생산력도 놀랍지만 ‘한국적 뮤지컬’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더 놀라우니 말이다. 서울예술단이 추구하는 공연 형식은 가무극이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노래와 춤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극을 가리킨다. 광범위하기도 하지. 동아시아 문화권의 ‘악’이나 힌두 문화권의 ‘나띠야’처럼 원래 공연의 개념에는 노래, 춤, 이야기가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장르 개념으로 볼 때 가무악은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달리 말하면 뮤지컬일 수도 있고 음악극일 수도 있으며 무용극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가무극의 개념은 사전이 아니라 맥락에서 만들어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무극을 설명하는 말에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한국적인 것’도 우선은 ‘서양 뮤지컬과는 다른 것’을 가리키는바, 이 역시 구체적인 내용과 형식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한계는 감안해야 할 터다. 가무극은 언제나 실체가 아닌 지향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적 뮤지컬을 표방하는 서울예술단의 모든 작업은 가무극이라는 개념을 완성하기 위한 실험이다.
초창기의 실험에서 방점은 ‘한국적’인 것에 있었다. 이때 한국적인 것이란 형식으로는 전통의 춤과 음악이요, 소재로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이며 주제로 보자면 계몽 의식이 강조된 진지함이었으니, 가무극에서 음악극의 면모보다 음악이 가미된 계몽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이 연상됐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작품의 성과로 보자면 그리 성공적인 결과는 아니었던 셈이다. 잠깐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자면 서울예술단의 작품을 처음 봤던 때가 1994년이니 꽤나 오래된 얘기다. 동학혁명을 다룬 작품이었는데 희곡을 원작 삼은 만큼 음악극이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데다 그나마 음악이 끼어들면서 이야기가 더 늘어지는 바람에 엄청 지루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가무극을 보기 직전에 하필 <캣츠> 오리지널 내한 공연을 봤던 탓도 컸을 거다. 뮤지컬과 가무극을 동시에 체험한 건데, 눈과 귀를 흥분시키는 뮤지컬에 비해 가무극은 희곡과 전통의 강박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 후에도 여러 편의 가무극을 봤지만 첫 기억과 크게 다른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이때의 ‘한국적’ 뮤지컬은 언제나 결과의 완성도보다 의도의 당위성이 강했더랬다.
그런데 최근의 작업에서 도드라지는 건 ‘뮤지컬’로의 중심 이동이다. 뮤지컬계에서 활발하게 작업하는 창작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과의 협업을 통해 뮤지컬의 형식적 문법뿐 아니라 대중적인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화로부터 만화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무게는 가벼워졌고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더라도 이야기는 대중 서사의 논리로 구성되었다. 공연의 화술은 대본의 재현에서 연출의 미장센으로 확장되었으며 음악은 극의 흐름을 이끄는 중심 논리로 자리 잡았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일차적 수확은 물론 대중적인 인정을 받는 다수의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적이라는 수식어의 외연이 ‘한국의 관객’을 포함하는 데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한국적인 작품이니 관객들에게 친숙할 거라는 관념적 접근이 아니라, 관객들이 좋아하는 작품 안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경험적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뮤지컬’ 가무극의 개념은 서울예술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젊은 관객들의 눈높이와 어긋날 수 없을 터.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예술단의 가무극이 관객들과 행복하게 조우했던 지점이 어디인지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울예술단의 ‘국경 넘기’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국경의 남쪽>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과감하다. 이 작품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서울예술단 작품과 비교해 볼 때 결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춤보다는 음악이 위주이고, 신화나 역사가 아닌 현실의 리얼리티가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무대의 분위기도 아날로그에 가깝다. 서울예술단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공연 화술을 잠시 미뤄둔 채 새로운 문법을 또다시 시도한 셈이다. 지금껏 서울예술단의 작업은 뮤지컬의 대중적 문법을 수용하면서도 이야기의 축은 명성황후나 윤동주, 세종대왕 등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서 거의 떠나지 않았다. 시각적 스펙터클이 담당하는 몫도 적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국경의 남쪽>의 주인공은 탈북자이다. 소소한 사람들의 절박한 상황이 이야기의 중심이기에 스펙터클 또한 당연히 소박하다. 화려한 스펙터클보다는 진솔한 휴머니티에 초점을 맞춘 만큼 극의 분위기는 연출의 미장센보다 이야기의 진정성에 크게 기댄다. 한국적인 것에서 뮤지컬다운 것으로 경계선을 넘은 것처럼, 뮤지컬의 환상에서 현실의 리얼리티로 또 한 번의 경계선을 넘으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과감한 시도가 원숙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경의 남쪽> 역시 결과보다 의도가 앞서는 공연에 머물렀으니 말이다. 그 중심에는 이야기가 있다. 북한에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전반부에 비해 남한에서의 엇갈린 삶을 보여주는 중반부 이후가 지루했던 건 이야기의 두께가 여러 면에서 얄팍했기 때문이다. 엇갈리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위로하는 사랑의 애틋함은 구축되기보다는 제시될 뿐이어서 관객의 감정이 따라가기도 전에 상황이 앞서가고 만다. 남한에 정착하려는 북한 사람들의 안간힘은 처절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어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상처와 상실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결국 함께할 수 없는 연인을 통해 국경의 남쪽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해져야 하건만 글쎄, 이건 끝까지 모호하더라.
사실 이야기보다 더 아쉬웠던 부분은 이 작품의 공연 언어이다. 경사로로 길게 이어진 이동식 무대는 경계선과 연결선의 이중적 상징으로 쓰임새는 명백하지만, 밑에 조명등이 훤히 보이는 만듦새에 앉아있는 배우들의 까치발로 옮겨지는 모양새를 보자면 영 예쁘지가 않다. 오로지 기능만 생각하고 만든 무대 같다고나 할까. 안무도 마찬가지다. 서울예술단의 대표적인 공연 화술인 군무가 거의 사라진 것도 아쉬운데 작품 전반에 걸쳐 춤 자체의 비중이 거의 없는 거다. 심지어 음악에 안무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마저도 그렇더라. 선호의 가족들이 인생을 코미디에 빗대서 부르는 뮤지컬 넘버나, 탈북 브로커를 사칭한 사기꾼이 등장하는 넘버에서도 적극적인 안무는 찾아볼 수 없다. 배우를 실은 수레를 분주하게 미느니 배우의 스텝을 바쁘게 하는 게 더 재미있었을 거다.
<국경의 남쪽>이 애매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그 안에서 지금껏 서울예술단이 쌓아왔던 성과가 너무나 쉽게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최근 서울예술단이 거둔 나름의 성과는 공연 화술에 힘입은 바 크다. 예술단의 트레이드마크인 춤을 비롯해 단순한 듯 멋스러운 무대 구현이나 음악과 어우러진 세련된 미장센은 예술단의 작품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일등 공신이었다. 작품의 전체 함량이 다소 부족해도 장면 하나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독특함이 예술단의 브랜드로 이어졌던 거다. 때로는 컨셉이 때로는 규모가 그 브랜드를 이끄는 힘이 되었더랬다. 컨셉 대신 주제가, 규모 대신 효율성이 중심을 차지하는 건 좋은데, 이런 시도를 가무극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하기엔 이번 공연의 예를 볼 때 오히려 잃어버린 것이 더 커 보인다. 서울예술단의 정체성은 분명 그들만의 공연성에 있건만 그러한 장점을 거의 살리지 못한 이번 작품에서 서울예술단이 추구하는 가무극의 개념은 다시 모호해지고 만다. 이렇게 보자면 지금껏 서울예술단이 구축한 이미지는 개별 창작자의 개성에 기댄 것일 뿐 그 과정을 통해 예술단이 추구하는 가무극이 어떤 것이어야 되는지 형식과 방향에 대한 고민은 전혀 축적되지 않은 셈이다. 단지 제작의 주체가 서울예술단이기에 가무극 개념이 있는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허망할 노릇이다. 어쩌면 ‘한국적 뮤지컬’로서의 가무극에 대한 논의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서울예술단의 성실함이라면 답을 기대할 수도 있을 터. 그러려면 지금까지 모은 답안부터 먼저 챙길 일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4호 2016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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