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풀지 말아야 하는 달콤한 수수께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입을 열어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막막한 것들이 있다. 지식의 기반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개념이라서 설명하기 곤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마다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경계선이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용어라서 겪는 문제일 때가 더 많다. <로맨스 로맨스>의 두 주인공, 최재웅과 조정은 역시 일상적으로 쓰이지만 깔끔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단어, ‘로맨스’를 붙잡고 암중모색을 하는 중이다.
1995년 3월, 소년은 소녀를 만났다. 미리 말해두지만, 딱히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소년은 소녀를 보기 위해 새벽같이 자전거 페달을 밟지 않았고, 소녀는 소년을 향한 연정에 차마 잠 못 이루고 편지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3년 동안 한 교실에서 비슷한 꿈을 키워나갔을 뿐, 서로에게 각별한 관심을 주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3년 동안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것들이 있었다. 소녀는 소년이 딱히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시험만 치면 자기보다 훌쩍 높은 성적을 받는 것을 보면서 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겉으로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소년이 속으로는 시니컬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소년은 말수 적고 별 것 아닌 일에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얌전한 소녀가 굉장히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랐다. 늘 하고 다니는 반묶음 머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잘 웃어줘서 고맙기도 했다.
친구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데 웃음이 안 나면 미안해질 만큼 심성이 곱고 그만큼 눈물도 많았던 소녀는 선생님께 ‘넌 착해서 배우 못하니까 그냥 시집 가’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상한 마음에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교실 한쪽에 혼자 앉아서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이곳에 잘못 온 걸까’라는 열 몇 살의 상징 같은 고민들을 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고민들까지 포함해서 빛나는 날들이었다. 친구들이 노래하고 연기하고 춤추는 것을 무대 뒤에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고, 용돈을 모아서 갖고 싶던 뮤지컬 음반을 한 장 사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던 때였으니까. 소년과 소녀는 그 시절을 함께 했다.
하지만 수화기를 들어 사춘기의 고민을 나누고,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던 ‘베스트 프렌드’는 따로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교 시절 소년에게 ‘소녀’라고 할 만한 친구는 이름만큼 얼굴도 예쁜 유미였고, 소녀에게 ‘소년’은 딸기우유를 좋아하고, 영어부장인데 영어 숙제를 대신해 줘야 했던 친구 승우였다.
그 때 소년과 소녀는,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들이 얼마만큼 가까운 친구가 되어서 어떤 작품을 가지고 함께 고군분투하게 될지 전혀 몰랐다. 그 작품의 연출가가 ‘넌 배우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시집가’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던지던 바로 그 선생님일 것이라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저는 재웅이랑 되게 친한데, 요즘 연습을 하면서도 느끼고 얼마 전에 <헤드윅>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정말 잘 모르겠어요, 얘가 어떤 애인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면 내가 아는 재웅이가 다가 아닌 것 같아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유난히 자기를 안 드러내요. 보면 볼수록 잘 모르겠고, 그래서 더 끄집어내고 싶죠. 내가 연출이라면 ‘너 그만 감추고 그만 나와!’그러면서 끌어내려고 할 것 같아요.”
“그게 아냐. 난 이게 다라니까. 제일 친한 놈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당황스럽긴 한데… 정은이는, 얘도 방법론적인 면에서 저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뭔가를 표현해야할 때의 성향이라고 할까,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은 얘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재미있기도 한데 가끔, 정은이를 보다보면 나도 저렇겠구나 싶어요. 얘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내 단점도 보이고, 장점도 보이고. 그래서 흥미로울 때가 있어요. 아, 책 좀 읽어야지, 독서를 안 하니까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정은이가 연기하는 걸 보다보면 한번씩 내가 보일 때가 있다는 거죠.”
`저도 그래요. 재웅이를 보다보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냥 봐도 ‘아, 재웅이가 그래서 그런 거구나’라고 바로 공감이 되는 것들이 있고요. 가끔은 내가 나랑 연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걸 우리만 알면 괜찮은데, 김달중 선생님이 우리가 그러고 있는 걸 다 아신다는 기분(느낌)이 드니까 더 부끄러워서 뭘 못하겠는 거예요.”
“몸에 다 배지 않으면,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으면 안 보여주려는 습성이 있어요.”
“조금만 어설프게 가면 그게 분명 단점이겠지만 이게 좋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 작품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니까, 빨리 그 시점까지 가서 선생님 속을 그만 썩여야죠.”
“그럼 우린 세기의 커플이 되는 거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7호 2010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