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뮤지컬 육성 지원사업(이하 창작산실)을 통한 신작들이 연초부터 차례로 선보여졌다. 어떤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고 어떤 매력을 선보였는지 본지 기자들과 정수연 공연평론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경성특사>
박병성 가장 먼저 공연한 <경성특사>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나윤정 추리 활극이라면 결말까지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지는 부분이 있다 보니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조금 떨어졌어.
배경희 추리극의 요소를 다 넣기는 넣었는데 그게 어떤 긴장감을 주거나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 처음부터 이민토와 윤이옥이 특사로 뽑힌 것이 허무했어. 저 두 사람을 어떻게 믿고 신채호가 저런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거지? 이것부터가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서 몰입이 안 됐어.
안세영 게다가 주인공인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이 취업난에 시달리고 꿈을 좇을 수 없는 상황을 지금의 청춘에게도 공감 가게 그릴 거라고 홍보했잖아. 그런데 막상 공연을 보니 첫 노래 가사만 아니면 주인공들이 무슨 사회적 억압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들이 무슨 꿈을 찾아가는지도 알 수 없고.
박보라 상당히 허무한 설정들이 많았어. 이게 뭐야? 이렇게 쉽게 흘러가는 이야기도 있어? 이럴 정도로.
박병성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추리극적인 구조로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힘은 있었어. 복잡한 퍼즐 맞추기를 결국은 해내잖아. 문제는 한 걸음만 들어가면 그 논리들의 허술한 부분이 드러난다는 거야. 노래 스타일이나 춤에서 신선함을 주지 못한 것도 아쉬워.
안세영 추리극이다 보니 관객에게 전달해야 할 정보가 많은데 그걸 시각적으로 연출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봐. 추리 뮤지컬 <셜록 홈즈>나 <뿌리 깊은 나무>처럼 영상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했다면, 관객들도 단서를 얻어 사건을 추리하는 데 동참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나중에 생중계 영상을 다시 보니까 그제야 숨어 있는 단서가 눈에 띄더라고.
정수연 <경성 특사>의 경우 의도는 분명했던 것 같아. 특정한 시대를 선택하지만 거기서 방점을 찍는 요소는 추리잖아. 또 시대가 주는 무거운 강박에서 벗어나 즐겁게 보여주려는 시도를 했지. 지금까지 일제 식민지 시대를 다뤘던 작품들하고는 차이가 있었고, 가벼워지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어. 어떤 시대를 선택했다면 그 시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서사와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모든 것이 전제에만 멈춰 있다는 거야.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부족했다고 봐. 예를 들자면 꼭 신채호 선생이 등장해야 했을까? 인물들이 입고 있는 의상을 봐도 그래. 어떤 최소한의 고증이라든지 그 시대를 왜 선택했는지 하는 자의식조차도 보이지 않아. 또 추리라는 장르를 선택했지만 서사나 연출에서 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 아까 연출력 이야기를 했는데 추리에서는 그보다 먼저 극작이 치밀해야 해. 장치들이 쌓이고 까발려져서 안심이 되는 순간 탁 뒤집혀야 하는데 극작이 엉성해서 이런 매력을 느낄 수 없었지. 추리로 보기에는 너무 엉성해. 뜬금없는 로맨스 집어넣지 말고 차라리 진짜 청년 특사끼리 모험을 하는 이야기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아. 그래도 그 시대의 청년들 역시 청년답게 살지 못했다는 전제를 두는 것은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해.
<청춘, 18대1>
배경희 <청춘, 18대1>은 원작이 연극이잖아. 원작 연극은 어땠어?
정수연 뮤지컬도 그렇지만 연극도 감상적이었지.
박병성 이 작품이 ‘청춘, 18대1’이라는 제목처럼 청춘의 치기 어린 정의감을 그리는 데 충실했다고 봐. 청춘이 가진 에너지나 관념을 극화한 거지. 그런데 왜 이토에가 굳이 댄스파티를 열어서 동경시청장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동경시청장을 죽일 기회는 많았는데.
박보라 그러니까. 댄스파티가 아니어도 동경시청장은 댄스 교습소에 자주 찾아오잖아.
박병성 댄스파티 날 동경시청장과 함께 다른 주요 인사도 찾아온다는 설정이 깔려 있다면, 말이 되겠지. 하지만 창작자의 관심은 그보다 청춘의 열정과 치기를 춤으로 보여주는 데 있었던 것 같아. 죽음 앞에 선 청춘들의 축제 같은.
정수연 그런데 <청춘, 18대1>이 보여주려고 하는 청춘의 모습이 과연 건강하냐는 질문을 하고 싶어.
안세영 일단 인물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 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모르겠어. 처음에 일본 여성 나츠카가 독립운동가였던 죽은 남편을 대신해 참여하는 걸 시작으로 하나둘씩 참여를 하잖아. 조선인도 아닌 나츠카가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 이유가 단지 남편의 후지산 이야기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져.
정수연 심지어 나츠카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야. 보통의 어머니라면 그 상황에서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을까?
안세영 맞아. 나츠카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를 따라 조선인이 될 것이기에 더욱 자신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아이와 함께 죽게 생긴 상황에서 이 말 자체가 모순적인 거지. 결국 나츠카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공감하거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여한 게 아니라 남편 혹은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느낌이 강했어.
박보라 게다가 대웅과 기철, 윤철 형제는 이토에가 동경시청장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잖아. 뮤지컬에서 이렇게 강간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불쾌해. 이토에가 겁탈당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숨어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안 가. 그 장면 전에 댄스 교습소로 들어온 일본 순사는 힘으로 잡아 가뒀으면서 말이야.
안세영 무엇보다 강간 장면을 다른 남성을 각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문제야. 식민지 조선을 강간당한 여성의 몸에 비유하는 고루하고 투박한 상징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아.
정수연 심지어 이런 대사도 등장해. 춤을 추면서 기철이가 순자의 가슴에 손을 대면서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말하잖아. 나츠카가 울고 있는 순자에게 ‘이건 원래 만지라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지. 이런 거칠고 안이한 표현에서 여성에 대한 의식 부족이 드러나.
나윤정 이토에가 강간까지 당하면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보였는데, 마지막에 혼자 살아남은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 이토에는 오히려 이런 자기가 더 인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하잖아. 그녀가 거사의 주인공이었는데 그런 말을 하니까, 앞서 했던 행동들이 설득력을 확 잃는 것 같아.
박병성 마지막 이토에의 결정은 왜 들어갔을까?
정수연 청춘의 객기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사실 이 감상주의를 어떻게 봐야 하나 했어. 이 사람들의 죽음에는 이유가 없거든. 댄스파티에서 동경시청장이 나가지만 폭발은 예정대로 하기로 해. 왜? 죽기로 했으니까 죽자. 그러니까 죽음을 위한 죽음이 되는 거야. 그걸 청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그려. 그리고 그 매개로 나오는 것이 아름다운 춤이지. 청춘과 독립운동을 그리는 작품에서 왜곡된 죽음의 찬미가 나타난다는 점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 또 <청춘, 18대1>은 기존에 있는 희곡을 벌려서 음악을 넣었는데 그래서 가사를 빼보면 더 쫀쫀한 느낌이 들어. 차라리 음악을 통해 어떤 정서를 폭발시켰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지. 어찌 됐건 간에 극단 죽도록달린다는 공연 공간에서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탁월해. 그래서 작품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까지 달려가게 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광염 소나타>
박보라 난 <광염 소나타>가 다른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좋았어. 다만 초반이 상당히 지루했지. 자극적인 요소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살인 사건이 나오기 전에 풀어야 할 설명이 너무 조잡하게 늘어져 있어. 설정이 명확한데 왜 저걸 구구절절 설명하지? 예술과 광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박병성 살인에서 영감을 받아서 곡을 만든다는 설정을 제시한 후 이후 전개되는 일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어. 결국 이 작품은 대본보다는 음악이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안세영 난 야성적이고 귀기 어린 음악을 기대했는데 너무 잔잔해서 실망했어. 사람을 죽이면서 얻은 곡이 이렇다고?
박병성 광기에 어린 음악을 보여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예술과 도덕의 대결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무대에서 구현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가 너무 가벼웠어. 이 작품은 소재를 깊숙이 파고들기보다는 소극장 흥행 코드들을 모아놓았다는 인상이 짙어.
박보라 맞아, 특히 동성애 코드는 흥행을 고려해 집어넣은 요소인 것 같아.
나윤정 그래도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이야기의 전개는 단순하지만, 작품이 추구하는 분위기가 명확해 집중해서 볼 수 있었어.
정수연 미숙한 작가들의 특징은 관객이 생각해야 하는 몫을 자꾸만 대사로 설명한다는 거야. 특히 <광염 소나타>에는 한 줄 요약하는 것 같은 대사들이 많지. 극작은 주제를 사건으로 풀어서 보여주는 건데, 여기서는 대사로 설명을 해. 이런 식으로 극작을 하다 보면 사건의 배치는 자극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고 개연성이 없어지니 비약으로 끝을 낼 수밖에 없지. 그러다 보니 캐릭터의 설득력은 찾을 수 없지.
안세영 원작인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가 매력적인 이유는 매력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잖아. 예술과 도덕의 대결에서 꼭 도덕의 손을 들어줘야만 하는가? 그런데 뮤지컬은 마지막에 교과서적인 요약까지 덧붙이면서 도덕의 손을 딱 들어주니까 너무 시시한 거야. 심지어 인물 구도도 선과 악으로 극명하게 나뉘지. 여기에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시키는 브로맨스 관계까지! 도대체 이 작품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정수연 차라리 치정극으로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 현실에서 선뜻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치정. 예술과 도덕의 대결을 치정을 포장하는 장막으로 세웠다면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박병성 예술과 도덕이란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나 의문이 들어. J는 우연히 살인을 경험하고 명작을 써 내잖아. 그런데 자신이 쓴 작품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 평론가 K에 의해 그 작품이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되잖아. 창작의 환희가 없었던 거지. 그런 환희도 느끼지 못하는 J가 살인을 되풀이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결국 그가 살인을 하는 건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S에 대한 열등감 때문으로 보이는 거지.
정수연 맞아. 그게 바로 광기와 연결이 되어야 하는 건데.
박병성 교수 K의 캐릭터도 문제야. <도리안 그레이>의 헨리 같은 유미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는 내기 때문에 J를 몰아붙인 것으로 드러나잖아.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설정을 집어넣은 게 오히려 주제를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어.
정수연 그래도 시장을 고려한 젊은 작가의 시도에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봐.
<레드북>
박병성 <레드북>은 어떻게 봤어?
배경희 창작진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시기랑 잘 맞아떨어진 작품이었어. 뮤지컬에서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찾아보기 힘든데, 창작뮤지컬에서 이런 캐릭터가 나왔다는 게 정말 반갑더라.
안세영 그리고 다양한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게 좋았어. 젊고 마르고 예쁜 배우만 등장시키지 않은 게 성차별을 깨고자 하는 작품의 취지에 잘 맞았다고 생각해. 또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적인 상황을 장면으로 잘 구성해서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지만 지금의 관객들도 공감하며 볼 수 있었지.
나윤정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등장도 반가웠어. 안나와 브라운은 물론이고, 로렐라이, 도로시, 바이올렛 등 캐릭터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설득력 있어 좋았어. 로렐라이 역의 지현준과 도로시/바이올렛 역의 김국희의 열연도 인상적이었고.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어.
정수연 무엇보다 새로운 건 기존 뮤지컬에서 남성이 관계를 주도하는 것과 달리, <레드북>에서는 여성인 안나가 관계를 주도하면서 남성인 브라운을 변화시킨다는 거야. 브라운이 여성 인권에 대해 각성하는 과정과 둘의 로맨스가 무르익는 과정이 같이 진행되면서, 어떤 로맨스보다 둘의 관계에 설득력이 생겨.
박병성 노래도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가치가 있으면서도 드라마랑 잘 어울려.
안세영 안나의 성장 과정이 넘버에서도 잘 드러났어. 1막은 안나가 ‘난 뭐지?’라고 노래하면서 시작해서 ‘나는 야한 여자야, 나쁜 여자야’라고 노래하는 것으로 끝나. 그리고 2막이 끝날 때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작가적 자의식을 확립하지.
정수연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을 넘어서 글을 쓴다는 것, 자기가 자기 말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관객들이 이 작품을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하는데, 페미니즘에 틀을 딱 맞출 게 아니라 더 확장하고자 하는 것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단순히 주체적인 여성이 나왔기 때문에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건 너무 도식적인 맞춤이지.
박병성 다만 아쉬운 점은 안나가 쓴 소설이 사회에서 유통되는 과정이 너무 쉽게 해결된다는 거야. 사회적 장벽이 시스템이 아니라 오로지 평론가 존슨, 한 사람의 왜곡된 욕망으로 축소되고 있잖아. 1막에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인권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었다면, 2막에서는 로맨틱 코미디 중심으로 전개가 되면서 논점이 흐려지는 면이 있어. 브라운이 안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예쁘고 재밌긴 하지만 앞서 다루던 진지한 문제를 대중적인 문법으로 풀어버렸다는 느낌이야.
안세영 페미니즘 문제를 이야기한다면 결국 마지막에 재판장에서 레드북의 가치를 입증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안나의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안나를 옹호해주는 건 좋지만, 그 발언 내용이 좀 묘해. 결국은 여자들이 주변 남자에게 잘해 주겠다고 결심하는 내용이거든. 심지어 밥 해놓고 기다리겠다는 대사도 나와. 이러면 여자들이 다시 가부장제 속으로 편입되는 서사가 되는 거 아냐? 결국 남성의 인정 없이는 레드북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건가 싶어서 의아했어.
정수연 그 부분은 빅토리아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빅토리아 시대는 모든 성과 관련한 문제가 재판에 부쳐지고 이걸 판단하는 사람도 죄다 남자였으니까. 결국 뮤지컬은 재판장에서 남성들이 여성의 문제가 곧 나와 연결된 문제라는 걸 깨닫는 과정을 짚고 싶었던 것 같아. 가장 뮤지컬다운 안전한 결론이기도 하지. 완결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안세영 페미니즘 관점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또 있어. 미녀 로렐라이가 길가를 지나가면 ‘남자들은 추파를 던지고 여자들은 돌을 던졌다’는 대사가 있는데, 많은 관객들이 이를 두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사라고 지적했어.
정수연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평화야.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오히려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레드북>을 딱 페미니즘 뮤지컬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워. 창작뮤지컬에 없었던 굉장히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여주인공이고 변화하는 사람이 남주인공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아. 어쨌거나 이제 비로소 여성 문제가 공론화가 될 수 있는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봐. <레드북>은 뮤지컬 특유의 발랄함, 경쾌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할 말을 할 줄 아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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