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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뮤지컬 밑바닥에서> [No.163]

글 |전영지(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쇼온컴퍼니 2017-04-28 4,863

<뮤지컬 밑바닥에서>

관객에게도 연민보다는 존중을




“인, 간! 인간은 위대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인가! 인, 간! 인간을 존중해야 해! 동정할 필요 없어... 연민으로 인간을 낮출 까닭이 뭐야... 존중해야 해! 인간을 위해서 건배하세!” (막심 고리키, 최윤락 옮김, 『밑바닥에서』, 지만지, 2008, 155쪽).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1902)의 등장인물 싸친의 대사이다. 고리키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에게, 타인에게, 그리고 어쩌면 자신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지독하게 처연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이 나누어야 할 것은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존중이 아니겠느냐고 역설한다. 고리키의 희곡을 뮤지컬로 재창조한 작품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원작을 많이 각색했으나 (표현이 적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위의 독백은 버리지 않았다. 연출 왕용범의 인터뷰를 찾아 읽으니 당연하다 싶다.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을 좋아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뮤지컬은 관객을 도통 존중하지 않는 인상이었다.




찰나의 희망은 흐릿하기만 하다


러시아의 낡은 선술집을 옮겨놓은 것 같은 무대 위, 등장인물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뮤지컬은 시작한다. 이들은 그저 즐거운 듯 건배하며 노래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짙은 절망과 냉소가 담겨있다. 술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달래기 위함일 뿐이며, 더 살아야 하는 이유는 찾을 길 없고, 생(生)이란 헛된 희망을 안고 끝내 죽게 될 무덤일 뿐이라고 이들은 노래한다. 술집 주인 타냐와 그녀의 동생 페페르, 백작과 백작부인 바실리사, 싸친과 조프, 나스짜, 그리고 ‘배우’, 이들 모두의 인생은 참으로 비루하다. 타냐는 아픈 아들 막스에게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페페르는 백작을 대신해 살인죄로 복역(服役)하는 동안 자신의 애인이었던 바실리사가 백작과 결혼했음에도 백작에게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하며, 바실리사는 백작의 폭력을 견디며 살고 있고, 싸친과 조프는 백작을 속여 한 밑천 장만할 생각에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배우’를 끌어들였고, 매춘으로 살아가는 나스짜에게는 ‘이상한 손님’들 뿐이다.


이들의 이토록 처절한 삶에 한 줄기 희망이 찾아온다. 일자리를 구하러 홀로 찾아온 나타샤와 함께. 나타샤는 봄을 노래하고, 나타샤의 노래를 듣던 이들도 지나간 제 삶의 그 어떤 봄날을, 그리고 어쩌면 다시 찾아와줄 내일의 봄날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나타샤에게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으며 위로받는다. 특히 페페르는 그녀와의 새로운 삶을 꿈꾼다. 페페르가 나타샤를 만나 느끼는 마음의 변화는 사실 이 뮤지컬의 관통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에게 마음이 흔들려 사람다운 삶을 꿈꾸기 시작하고, 그런 마음을 질투하는 옛 애인 바실리사 때문에 백작을 살해하게 되는 페페르의 몰락이 뮤지컬의 핵심적인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마음도, 나타샤의 마음도 뮤지컬 내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쌓이질 않는다. 사랑이란 원래 뜬금없이 찾아오고 예고 없이 사그라들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랑은 한 순간도 애틋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페페르가 자신에 집착하는 바실리사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하며 나타샤에게 불쑥 실언처럼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나 기약 없이 떠났던 페페르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반가움보다 자신의 추레한 모습을 먼저 걱정하는 나타샤의 모습은 어색하다. 사랑이라면,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할 정도의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시선은 상대에게 먼저 향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사랑에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그 사랑이 전하는 희망 또한 흐릿하기만 하고, 하여 이들이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절망이 지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진정으로 희망할 때만 그 희망이 허망해질 때 뼈아픈 환멸이 찾아오는 일일 터이니 말이다.




개그와 폭력은 너무도 또렷하다


희망은 흐릿한 반면, 개그와 폭력은 너무도 많고 뚜렷하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때린다. 뺨을 때리고, 쟁반으로 머리를 때리고, 몸을 발로 차고, 몸을 밀쳐 넘어뜨린다. 여자배우, 남자배우 할 것 없이 모두 서로 서로를 끊임없이 때린다. 게다가 때때로는 진짜 때린다. 특히 백작이 바실리사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나 싸친이 ‘배우’의 실수로 자신들이 꾸민 사기행각이 백작에게 발각된 후 ‘배우’를 때리는 장면은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다. 누구는 이런 연기가 ‘리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필자는 이런 순간 극의 ‘리얼’을 놓치게 된다. 더 이상 허구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 내 눈 앞에 있는 저들이 추상적인 등장인물이 아니라 지금 무척 아파하고 있을 ‘몸’을 지닌 배우임을, ‘인간’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대 위 실제 폭력 장면은 제작자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마치 연극의 ‘리얼’과 실제(實際)의 ‘리얼’이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강렬한 실제의 ‘리얼’을 삽입하면 관객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가상 전체를 실제로 착각할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개그는 이야기를 해친다. 배우들이 합(合)을 맞춰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개그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페페르가 고백할 때 때마침 물을 마시던 나타샤가 페페르의 얼굴에 물을 뿜는 장면은 배우가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게다가 커튼콜 장면, ‘배우’는 여전히 술에 걸근대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데, 이는 커튼콜의 연출의도 자체를 혼란스럽게 한다. 커튼콜은 타냐를 ‘엄마’라고 부르며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듯 보이는 막스, 백작에게 당당한 바실리사, 비로소 흔연하게 사랑을 나누는 페페르와 나타샤 등을 보여주며 등장인물들이 꿈꾸었던 삶을 환상적으로, 그래서 더욱 아프게 전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만약 이런 의도였다면 ‘배우’는 더 이상을 술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개그가 전체를 해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듯하다. 관객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은 알겠으나 배우를, 관객을 진정 신뢰한다면, 실제로 행해지는 폭력이나 개그처럼, 1차원적 반응을 겨냥하는 선택들은 피하고 좀 더 전하려는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배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내곤 탁자 위에 올라 독창을 하는 장면에서 또한 여러 갈래 쏟아져 나오는 강한 조명 없이도 배우의 연기만으로 ‘배우’는 빛날 수 있었으며, 관객은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녹음된 박수 소리 없이도 진심의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라 믿는다. 




관객의 상상력을 신뢰했으면


일본인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는 연극은 “관객의 상상력을 지렛대로 삼아 전개되는 표현양식”이라고 정의한다. TV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연극은 사실주의적 배경 만들기나 장면 전환에 제약이 있는 반면 살아있는 배우가 관객의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히라타 오리자, 고정은 옮김, 『연극입문』, 동문선, 1998, 65쪽.)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함께 하는 연극, 또는 공연예술 장르에서는 관객과 배우 사이에 어떤  관계가 ? 혹 아주 순간적이고 덧없는 관계라 할지라도 ? 형성되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음악 자체가 극의 진행에 필수적이라기보다는 재미를 더하는 음악극에 가깝고, 배우와 관객이 서로 눈 맞출 수 있는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밑바닥에서>에는 특히 관객의 상상력을 신뢰하라는 히라타의 제언이 적실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 관객을 신뢰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인간 존중’을 역설하던 싸친의 독백과 함께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배우’의 독창을 오래 오래 읊조리며 생각했다. 이 작품의 창작자들이 먼저 진정으로 자신의 작품을 믿고, 존중하고, 감동받았기를, 또는 오래 전 느꼈던 그 확신을, 믿음을, 감동을 다시 떠올리기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3호 2017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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