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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YORK] <워 페인트> [No.165]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사진 |Joan Marcus 2017-07-05 4,761

사업가로 돌아온 디바    

<워 페인트> WAR PAINT





디바의 귀환


올 시즌 브로드웨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디바의 귀환이다. 올 초 개막한 <선셋 블러바드>에는 글렌 클로즈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고, 베트 미들러가 그 뒤를 이어 제리 허먼의 1964년 작품 <헬로 돌리> 리바이벌 프로덕션에 출연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지난 4월 6일 네덜란더 시어터에서 정식으로 개막한 <워 페인트(War Paint)>에는 패티 루폰과 크리스틴 에버솔이 참여해 올해 ‘디바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워 페인트>는 2006년 <그레이 가든스>로 힘을 합쳤던 더그 라이트(극본)와 마이클 코리(가사), 스캇 프랑켈(음악) 트리오가 선보이는 작품으로, 미국 화장품 업계의 대모격인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엘리자베스 아덴의 이야기를 그린다. 같은 시기에 각자 따로 활동하면서 미국 여권 신장에 기여한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엘리자베스 아덴의 이야기가 뮤지컬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는 2003년에 출판된 일대기와 2009년 방송사 P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파우더와 영광(The Powder And The Glory)>의 영향이 크다.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사업


지금이야 화장품이 여성들의 (심지어는 남성들에게도) 필수품으로 여겨지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화장품은 매춘부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돼 가게에서 화장품을 살 때면 행여 누가 볼까 종이봉투에 담아 나오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화장품 사업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지니고 비즈니스에 뛰어든 마담 루빈스타인과 미스 아덴의 이야기는 굉장히 고무적이다. 작품은 1935년에서 시작해 삼십여 년간 두 사람이 여성 사업가로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서로 경쟁하며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린다. 1막은 미스 아덴이 사업을 키우고 마담 루빈스타인이 화장품 업계에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해 서로 경쟁하다 두 사람 다 미국 식약청의 규제로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2막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식약청의 규제로 겪는 난관을 두 사람이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점점 상업화되어 가는 화장품 업계의 변화 속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변화에 맞서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내는지를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비교적 심플한 플롯은 패티 루폰과 크리스틴 에버솔의 연기와 두 사람이 연기하는 두 인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1960년대에 생을 마감한 헬레나와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경쟁의식을 느끼면서 각자의 사업을 키워갔는데,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뮤지컬도 이를 따라 창작진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이 직접 부딪치지 않는다. 대신 비슷한 듯 다른, 다른 듯 비슷한 철학과 삶을 평행 구조 속에 놓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서로 대면하는 장면 없이 두 사람의 경쟁 구도를 풀어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창작진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주변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두 사람의 경쟁을 그려가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만 상대를 깎아내린다든가 서로의 매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개연성을 떨어뜨린다.


헬레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화학자 해리 플레밍은 헬레나의 독불장군 같은 모습에 반발해 엘리자베스 아덴에 들어가는데, 엘리자베스 아덴의 세일즈 담당자이자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토미 루이스는 그녀가 독자적으로 해리를 채용한 데에 반발해 헬레나 루빈스타인으로 이직한다. 이처럼 두 주인공은 서로 만나지 않지만, 그들을 보좌하는 남자들이 종종 마주치도록 설정해 두 사람의 경쟁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해리와 토미는 각자 모시는 보스와 함께 경쟁 구도를 유지하다 2막 중반에 업계 변화에 발맞추기를 종용하다 해고당한 뒤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쳐 동병상련의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토미 역의 존 도셋과 해리 역의 더글라스 실즈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딱히 이야기 진행에 흥미를 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시카고 트라이아웃 공연 당시 헬레나와 아덴의 경쟁 구도를 좀 더 보여주면 좋겠다는 평이 있었는데, 브로드웨이 공연은 이 피드백을 반영해 1막 초반 헬레나와 엘리자베스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추가됐다. 서로 떨어진 공간에서 각자의 상황에 맞는 노래를 화음에 맞춰 부르는 도입부에서 두 사람의 삶을 연결하려는 창작진의 의도가 엿보였다. 




20세기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


헬레나와 엘리자베스 이야기의 흥미로운 지점은 둘 다 이민 1세대로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인물이라는 데 있다. 헬레나는 폴란드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호주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고, 엘리자베스는 캐나다 오타와 주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 도시의 삶을 꿈꾸며 뉴욕에 발을 디뎠다. 엘리자베스는 이름을 엘리자베스 아덴으로 개명하고 직접 개발한 크림으로 미용 사업을 시작해 20세기 초 미국 사교계의 중요한 인물로 거듭난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핑크를 브랜드의 대표 색깔로 삼고 백인 여성의 전통적인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브랜드 전면에 내세우는 반면, 헬레나는 반 유대 감정이 심했던 20세기 초 뉴욕에서 루빈스타인이라는 유대인 이름을 고집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유대인들이나 동유럽계 이민자들에게 강인한 매력을 어필해 성공한다. 두 사람의 삶은 당시 이민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개척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확연히 성격이 다른 두 인물은 다른 개성을 지닌 두 베테랑 배우를 통해 무대 위에서 살아난다. 자그마하지만 단단한 체격에 굵고 큰 성량을 지닌 패티 루폰과 호리호리한 체형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지닌 크리스틴 에버솔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 효과적으로 인물을 그린다. 초기 미용 산업의 발달에 기여한 이민 여성들의 성공담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개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패티 루폰과 크리스틴 에버솔의 연기력이나 무대 장악력이 무대의 어떤 요소보다도 중요해 두 사람의 캐스팅 자체가 이 작품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비주얼이 돋보이는 스토리텔링


두 주연 배우의 경쟁 구도를 그려내는 데 특히 주효했던 것은 무대나 조명, 의상에서 헬레나와 엘리자베스에게 특정 색깔을 부여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끌어간 점이다. 헬레나는 보라색 또는 흰색을 주로 입고, 엘리자베스는 등장할 때부터 핑크색 의상을 많이 입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나 사업적인 어려움을 겪는 2막에서는 의상이 중립적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2막 초반 여군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을 통해 전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장면에서는 중립적인 푸른색의 복장을, 사업이 어려워진 시점에는 흰색과 검정색의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으로 등장하는 식이다. 미용, 더 나아가 패션 문화를 선도한 이들이기에 의상에 굉장히 공을 들였는데, 화려한 의상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한 매체의 리뷰처럼 <워 페인트>의 의상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왕과 나>, <남태평양>, 그리고 <라이트 인 더 피아자> 등 주로 클래식한 작품의 의상을 많이 작업한 캐서린 주버는 이번 작품을 통해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능력이 뛰어난 디자이너로 다시 한 번 입지를 분명히 했다. <위키드>, <피핀>, <이프/덴> 등의 작품에서 현실과 허구 세계의 분위기를 묘하게 잘 섞어내는 능력을 보여준 조명디자이너 케네스 포스터의 조명은 의상에 분위기를 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대 디자인을 맡은 데이비드 코린스는 <해밀턴>이나 <디어 에반 한센> 같은 브로드웨이 작품 외에도 레이디 가가나 브루노 마스 등 대중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실력을 발휘한다. 양옆으로 움직이거나 윙으로 빠지는 가벽을 세워서 공간을 활용하는 무대 뒷벽은 책장처럼 만들어서 투명한 빈병들을 줄 지어 세워놓음으로써 화장품 산업의 대모의 이야기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냈을 뿐 아니라, 그 뒤로 조명을 설치해 조명색이 바뀔 때마다 굴곡진 유리병에 반사되는 빛을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두 주인공의 경쟁 구도와 동지 의식을 잘 드러낸다.



2017년의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스캇 프랑켈과 마이클 코리의 협업은 애초에 패티 루폰과 크리스틴 에버솔에게 맞춘 듯하지만, <그레이 가든스>에서 보여준 독특함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부분이 아쉬웠다. <그레이 가든스>의 경우 동명의 다큐를 원작으로, 다큐에서 실존 인물들의 상황과 대사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무대로 옮겨오는 데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가능했는데, <워 페인트>는 이민 여성으로서 화장품 산업을 개척한 두 주인공의 묘사가 상대적으로 뭉툭했다. 마치 글씨의 언저리가 번진 오래된 문서처럼 말이다. 그나마 베테랑 여배우들이 출연해 무대 위의 헬레나와 엘리자베스가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구성에 대한 아쉬움은 이야기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한다. 2017년 지금의 감성으로 볼 때, 화장품과 화장품 회사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미용 산업은 아름다움의 획일화와 외모지상주의 풍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나,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엘리자베스 아덴이 백인 중심의 아름다움을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없이 두 사람을 여성의,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위해 싸운 챔피언으로 그려내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더 큰 문제점은 창작진들이 마담 루빈스타인과 미스 아덴의 만남을 상상해서 그려낸 공연의 마지막에 있었다. 엔딩 장면에서 헬레나와 엘리자베스는 현직에서 물러난 후 여성 협회의 추대를 받아 그해의 주제인 ‘변화하는 시대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에 연계된 공로상을 받는 자리에 함께하면서 서로에 대한 경쟁심을 내려놓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노력한 동지로서 ‘Beauty In The World’라는 마지막 뮤지컬 넘버를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의 내용은 미래 지향적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었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의 철학을 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이 있었던 그 시절, 그 세계”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진취적일 수 있었던 유산들을 과거의 유물로 한정지었고, 그로 인해 작품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메시지가 퇴색되는 결과를 낳았다. 시상식의 결과가 작품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 시즌 시상식에서 <워 페인트>가 노미네이트된 부문은 디자인과 배우 부문에 그쳤다. 이것은 두 거장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가지 않은 것에 대한 관객들의 아쉬움을 반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5호 2017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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