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일 수 있는 무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빅토리아 시대, 용감하게 펜을 잡은 여성 작가의 이야기 <레드북>이 정식 공연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짧은 공연 기간에도 불구하고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레드북>. 더욱 반가운 건 당시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세 배우 유리아, 박은석, 지현준이 다시 돌아온다는 점이다. 엉뚱하고 발칙한 여성 작가 안나 역의 유리아, 사랑을 통해 변화하는 보수적인 신사 브라운 역의 박은석, 여성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의 수장 로렐라이 역의 지현준. 인터뷰에 나선 세 사람은 <레드북>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솔직한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랑스런 바보와 또라이
<레드북>으로 다시 만나 반가워요. 시범 공연 때 세 분 모두 맡은 역할을 자기 옷처럼 소화했는데, 역할과 실제 모습이 가장 닮은 사람은 누군가요?
유리아_ 그야 은석 오빠죠. 전 연습할 때부터 확신했어요. 이게 오빠의 인생 캐릭터가 될 수 있다! 오빠가 생긴 게 굵직하고 새침할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바보예요. 한없이 착한 허당. 그런 점이 브라운이랑 딱 맞았어요. 제가 러브신에서 예고 없이 확 다가가잖아요? 그럼 오빠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반응이 나오는데 그게 브라운다워서 픽스된 게 많아요.
박은석_ 예, 뭐…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 저는 모태솔로는 아니지만.
유리아_ 강조하네.
박은석_ 브라운은 숫기 없고 책만 들여다보는 캐릭터인데, 저도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거든요. 생활 반경이 집 아니면 연습실 아니면 극장이에요. 그런 점에서 닮았다고 할 수 있지만, 진짜 닮은 건 리아죠, 리아! 극 중에서 브라운은 생각만 많은 반면, 안나는 행동하는 캐릭터잖아요. 연습할 때도 똑같았어요. 저는 쓸데없이 고민이 많은데, 리아는 ‘이거 해보자’ 하고 일단 막 해보는 성격이거든요. 또 리아가 저보다 어리지만 같은 학교(국민대 연극영화과) 선배이기도 해요. 그전부터 이어져 온 선후배 관계와 성격 차이, 이 모든 게 지금의 역할과 딱 맞아떨어진 거죠.
지현준_ 둘이 연습하는 걸 옆에서 보면 이런 느낌이에요. 아주 놀고 있구나. 근데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이 나오거든요. 굳이 둘 중 더 닮은 사람을 꼽자면 리아죠. 리아는 진짜 또라이에요, 사랑스런 또라이! 안나 연기 그거, 다 자기 성격대로 한 거예요. 캐릭터 분석해서 나온 거 아니라고 생각해. (일동 웃음)
안나는 뮤지컬에서 보기 드문 주체적인 여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여성 관객에게 큰 사랑을 받았죠. 브라운과의 로맨스에서도 관계를 주도하는 안나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유리아_ 러브신에 특히 신경 썼어요. 러브신 하면 무조건 예쁜 그림을 상상하기 쉽잖아요. 하지만 안나는 그럴 것 같지 않았어요. 지질한 남자와 또라이 같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할 때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을 할 것 같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사랑 노래를 부를 때 꼭 아름답게만 보이려고 하지 말자, 캐릭터가 지닌 엉뚱하고 순수한 면을 살리자고 의견을 냈죠. 예컨대 입을 맞추는 장면에서 여자인 안나가 먼저 브라운에게 화끈하게 다가가는 식으로요. 연습 때 이것저것 장난치면서 한계를 두지 않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심지어 작가님이 ‘너무 야한 거 아니에요?’ 하는 것도 해보고요. 제가 은석 오빠한테 ‘오빠, 이거 안 불편해요?’ 물어보면 오빠가 그랬어요. ‘너무 불편한데 그게 맞는 것 같아.’ (웃음)
로렐라이도 독특한 캐릭터예요. 뮤지컬에 여장 남자가 드문 건 아니지만, 로렐라이는 트랜스젠더 혹은 게이로 딱 정의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현준_ 그렇게 정해 놓고 연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로렐라이의 여장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보수적인 시대에 자유를 좇다가 죽은 진짜 ‘로렐라이’를 본받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거예요. 여성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을 만든 것도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그 여자의 유언 때문이죠. 로렐라이를 연기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그가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어떤 성을 대표하기보다는 모든 사람과 편견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인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한 건 품위! ‘로렐라이 언덕’의 수장으로서 항상 당당하고 품위를 잃지 말아야겠다고 판단했죠.
지현준 씨의 평소 모습은 어떤가요?
유리아_ 연습실에서 보면 오빠는 오빠만의 세계가 있어요. 혼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나 싶다가, 다시 보면 물구나무를 서고 있어요. 또 조금 이따가 보면 이어폰을 끼고 뭘 하고 있어요. 그럴 때 눈이 마주치면 제가 막 놀려요. 바보 오빠 뭐 하냐고! 근데 연습이 시작되면 오빠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말하자면 오빠가 연습실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무언가 하나를 해내기 위한 준비 과정처럼 보여요.
박은석_ 확실히 형님을 보면서 많이 배워요.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는 눈이 남다르세요. 이런 그림에서 내 임무는 뭐고 이렇게 연기하면 되겠다는 걸 바로 아시더라고요. 로렐라이가 진짜 살리기 어려운 캐릭터인데, 그렇게 매력적으로 살리시는 걸 보고 놀랐어요.
유리아_ 오빠 덕분에 공연의 격이 올라갔어요. (지현준_ 푸핫) 아, 진짜로! 공연 보고 로렐라이 때문에 감동받았다고 얘기하는 관객이 한둘이 아니었다니까요. 솔직히 오빠가 우리 중에 제일 네임 밸류 있는 배우인데도 재는 게 전혀 없어요. 사람들 앞에서 바보처럼 항상 허허 웃고 잘해 주고. 그래서 바보 오빠라는 거예요.
박은석_ 무대에 진짜 바보로도 한번 나오는 거 아시죠? 첫 넘버 ‘난 뭐지’ 부를 때 잘 보면 형이 꽃 들고 콧물 그린 채로 돌아다녀요. 배우들까지 소대에서 형 바보 연기 구경했잖아요. ‘대박이다’ 그러면서.
유리아_ 관객들이 현준 오빠인 걸 잘 모르더라고요. 그니까 오빠가 연기 천재라는 거예요.
지현준_ 그만해!
나를 말하는 사람
<레드북>은 여성 차별을 소재로 한 작품이잖아요. 여성 차별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뜨거운 이슈고, <레드북> 시범 공연이 주목받은 이유로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봐요. 당시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보며 무엇을 느꼈나요?
지현준_ 공연의 주요 관객층이 여성인 만큼, 그분들이 무대에서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남아 있는 건 분명하고, 저 역시 다뤄지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런 면에서 <레드북>은 ‘한 여성 캐릭터가 온전한 주인공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라는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관객분들이 그걸 알아주시니 벅차죠.
박은석_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태도예요. 오랫동안 힘을 가진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죠. 이제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 소통하며 이해할 수 있길 바라고, <레드북>이 그런 얘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리아_ 지난 공연 당시 안나가 자기 힘으로 역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자인 브라운의 도움을 받는 결말이 실망스럽다는 지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안나 혼자 영웅이 되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어요. 현실에도 단 한 명의 영웅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겉으로 보이는 영웅 뒤에는 수많은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죠. 안나는 신념을 가진 여성이지만 슈퍼우먼은 아니에요. <레드북>은 한 슈퍼우먼의 기적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개인이 서로 연대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브라운도 혼자 힘으로 안나를 도와준 건 아니잖아요. 레드북을 읽은 다른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도와준 거죠. 결국 주변 사람과 사회의 영향으로 한 사람의 삶이 깊은 절망에 빠질 수도, 또 멋진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저희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레드북>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대사 혹은 가사는 뭐예요?
박은석_ 저는 마지막에 브라운이 변화를 다짐하며 건네는 대사 ‘나를 기대해 줄래요?’를 좋아해요. 브라운은 안나를 사랑하면서 내가 상대를 위해 한 행동이 정말로 상대를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아요. 눈앞에 있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 안에 내가 보고 싶은 상대의 모습을 따로 만들어놓고 행동해 왔음을요. 예컨대 여자는 약하니까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걸 바라는 여자도 있고 바라지 않는 여자도 있을 텐데, 무조건 그렇게 하는 게 신사의 도리라고 정하는 거죠. 그건 정말로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거거든요. 그걸 깨달은 브라운이 안나에게 사과하며 부르는 노래를 참 좋아해요.
유리아_ 저는 안나의 마지막 넘버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던 안나가 마지막에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제 흔들리지 않을 거야’ 하고 다짐하는 노래예요. 거기 이런 가사가 나와요.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 이 노래의 모든 가사가 가슴에 콕콕 와 박혀서, 노래할 때마다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요.
박은석_ 저도 그 넘버 좋아해요.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투성이 세상’ 이런 가사, 한국사람 많이들 공감할 거예요. 남의 눈치 많이 보는 사회니까. 여자들은 더 그럴 테고요.
지현준_ 저는 지난 공연 때 애드리브로 ‘여기는 로렐라이 언덕이니까요’라는 대사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대사가 크게 와닿아요. 배우로서 ‘여기는 무대니까요. 여기는 이런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하고 얘기하는 것 같거든요. 여기 있는 이 시간만큼은 남 눈치 보고, 남 흉내낼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죠. 리아와 은석이가 자기와 닮은 안나와 브라운을 연기했을 때 반응이 좋았던 건 누구나 자기다운 모습이 제일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모습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거, 부끄럽지만 누가 뭐래든 꺼내 보는 거, 그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죠.
한국 사회는 남 눈치를 많이 본다고 했는데, 세 분도 남들과 달라서 불안했던 경험이 있나요?
지현준_ 배우라는 게 어쩔 수 없이 남의 시선에 신경쓰고 사는 직업이잖아요. 제가 연기를 배울 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배우는 앞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지만 사실 뒷모습이 훨씬 중요하다. 뒤가 단단히 버티고 있지 않으면 앞으로 다 쏟아지기 마련이다. 앞모습 이상의 뒷모습을 가지고 살아라.’ 물론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사는 게 쉽지 않죠. 저는 잘생기지도 않았고, 노래도 못하고, 그래서 관객 앞에 서는 게 불안할 때가 많았어요. 특히 뮤지컬 무대에서요. 아직도 노래할 때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요. <레드북>은 제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해야 관객에게도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거든요.
박은석_ 저는 어릴 적부터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었어요. 브라운을 연기할 때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을 크게 갖고 갔는데, 실제로 제가 그랬어요. 항상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괴롭혔죠. 그러다 보니 연기를 배우면서 품었던 소명 의식을 데뷔한 뒤부터 슬슬 잊게 되더라고요. 성공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서. 지금이 배우로서 나아갈 길을 다잡는 시기인 것 같아요.
유리아_ 저는 데뷔하면서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너 그렇게 하면 안 돼’예요. 제가 부모님이 엄하셔서 이십 대 중반까지도 뒤풀이 술자리에 잘 못 꼈거든요. 그때마다 인맥 쌓으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부당한 일을 당하고 참지 못해 말을 꺼냈을 때도 같은 소리를 들었죠. 하고 싶은 소극장 작품이 있어서 대극장 작품을 거절했을 때는 ‘이렇게 하면 대극장 주인공 못해요’ 소리까지 들었어요. 저는 대극장 주인공이 되는 것만이 배우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한때는 그런 말에 흔들렸는데, 지금은 제 신념을 지킬 자신이 더 생겼어요. 이제는 저 스스로 조금씩 증명해 가는 단계인 것 같아요. 배우가 꼭 인맥이 있고, 큰 작품을 선택해야 잘되는 건 아니라는 걸. <레드북>에도 이런 대사가 나와요. ‘니들이 안 받아주면 못 팔 줄 알았냐! 없어서 못 판다!’ (웃음) 남들이 아닌 제 기준에서 전 지금 잘되고 있고 행복해요.
안나는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죠. 세 분은 힘든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나요?
지현준_ 저는 생각을 ‘패스’하려고 해요. 많은 배우가 어떤 지적을 받는 순간 좌절하거나 극복해 내려고 이를 악물어요. 그런데 연기자로서의 제일 좋은 자세는 아, 내가 이렇구나. 오케이. 끝. 이 정도예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정하고 산다 해도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때 지금은 이렇구나, 이렇게 슬프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왜 이럴까 깊게 생각하지 않고, 억지로 생각을 지우려 하지도 않고. 왜냐면 인생에는 항상 다음이 준비되어 있거든요.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다음을 못 봐요.
박은석_ 아, 이거 메모감이야(핸드폰을 꺼내 메모한다).
유리아_ 근데 그게 참 어려워. 저는 특별한 방법은 없고, 제가 좋아하는 초록 식물이 있는 카페나 화원에서 시간을 보내요. 너무 힘들면 오히려 혼자 있게 되더라고요.
박은석_ 저는 평소에 잠이 잘 안 오는 편인데, 잠이 안 오면 힘들잖아요. 힘들면… 야한 생각을 해요. (일동 웃음) 그럼 기분도 좋아지고 억지로 상상력을 끌어내다 보면 피곤해서 잠도 오고… 아무튼 그러다가… 헤헤.
유리아_ 미소 봐, 미소.
지현준_ 지금 상상하지 마!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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