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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신시컴퍼니 박명성 예술감독 [No.178]

글 |박병성 사진 |심주호 2018-07-26 8,082

 

신시컴퍼니 박명성 예술감독

신시의 서른, 새로운 잔치가 시작된다

 

신시컴퍼니(이하 신시)가 30세 이립(而立)을 맞았다. 이립은 학문이나 견식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자가 자립했던 나이이다. 대한민국 극단으로서 30년이란 세월은 인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무게감이 있다. 뮤지컬을 제작하는 극단 중 신시의 형뻘인 곳은 관 단체인 서울예술단, 서울시뮤지컬단, 민간단체 중에는 현대극장 정도뿐이다. 신시는 지난 30년 동안 한국 뮤지컬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브로드웨이의 흥행 뮤지컬을 발 빠르게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극장 작품들을 선보이는 작업도 그 어느 곳보다 열심히 해왔다. 이러한 작업을 지난 30년 동안 별다른 굴곡 없이 꾸준히 지속했으며,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지금의 신시를 있게 하고 이끌어왔던 박명성 예술감독을 만나 신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들어보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발 빠른 소개

극단 신시가 30주년을 맞았다. 창립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현대극장에서 활동하던 김상렬 대표가 김상렬 사단이라고 불리는 김갑수 배우, 이용녀 배우와 함께 마당세실극장 대표로 자리를 옮겨서 뮤지컬 <님의 침묵>, 연극 <이중생각하>, <실수연발> 등을 올렸다. 그러다 작품적으로나 기획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취지로 극단 신시를 만들었다. 1987년 10월에 창립해서 1988년에 창단 공연으로 연극 <애니깽>을 올렸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창립 멤버였다. 그때 나는 극단 막내로 살림살이를 보는 총무 역할을 했다. 
 

조연출 생활을 오래 했다. 프로듀서로 첫 작품이 1997년 <더 라이프>였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고 있는 작품을 정식 라이선스로 들여와 화제가 됐다.

당시 한국은 제대로 라이선스를 주고 공연을 올리지 않았다. 뉴욕이나 런던의 책방에서 대본과 악보를 사다가 번역해서 올리곤 했다. 그 책들은 간주나 오버추어도 빠져 있는 불완전한 자료다. 그런 악보와 대본으로 제대로 된 공연을 만들기는 힘들다. 정식으로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대본이나 악보를 받아 제대로 만들려고 한다니까 오히려 원제작사에서 놀라더라. 지금껏 한국에서 그런 경우가 없었으니까. 설득을 하고 라이선스를 받아내기까지 6개월 정도가 걸렸다. 당시 올리는 뮤지컬은 <아가씨와 건달들>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같이 대부분이 1950~60년대 뮤지컬이었는데 브로드웨이 현지에서 롱런하고 있는 작품을 한국에서 동시 공연해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1999년 신시의 대표직을 맡으면서 신시뮤지컬컴퍼니로 개명하고 본격적인 라이선스 뮤지컬 소개에 힘을 기울였다. 대표직을 맡고 첫 작품으로 <시카고>를 올리고 2000년 브로드웨이에서도 뜨거웠던 <렌트>를 한국 시장에 선보였다. 

<렌트>는 뉴욕에서도 워낙 혁신적인 스타일의 뮤지컬로 유명했고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텐트를 치고 밤샘을 해서 화제가 된 작품이다. 그때 한국 예술가들이 뉴욕에 가서 <렌트>를 많이 봤다. 당시 뮤지컬 배우가 많지 않아서 오디션 문화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는데 <렌트>는 오디션 문화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워낙 배우들 사이에 로망인 작품이어서 유명 배우들도 다 오디션에 참여했다. 공연 전 티켓의 68%가 예매됐고 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일주일간 연장 공연을 할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다. <렌트>를 통해 공연 마니아나 배우 팬클럽이 탄탄해지는 등 뮤지컬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초연 때 김선영, 김영주, 재연 때 정선아, 김호영, 문종원 등 이 작품을 통해 많은 뮤지컬 배우들을 배출했다. 
 

<렌트>는 동성애와 AIDS 등 그때만 해도 굉장히 터부시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작품이 2000년 한국에서 통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인가?

AIDS나 동성애는 미국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고, 이 작품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봤다. 동성애나 AIDS는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과정에 연관된 문제일 뿐 작품의 중심 주제는 사랑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젊은 관객들이 열광했다. 지나고 나서 느낀 일이지만 초연 때 <렌트>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올린 건 미친 짓이었다. 그때는 공연장이 없어서 그런 일까지 했는데 돌아보면 정말 무식했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 한 해 대여섯 작품은 꾸준히 올렸다. 굉장히 왕성한 활동을 했다. 


 

IMF 직전이었기 때문에 대극장 뮤지컬을 올릴 단체가 많지 않았다. 

<더 라이프>로 뉴욕에서 신용을 얻고 나니까 뮤지컬 라이선스를 따는 데 수월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시카고>, <듀엣>, <렌트>, <카바레>, <키스 미 케이트> 등 <맘마미아!> 전까지 많은 작품을 올렸다. 2002년까지 대극장 뮤지컬 중 상당 부분을 신시에서 만들었다. 
 

2005년에는 과거 폴리미디어시어터(현 대학로 TOM 공연장)를 임대해 신시뮤지컬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중극장 규모의 작품이 활성화되지 않은 편인데 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큰 극장에서는 무대 메커니즘이 중요하지만 300~400석 극장에서는 규모상 아기자기한 이야기 중심의 뮤지컬이 적당하다. <까미유 끌로델>이나 <블러드 브라더스>처럼 이야기가 탄탄한 연극적인 뮤지컬을 올리고 싶었다. 드라마가 강한 연극적인 뮤지컬을 레퍼토리로 한 4~5개 작품 만들어 놓으면 1년 동안 순환 운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꿈이었지 잘되지는 않았다. 손실을 보면서 투자를 이어가다 결국 사업을 접었다.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이었다.
 

왜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중극장 뮤지컬이 성공하기 힘든 환경이다. 일반 관객들은 쇼적이고 화려한 대형 뮤지컬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드라마가 강한 뮤지컬은 연극에 노래 몇 곡이 들어간 것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이러한 작품들이 외면받았다. 작은 극장에서 뮤지컬을 보느니 차라리 연극을 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객층이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때만 해도 관객층이 넓지 않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의 꿈이었던 거다. 실패하고 자성하고, 그러면서 더 발전된 방향을 찾고.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조연출만 11년을 했다. 가난한 시절에 막내로 극단의 허드렛일부터 다 해왔다. 현장에서 밑바닥부터 익힌 체험이 나만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신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렌트> 같은 브로드웨이 작품뿐만 아니라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유린타운>, <뱃보이> 등 오프나 오프오프 규모의 특색 있는 뮤지컬을 선보이기도 했다. 

뉴욕에 연수 갔을 때 발굴한 작품들이다. <뱃보이>(박쥐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 같은 작품이 통할까, 의문도 들었지만 우리 시장에 이런 뮤지컬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흥행 결과는 썩 좋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중극장 규모의 작품을 올렸던 것이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됐다. 작은 꿈을 꾸어야 큰 꿈을 꿀 수 있듯이, 작은 작품을 해야 큰 작품도 할 수 있다. 이런 경험들이 신시에 많이 누적되어 있다. 이를 통해 어려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자질을 키워 나갔다.

 


 

성공과 실패, 끊임없는 발전으로 향한 과정

2007년에는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산불>을 각색해 <댄싱 섀도우>를 선보였다. 창작뮤지컬 중 킬링 콘텐츠가 요구되는 시점에 만들어져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기대에 호응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제작한다면 어떤 점을 다르게 접근하고 싶은가?

작품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흥행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은 고급스러웠고 앙상블 수준은 높았다. 셋업 리허설만 3주를 하는 등 준비도 철저히 했다. 그러나 원작의 색깔이나 정서를 살리지 못하고 너무 우화적으로 풀어내다 보니 실체가 없는 작품이 되어 버렸다. 보편성을 추구하다 보니까 관객들이 감동하고 수긍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만들지 못했다. 가장 많은 수업료를 낸 작품이다. 과도하게 많이 냈다. 
 

창작뮤지컬을 만든 작품의 원작을 보면 사실주의 희곡인 『산불』이나 대하소설 『아리랑』같이 뮤지컬로 만들기 힘든 작품을 선택했다. 이런 원작을 고른 이유가 있나?

연극을 했던 죄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나 가장 기본은 연극이고 이야기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극적인 색채, 이야기 중심의 뮤지컬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작업하기 어려운 소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올리는 작품인데 공연이 끝나면 해답을 찾지는 못할망정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요즘 창작뮤지컬을 보면 트렌디한 작품이 많다. 관객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라면 이 시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30주년 기념작 뮤지컬로는 <마틸다>를 선택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지금의 한국 시장에선 도전과 모험이지만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신작이고 <레 미제라블>을 만든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작품이라 믿음이 갔다. 그동안 신시가 추구해 왔던 정신에 부합한 작품이다. 그리고 <마틸다>는 어린이 관객부터 중장년층까지 관객층을 확대할 수 있는 작품이다. 뮤지컬 관객층을 다양화하고 넓힐 수 있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신시가 추구해 온 정신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신시는 뮤지컬 중에서도 스토리가 중심이고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선택해 왔다. 연극을 하던 극단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단체다. 연극 정신을 기본으로 작품을 제작해 왔다. 오락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는 그동안 시사성이 있고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게 신시의 뿌리이고 30년 동안 추구해 온 정신이다. 
 

지금의 뮤지컬 시장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한국 뮤지컬 시장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다. 뉴욕이나 런던은 관광객들이 계속 오니까 롱런할 수 있는 시장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오페라의 유령>이나 <아이다>가 6개월 이상 공연을 했다. 이 작품들은 작품에 대한 호기심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는데 지금은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이 정도의 유명 콘텐츠가 거의 없다. 지금 시장에서는 6개월이 롱런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새로운 관객층을 확대하느냐가 관건인데 <빌리 엘리어트>나 <마틸다>가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본다. 이들 작품의 영향으로 가족 관객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 가족 관객층의 확대는 단순히 시장의 확대뿐만 아니라 미래 관객층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신시는 브로드웨이와의 시차를 줄이는 데 앞장서 왔다. 뿐만 아니라 중소극장 규모의 작품성 있는 뮤지컬을 소개하는 등 뮤지컬 시장을 키우고 다양화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해나갈 생각인가?

한 단체가 시장에 영향을 주기에는 한국 뮤지컬 시장은 이미 너무 거대해졌다. 한국 뮤지컬 제작 환경이 좋지 않다.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스태프와 미래 뮤지컬 스타인 앙상블을 얼마나 대우하고 이들에게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미 우리 배우들의 기량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제는 획기적인 무대를 만들고 연출할 수 있는 기술 스태프와 연출을 발굴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이런 인재들이 한국 뮤지컬의 수준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인재가 많아야 발전이 가능하다. 그리고 더블 캐스팅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멀티 캐스팅은 자제해야 한다. 멀티 캐스팅이나 겹치기 출연은 작품의 질을 떨어지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배우의 생명력을 줄이는 일이다.


 

작품을 만드는 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맘마미아!> 같은 작품은 누가 만들어도 성공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작품도 만들 때부터 성공작은 없다.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과 영혼이 얼마나 들어갔느냐에 따라 관객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만들더라도 원작의 흥행만 믿기보다는 그 작품이 흥행하기까지 어떤 노력을 들였는지 보아야 한다. <마틸다>를 흥행시키기 위해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을까, 그 어려운 점을 알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이해해야 국내에서도 이겨낼 수 있다. 몇 년 동안 몇 번의 쇼케이스를 거쳤고, 캐스팅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결과가 아닌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시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신시의 미래 30년은 내가 아닌 차세대에서 많이 고민해야 한다. 2~3년부터는 작품을 선정하는 일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30주년 기념작으로 올리는 <마틸다>나 연극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 역시 차세대 멤버들이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선정한 작품이다.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다양한 관객층의 트렌드를 읽고 공감하고 설득시키는 작업은 젊은 세대가 훨씬 낫다. 최은경 대표를 비롯한 차세대 멤버들은 나와 20년 넘게 작업을 해왔던 친구들이라 그동안 신시가 해왔던 일을 잘 이해하고 나보다 훨씬 더 잘 이끌 인재들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8호 2018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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