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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MINI SPECIAL] 여성의 눈으로 본 2018 뮤지컬, 2018년 뮤지컬 속 여성을 되돌아보다 [No.183]

글 |이수진 극작가 겸 칼럼니스트 정리 | 안세영 2018-12-26 6,467

여성의 눈으로 본 2018 뮤지컬

 

올해 초 공연계에 파장을 몰고 온 미투 운동은 현실의 성폭력을 처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대 위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냈다. 주체적인 여주인공을 내세운 창작뮤지컬 <레드북>이 열띤 지지를 받았고, <맨 오브 라만차>, <번지점프를 하다>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이 성차별적이거나 성폭력적인 장면을 수정했다. <광화문 연가>의 월하, <더데빌>의 X, <록키호러쇼>의 콜롬비아처럼 성별에 관계없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도 활성화되었다. 크고 작은 변화의 물결이 감지된 2018년, 무대 위 여성의 입지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더뮤지컬>이 연말결산의 일환으로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시리즈 기사를 마련했다. 먼저 미투 운동 이후 재공연을 올린 작품들이 달라진 시대 감수성에 맞춰 문제적 장면을 어떻게 수정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한 해 동안 올라간 흥행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를 소환해 그들이 극 중에서 그려지는 방식의 문제점을 짚어 본다. 마지막 글에서는 올해의 화제작 <베르나르다 알바>에 집중한다. 남성 편향의 공연계에서 10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올해 가장 혁명적인 작품이다. 여기서는 이 공연이 여성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어떻게 고발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한편, 원작 희곡이 뮤지컬로 옮겨지면서 여성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파헤친다. 

 

 

2018년 뮤지컬 속 여성을 되돌아보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의 원작은 미국 작가 진 웹스터가 1912년 발표한 소설이다. 주인공 제루샤는 익명의 후원자 덕분에 처음으로 고아원 밖으로 나가 대학에 입학하고, 후원자의 요구대로 꾸준히 편지를 쓴다. 그런데 이 일방통행의 편지에서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고삐를 쥐는 것은 후원자인 제르비스가 아니라 제루샤다. 원작은 제루샤의 편지로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지만, 뮤지컬에는 제루샤와 제르비스 두 명이 등장해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관객은 교육받으며 무섭게 성장해 가는 제루샤와 그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제르비스의 모습을 지켜본다. 겉으로는 제르비스가 물질을 통해 제루샤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그 돈을 받은 제루샤의 학구열과 오픈 마인드다. 졸업을 하고 자립을 꿈꿀 무렵 제루샤는 그동안 받은 교육비를 되갚기 위해 자신의 첫 소설 원고료를 편지에 동봉해 보내는 인물로 성장한다. 동시에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제루샤에게 떼를 쓰고, 관계를 단절하고, 후원금으로 제루샤의 마음을 사려 하는 제르비스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제루샤의 성장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백여 년 전 소설 속 제루샤는 자신을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다. 뮤지컬은 변화하는 제루샤와 그런 제루샤 앞에 손을 든 제르비스가 결혼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제루샤의 당당한 변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투 운동으로 문을 연 2018년, 다른 뮤지컬 속 여성들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대형 창작뮤지컬의 성공작으로 손꼽히는 <프랑켄슈타인>에는 조연급의 두 여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친을 변형한 누나 엘렌이고, 또 한 명은 약혼녀 엘리자베스의 변형인 줄리아다. 짧지 않은 원작 소설을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하나로 합칠 수도 있었을 인물들을 나누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속에서 이 둘이 맡은 역할은 명확하다. 빅터의 각성을 위해 죽는 것. 남성 인물들이 여성 인물의 고통과 죽음을 딛고 ‘각성’하는 게 새롭지도 않건만, 뮤지컬은 원작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누나로 대체해서까지 희생시킨다. 두 명의 가장 가까운 여성들이 희생되고 나서야 빅터는 자신의 피조물을 없앨 동기와 용기를 얻는다. 원작 소설에서 빅터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어린 동생을 살해한 누명을 쓴 자신의 하녀 저스틴의 무죄를 굳게 믿고 누구보다 강경하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또한 빅터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직언을 하는 작중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뮤지컬 속에서의 줄리아는 그저 빅터만을 태양처럼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인물로 전락한다. 원작자인 메리 셸리는 최초의 여성주의 저서인 『여성의 권리 옹호』를 썼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다. 메리 셸리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인간으로서 평등한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대의 교육받은 여성이라는 존재는 혁명가보다 위험하면서도 가치 없는 존재였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피조물은 어쩌면 ‘교육받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을 담은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작의 탄생 배경을 생각했을 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두 주요 여성 등장인물이 남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도구로, 그리고 남성 주인공만을 바라보는 인물로 후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스테디셀러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원작 소설에는 여성 인물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이 소설은 인류 최초의 이중인격자에 대한 보고서이자 판타지다. 뮤지컬로 각색되면서 여기에는 두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추가됐다. 본체인 지킬의 약혼녀인 엠마와 약물로 탄생한 악의 화신 하이드가 집착하는 창녀 루시다. 지킬이 선의 집약체인가 하는 질문에는 누구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탄생한 하이드는 어쩐 일인지 악의 집약체 같은 인물이다. 순수한 악의 결정체가 탄생했으니 선과 악을 분리하려는 지킬의 시도는 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탄생한 하이드의 이름은 차라리 욕망이라고 붙이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티븐슨은 내면에 어떤 욕망을 지녔기에 자신의 욕망을 ‘악’이라 지칭했던 것일까. 관객은 이러한 질문을 품어보기도 전에 그저 난무하는 하이드의 복수극을 지켜본다. 그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의 수레바퀴에 말려 들어가는 엠마와 루시는 조건 없는 사랑을 지킬에게 바친다. 지킬은 사실 이 둘에게 그저 말뿐인 애정을 표시하는 게 전부다. 약혼식을 올린 다음 날부터 연락 두절인 약혼자이건만 믿는다는 말만 거듭하는 엠마와,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에 오매불망 사랑에 빠진 루시의 차이는 신분뿐이다. 두 여성의 입에서 지킬 외의 다른 무엇이 등장할 때는 거의 없다. 덕분에 지킬은 무대 위에 있든 무대 밖에 있든 아련한 동경의 대상으로 굳게 자리 잡지만, 두 여성을 사로잡는 매력이 무엇인지는 배우들의 열연 말고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실제 무대 위의 지킬은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결단을 내린 순간은 단 두 번, 자신에게 시약 실험을 할 때와 죽을 때뿐이다. 심지어 죽을 때조차 타인의 손을 빌리는 민폐를 자행한다. 하이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루시는 지킬의 각성, 아니 반성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끝내고 장렬하게 사라진다. 아무리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지만 엠마와 루시의 무지막지한 지킬 사랑은 진실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엘리자벳>의 타이틀롤 엘리자벳은 올해 개막한 흥행작 여주인공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사례에 속한다.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인물로, 죽음마저 사랑에 빠져 더 살려두기로 결정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로 회자된다. 하지만 정작 엘리자벳의 욕망과 꿈이 무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는 처음에는 ‘남다른’ 엘리자벳을 욕망하지만 결혼 후에는 엘리자벳이 다른 왕비들처럼 ‘평범한’ 아내 역할을 해주기를 원한다. 엘리자벳의 아들인 루돌프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좀 더 빨리 권력을 쥐기를 원한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일과 사랑, 제국 중 무엇 하나 포기할 생각이 없다. 작중 화자인 무정부주의자 루케니는 마치 <에비타>의 체 게바라처럼 극 전체를 이끄는 인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를 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그 시대의 ‘관종’이다. 하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 엘리자벳의 욕망과 꿈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것’을 목청 터지게 부르지만 나만의 것이라 선언한 그 사람의 꿈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어떤’ 나는 없다. 헝가리의 왕비가 되겠다고 선언할 때조차도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편의 의지에 반하기 위해서라는 사실만 뚜렷하게 보일 뿐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의 사랑을 받던 엘리자벳은 과연 누구였을까? 죽음이 엘리자벳을 사랑한 게 아니라 엘리자벳이 이미 죽은 인생을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반면 <마틸다>나 <레드북> 같은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마틸다>의 마틸다는 한국 나이로 여섯 살인 천재 초능력자이고, <레드북>의 안나는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20대 후반의 음란 소설 작가다. 나이를 떠나 이 둘은 자신을 교육하여 각성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가족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고 다른 누구로부터 이해받지도 못하는 이들은 제 발로 학교나 문학회를 찾아가 친구를 만들고 세상에 손을 내민다. 이 여성 캐릭터들은 각성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을 각성하게 하는 것은 차별받는 세계 전체가 일 분도 쉬지 않고 선사하는 분노로 충분하다. 현재 내한 공연 중인 <라이온 킹>에서 심바의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날라 역시 매력적인 인물이다. 왕가의 혈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왕정복고를 꿈꾸는 이 작품 속에서 날라는 아기 사자 때부터 심바를 발밑으로 누르는 완력과 이성을 갖춘 캐릭터다. 결말은 심바의 왕비가 되어 새 왕의 어미가 되는 것이지만, 자질만 보면 날라가 무리의 왕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여성이 꿈을 꾸면 괴짜가 되는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난 줄 알았지만 뮤지컬 속 여성 인물들은 여전히 백 년 전, 이백 년 전의 발걸음을 답보하고 있다. 그 와중에 ‘괴짜’나 ‘돌연변이’가 되어서라도 역풍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것이 2018년 무대 위 여성 인물의 현주소다. 심지어 이 인물들은 세계를 파괴하거나 뒤집어엎을 생각도 없다. 놀랍게도 이 괴짜 여성들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평등한 평범이 아직도 요원한 시대에 한국 뮤지컬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2019년을 기대해도 좋을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3호 2018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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